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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27. 2016

음악처럼 걸었다,
시간이 길을 잃은 곳에서(피렌체)

이탈리아 기억의 온도 3 (피렌체, 피사, 아레초)





 Dolce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는 붉은 화살이라는 뜻의 <프레치아 로사>. 시속 300km로 달리며 고급스러운 가죽 시트이다. 홍익회 같은 카트를 밀고 다니며 기내 서비스처럼 커피와 스낵을 나눠주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라 그런지 연한 초록 기운이 번져있다. 서리가 내렸는지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 온통 올리브빛이 지속되는 풍경이 몽환적이다. 대기 중에 무언가 흐르고 있다. 각각 나름의 리듬으로 흔들린다. 무슨 거대한 화음처럼 느껴진다. 간혹 어떤 시간은 금세 사라질 듯 조마조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그럴 땐 밥 짓는 연기가 하늘로 풀려 나가듯, 시간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다. 피렌체에 대한 연민과 기대감이 그랬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괄호에 묶여있던 시간들을 하나 둘 비밀번호를 풀고 사라져갔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SMN) 역은 거대하지도 고풍스럽지도 않았다. 바르비노 1번지에 있는 ‘까사 디 바르비노’는 피렌체에서의 4박 5일 동안 머물 집이다. 지도상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지만 여행 캐리어 때문에 택시를 탔다. 예상대로 가까운 거리였다.


  조용한 주택가 좁은 골목 입구, 벽에 <Casa di Barbino>라는 반짝이는 이름표가 멋들어진 필기체로 새겨져 있다. 내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나무문을 열었다. 크고 둥그런 주물 손잡이가 양쪽에 매달려 있는 문은 두 팔로 밀어도 버거울 정도로 육중하다. 가정집을 개조한 B&B(Bed & breakfast), 그러니까 달랑 방 세 개 밖에 없는 소박하고 아늑한 곳이다. 오른쪽으로 계단이 보이고 왼쪽에는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나무문이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래되어 낡은 책상과 역시나 엔틱 한 장식장이 돋보이는 작은 사무실이 있다. 아담한 키와 수수한 외모의 아주머니가 우리를 반긴다. 인사를 나누며 내가 말했다.  

  "You must be Moraq" 

  호텔 사이트에 올라온 후기에는 그 이름이 많이 등장했다. 그곳에 묶었던 각국의 여행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녀의 찬사 일색이었으므로 그 이름을 기억했다. 아직 방 청소가 안 끝났다면서 근처 돌아볼 곳들을 알려주었다. 약간 상기된 듯한 모라끄의 목소리는 진노랑 나비가 나풀거리는 느낌이다. 지금 가면 아마 우피치 미술관도 줄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 했다. 



  피렌체의 길은 모두 좁다. 비교적 넓은 도로가 버스 두 대 아슬아슬하게 교차할 정도이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자동차는 소형이나 초소형(1인용)이다. 우리나라의 경차는 그곳에 가면 중형 대우를 받을 정도이다. 조금 걷다 보면 말 탄 동상이 있는 광장(piazza)과 박물관, 성당, 또 조금 걸으면 수 백 년 동안 물을 뿜어댔을 분수와 공원, 그리고 꽃의 도시 플로렌스라는 이름과 걸맞게 꽃을 파는 총각이 차례로 나타나고 사라졌다. 딱히 어딜 가야겠다는 생각 없이 느긋하게 피렌체를 걷는다. <Tang>이라는 이름의 중국 음식점으로 들어가 

볶음국수와 새우 볶음밥, 그리고 야채 수프를 먹었다. 별다른 향신채 냄새 없이 무난한 식사였다. 다시 길을 나서는데 100m쯤 앞쪽의 길 틈으로 거대한 돔의 일부가 조금 어두운 빛으로 보였다.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즉 피렌체의 두오모이다. 


  내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심장 박동이 자꾸만 박자를 잃고 헛디디는 듯했다. 나의 정신이 알 수 없는 또 다른 음계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떤 신도 두오모를 껴안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색과 분홍색의 대리석이 순한 짐승처럼 서로 깍지를 끼고 생의 한 일정을 지나왔을 터였다. 이미 한 없이 견뎌온 돌과 돌 사이에 끼어있는 세월이 성당의 숨소리처럼 느껴졌다. 두오모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이라는 조토의 종탑과, 단테가 세례를 받은 산 조반니 세례당을 아들과 딸처럼 껴안고 있다. 



  피렌체의 고고한 예술과 우아한 분위기를 이탈리아, 아니 전 유럽에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은 메디치 가문 덕이다.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다른 지배자들처럼 으스대지 않았다. 참으로 예술을 이해하고 예술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 진정성이 오늘날 역사에 빛나는 한 장이 된 것이다. 오후의 길게 누운 햇살이 그림자와 여실히 대조되어 사진 찍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도착했을 뿐이니 내일 아침에 여유 있게 다시 오자며 돌아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이탈리아 대표 마켓인 코나드를 발견했다. 일반 상점이나 음식점에서 생수는 500ml가 1.2~1.5유로, 그러나 마트에서는 2L 하나가 0.7유로다. 무겁지만 감수하고 사 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빵이며 생수, 요구르트, 과일 등을 사서 새로 이사한 집으로 돌아가듯 기분 좋은 발걸음을 이어갔다.  

  모라끄에게 받은 세 개의 열쇠를 차례로 따고 1층 방으로 들어갔다.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많은 여행지에서 비슷비슷한 호텔 방을 보아왔던 터였다. 그곳은 나를 위해 특별히 꾸며 놓은 듯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방문 왼쪽으로 단순한 디자인의 갈색 콘솔이 있다. 길고 커다란 창문에 우아하게 드리워진 올리브 색 커튼과 어울리는 그린 컬러의 벽지,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마치 이미 알고 있어서 준비한 듯 침대 머리 위엔 내가 좋아하는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걸려 있다. 침대 양쪽엔 사이드 테이블이 각각 놓여있고 한쪽엔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옷장과 거울이 달린 서랍장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침대 발치 쪽 테이블 위엔 은쟁반이 놓여 있고 그 위로 작은 바구니엔 바라만 봐도 침이 고일 듯 달콤해 뵈는 사탕이 담겨있다. 창 옆으로 주석이 테두리 쳐진 타원형 거울이 걸린 화장대와 의자, 그리고 푹신한 카우치, 은은한 벽 등 까지 어느 하나 맘에 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캐리어를 열어 옷들을 걸고 필요한 물건들을 각각의 위치에 꺼내놓았다. 이 방을 떠나는 날은 무척 서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시쯤 되었을까? 남편은 이미 은하철도 999를 타고 떠난 지 오래된 듯 얕게 코를 골고 있다. 기회다 싶어 실실 밖으로 나갔다. 5분쯤 걸었을까? 비가 내린다. 곧 그칠 것 같기도 하고 더 세차게 올 것 같기도 하며 가늠이 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갔다. 창문 아래쪽에 라디에이터가 있어 켜봤지만 찬바람이 나왔다. 사무실엔 아무도 없고 방엔 인터폰도 없다. 살짝 추운 감이 들어 옷장에 들어있는 여분의 담요를 꺼내 덮었더니 이내 아늑하고 포근하다. 참 조용한 동네다.   


  아침 7시 30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모라끄가 아침을 준비해서 방으로 가져온 것이다. 방금 끓인 모카커피가 담긴 비알레티와 백색의 커피 잔, 은 주전자에 담긴 따끈한 우유, 투병한 유리병에 담긴 신선한 오렌지 주스, 고소한 크로아 상과 바게트, 버터와 각종 잼, 사과와 바나나, 비스킷이 담긴 바구니 등이 두 개의 은쟁반에 담겨 왔다. 완벽한 룸서비스이다. 모라끄는 그렇듯 매일 아침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서 정확히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특별한 대접을 받는 기분의 색다른 경험이었다. 

  “방이 추워요”

하니 깜짝 놀라면서 히터 켜는 걸 깜빡 잊고 말해주지 않았다며 미안해한다. 그리곤 바로 이동식 전기 히터를 가져다 켜주었다. 방에 부착된 히터는 온수를 쓰는 동안은 잠시 찬바람이 나오지만 곧 따뜻해지니까 언제든 켜 놓으면 된다고 한다. 의문이 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복도에 있는 벨을 누르라고 한다. 건너편의 문을 가리키며 그쪽에 자기 집이 있다고 말한다. 어찌나 미안해하는지 내가 더 미안한 감이 들었다.  




  Adagio 


  어제 오후 시작된 비는 더도 덜도 아니게 아다지오 테누토 내리고 있었다. 비는 언제라도 좋아라 하는 나다. 여행지에서, 그것도 꽃의 도시 플로렌스에서 만난 비가 선물처럼 여겨졌다. 클림트의 그림이 그려진 노란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돔)에 올라갈 작정이다. 기온은 10도 안팎이니 춥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비가 내려선 지  습습한 한기가 온몸 구석구석 파고들어 으슬으슬 추웠다. 

동상의 어깨 위로 동상의 어깨 위로, 광장의 돌 위로 떨어지는 비는 공기를 흔들며 적시고 있다. 사륵사륵 끊임없이 들리는 희미한 빗소리에 시간도, 장소도 형태를 빼앗기고 있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산티시마 안 눈 시아타 광장을 지나 조토의 종탑과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천국의 문을 세세히 구경했다. 이른 아침이고 비가 내리니 여행자들의 수는 전날 오후와는 대조적으로 적었다.


< No Lift, 463 Steps> 


  밀라노와 달리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오직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그래도 돈은 받는다. 463개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꼭대기로 향했다. 좁고 가파른데다 구불구불하여 무척 힘들었다. 한 여름에 오르는 일은 어떨지 짐작되고도 남았다. 2/3쯤 올라가니 성당 안쪽의 발코니를 따라 180도 정도 걸어간 다음 다른 출구로 나가 다시 오르게 되어있다. 쿠폴라의 천장화를 자세히 볼 수 있게 한 것이라 생각된다. 바사리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다. 그림의 내용은 미켈란젤로의 그림과 비슷해 보였다.  



  한 제목의 소설을 두 남녀 작가인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2년여에 걸쳐 실제로 연애하는 마음으로 쓴 릴레이 러브 스토리 장편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는 두 남녀 작가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랑의 행방을 실제로 사랑을 앓는 마음으로 한 회씩 써 내려갔다. 10년 후 재회의 약속을 가슴에 묻어 둔 두 연인, 준세이와 아오이. 이 소설의 무대 뒤에는 연애, 그 이상의 전율이 있다. 여주인공 아오이는 금방이라도 스스로 깨져 흩어질 것 같고 준세이는 단단하지만 어느 순간 반으로 쩍 갈라질 것 같다. 10년간의 틈이 실 낱 같은 간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사람의 우연이 아닌 우연의 시간이 찾아왔을 것이다. 아오이가 그랬듯, 준세이 또한 한 순간도 그녀가 곁에 없는 순간이 없었다. 늘 기억하고, 항상 느끼고, 언제나 함께였다. 그러나 저릿한 사랑은 끝끝내 아프고 만다. 그 애매한 속도만큼이나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 허하게 나풀거린다. 삶의 한 자락에서 쓸쓸한 구석을 함께 지켜왔던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랑일 거다. 그리움은 뭔가 만날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쿠폴라 꼭대기 역시 비가 내렸다. ‘내 죄를 사하노라’ 하며 만물에 세례를 주듯 내리고 또 내렸다. 잠시 우산을 내려놓고 맹물 같은 비를 맞았다. 슬픔의 냄새가 느껴졌다. 내 감정의 온도도 비와 함께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쿠폴라에서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보니 도시의 지붕은 온통 붉은빛으로 그득하다. 그 지역의 흙으로 기와를 구우면 붉은색이 나오는데, 피렌체의 지붕은 그 기와만 사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고 한다. 아름다움을 만들어 놓은 건 그들의 조상이지만 지키는 것은 후손들의 몫이다. 좁은 길의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는다. 1인용 자동차를 타며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들을 오르내리고 여전히 붉은 기와를 찍어내는 일 같은 사소한 불편을 기꺼이 감싸 안는다. 그것이 행복한 일임을 알고 있음이다.


  두오모 뒤편에 있는 오페라 박물관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공사 중이라 천막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10유로나 주고 들어갔는데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천국의 문> 진품과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피에타>뿐이다. 예수님을 뒤에서 받치고 있는 사람은 미켈란젤로 자신이라고 한다. “이게 다야?” 물으니 “지금은 오직 2개밖에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로 출장 갔을까?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과 베키오 궁전을 지나 우피치 미술관에 다다른다. 이태리어 우피치(Uffizi)는 오피스에서 기원한 말로 '사무실'을 뜻한다. 우피치는 르네상스 회화의 컬렉션으로 질이나 양적으로 세계 제일의 미술관이다. 두 채의 궁전과 이를 잇는 회랑으로 진회색의 장방형 건축물이다. 예약 피를 주고 예약을 해도 줄을 서야 하는 곳이다. 74유로나 하는 피렌체 카드를 사면 상대적으로 줄이 짧아 조금 빨리 들어갈 수 있는 인기 있는 미술관이다. 그런데 6.5유로, 일반 티켓을 샀을 뿐인데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비수기라는 것과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곳을 헐렁하게 만든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 중인 티치아노의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에도 비너스가 등장한다. 비너스는 손으로 신체 주요 부분을 가린 채 요염하게 누워 있다. 가려진 부분에 대한 호기심뿐만 아니라 관람객을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이 강렬하다. 이 비너스는 당시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음은 물론 후에 인상파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나 프란시스코 고야의 ‘마하 부인’을 탄생시키는 모티브가 됐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우피치 미술관의 두 비너스는 시대에 앞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강조한 작품이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손 안나 마리아는 1743년 사망하면서 우피치 미술관을 비롯한 가문의 전 재산을 피렌체 시에 기증했다. 단서는 오직 하나. ‘이 유산들은 절대 피렌체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이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피렌체를 방문해야 한다.’ 이 한마디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영원한 꽃밭이 됐다.
 

  주로 3층에 전시되어 그림을 집중적으로 감상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예배>와 <수태고지>,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라파엘로의 <검은 방울새의 성모>, <자화상>,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카라바조 그림 등 유명 작품을 위주로 둘러보았다. 45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그중 몇 개의 방은 공사 중인지 개방하지 않았다. 미술관에서 나와 아르노 강을 건넜다. 누런 강물이 베키오 다리와 조화를 이루며 흘러갔다.   




Sospirando


 벌써 9년 동안 피렌체 시내를 헤맸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축제에 참석한 단테 (1265~1321)는 이 은행가 집안의 딸인 소녀 베아트리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새하얀 피부에 눈부신 에메랄드빛 눈을 한 소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매너와 상냥한 응대로 소년 단테의 가슴을 고동치게 했다그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듯했다그 후 단테는 하루도 소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그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녀의 집 앞을 서성거렸다어떤 때는 주변의 도로에 주저앉아 온종일 망부석이 된 적도 있었다그러나 소녀는 마치 천국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그럴수록 소녀의 환영은 아련히 사라지기는커녕 더욱더 생생한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아침에 눈을 뜨면 소녀의 환영이 먼저 그를 깨웠다그리고 그 환영은 하루 종일 그의 무언의 동행자가 됐다그는 여느 때처럼 순례하듯 포르티나리가를 지나 시내 중심가를 한 바퀴 소요하고 있었다베키오 다리 아래 산타 트리니타 다리 난간에 기대 무심히 아르노 강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 위로 여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베아트리체였다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는 성숙한 여인의 체취를 풍기긴 했지만 9년 전의 고고한 자태 그대로였다뜻밖에도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심장도 입도 얼어버린 단테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한 채 짤막한 9년 만의 해후를 허망하게 지나 보내야 했다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 16년간 자신의 가슴에 자리해온 여신을 잃은 상실감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 일을 계기로 단테는 베아트리체와의 두 번째 만남 이후 그에게 바친 연시를 모아 라 비타 누오바(새로운 인생, 1294)’를 출간한다.(한국경제 2012. 10.19)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난 건 지금부터 700년 전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평생 두 번 밖에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단테는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영원한 구원의 여신상으로 쓰는 교두보로 여긴 것 같이 생각된다. 단테의 신곡은 천국, 연옥, 지옥의 세 편으로 나뉘는데 등장인물이 무려 900명을 넘는다 하여 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인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단테의 신곡과 일맥상통한다. 그뿐 아니라 리스트는 단테 소나타를 작곡했고 많은 화가들이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만약 아버지가 나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베키오 다리에서 아르노 강으로 떨어져 죽고 말겠어요.’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 나오는 아리아‘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 중 한 대목이다. 극 중 여주인공 라우레타는 아버지 잔니 스키키에게 연인 리누치오와의 결혼을 허락받고자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한다. 절절한 노랫말에 감동한 관객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곤 한다. ‘사는 게 뭐 다 그렇지’라고 치부하기엔 인생이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되는 장면이다. 푸치니는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이 곡을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아름다운 서정이 깃든 아리아를 음미하며 아르노 강 위에 놓인 베키오 다리를 걸었다. 


  베키오 다리를 건너는 일은 심심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이루어지지 않은 기막힌 사랑과 달리 연인들의 사랑의 징표를 위한 화려하고 값 비싼 보석 가게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 피티 궁전을 대략 살펴보고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때 골목에서 우연히 아시아 마켓을 발견했다. 한글이 써진 신 라면을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오징어 짬뽕 라면과 섞어서 다섯 개, 달걀 6개 한 팩, 그리고 김치를 대신할 칼칼한 고추 피클을 샀다. 갑자기 부자가 된 듯 마음이 뿌듯했다.  



  비는 여전히 더딘 걸음으로 자작자작 내린다. 아무 지침도 없이 내린 비가 길의 자취를 걷어낸 것일까? 빗물에 줄이 풀린 배처럼 어디까지 흘러왔는지 알 수가 없다. 지도를 보고서야 너무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다는 걸 알았다. 궁전과 미술관, 성당에 취하여 생각 없이 걸었다. 감탄과 환희와 아름다움에 취해 다리 아픈 것도 잊었다. 그러나 그 길을 다시 되짚어 걸어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발은 젖었고 춥고 배가 고프다. 갑자기 불쌍한 생각이 든다. 버스도 택시도 보이지 않는 좁은 길엔 인적마저 드물다. 비가 내리면 어둠이 쉬 내리는 법, 탈 것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길을 나선 게 탈이었다. 몇몇 사람들에게 버스 타는 곳과 노선을 물어보았지만 ‘없다’라는 말뿐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택시를 탈 수 있는 곳은 어디냐고 하니 ‘피렌체는 도로가 좁고 주차할 곳이 없기 때문에 택시가 많지 않다. 기차역이나 미켈란젤로 광장처럼 넓은 곳에서 탈 수 있다’는 영양가 없는 대답만 돌아왔다. 막막하다. 익숙함의 편안함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낯선 곳의 긴장감을 좋아한다. 추리소설처럼 풀어나가는 즐거움 때문이다. 그러나 갑자기 무엇인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린 듯 생각도 길을 잃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학생이 발을 멈췄다. 감색 패딩에 백 팩을 맨 갈색 고수머리의 소년은 이제 막 어린아이 티를 벗기 시작한 듯했다. 

  “도와 드릴까요?”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아이의 대답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달랐다. 

  “제가 콜택시를 불러드릴 수 있는데 그러길 원하세요?” 

  “정말? 고맙지 제발 그렇게 해줄래?” 

스마트폰을 검색하더니 이내 통화를 한다. 그리곤 3분 내에 택시가 올 거라고 했다. 자기는 서울에 가보지 않았지만 무척 가보고 싶다고, 책이나 TV에서 봐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몇 살이냐고 물으니 13살이란다. 신이 나는 듯 그러나 침착하고 상냥하게 말하곤 할 일을 다 한? 그는 총총 떠나갔다. 학생의 말대로 곧 택시가 왔고 우리는 집으로 편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아마 천사였을 거야’ 

  “나는 피사에 좀 가보고 싶은데…” 

남편이 어딜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 난 아씨시나 시에나에 가려고 했지. 피사는 기울어지고 있는 탑 외에 별 다른 게 없을 텐데?”  

  “그러면 내일 조금 일찍 나가서 근교 도시에 갈 수 있는 기차 시간을 알아보고 적당한 곳으로 갑시다.”

그러나 나는 남편이 처음으로 표현한 ‘싶음’의 갈증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하루하루의 일정을 완벽하게 정하고 떠난 게 아니다. 잘 짜인 시간표일지라도 거기서 벗어나면 의외의 기쁨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자면 아침 식사를 좀 일찍 달라고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저녁이면 리셉션의 안쪽에서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흘러나오곤 했다. 왠지 집의 분위기가 그렇게 음악이 흘러나와야 당연하다는 듯…. 라디오 소리가 오며 가며 듣기 좋았다. 그날도 그랬다. 복도의 벨을 누르니 모라끄가 바로 나왔다. 

  “내일 아침은 7시에 먹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고맙다고 하곤 돌아서려는데 눈에 띄는 CD가 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좋아 하시나 봐요? 나도 좋아하는데”

  “네! 좋아하죠. 그런데 너무 슬퍼요”

  “왜요?”

  “그가 죽어서요. 그래서 일부러 그의 CD를 꺼내놓은 거예요” 

  “죽다니요, 아바도 가요? 왜요? 언제? 어디서?” 

깜짝 놀란 나는 두서없이 마구 물었다.

  “며칠 전에요. 아바도 조카딸이 우리 딸과 친한 친구라 바로 알았어요, 너무 슬퍼요” 

그제서 나는 라 스칼라 극장 아트 샵에 그의 CD와 DVD가 유난히 많이 진열되었던 걸 기억해냈다. 방으로 들어와 인터넷 검색을 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이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추모하는 연주를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이탈리아 밀라노 현지 시각으로 지난 27일 오후 6(한국 시각 28일 오전 2). 수 천 명의 군중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극장 라 스칼라를 둘러쌌다극장 문은 활짝 열렸지만모두 문밖에 서 있을 뿐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라 스칼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빈 객석을 마주하고 무대 위에 자리했다검은 양복에 넥타이를 맨 거장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72·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은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2악장 장송 행진곡을 지휘하기 시작했다반 세기에 걸쳐 클래식 음악계의 영웅으로 추앙받다  세상을 떠난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 전 라 스칼라 극장 음악 감독)를 위한 추도 연주였다.

  

  이보다 먼저 독일 베를린에서는현지시각 25일 저녁 8시에 또 다른 황혼의 거장 주빈 메타(78)가 검은 넥타이 차림으로 무대에 섰다바렌보임과 마찬가지로 50년 넘게 아바도와 교분을 쌓은 메타는아바도가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음악감독으로 재임했던 베를린 필을 이끌고 추도곡을 연주했다첫 곡으로는말러 해석의 대가였던 아바도를 그리며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가 연주됐다. (한겨레신문 2014.1.28)


  우리가 밀라노에 도착했던 첫날, 라 스칼라 앞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던 그 날, 약 2시간 후에 추모 연주가 시작된 것이다. 그때 알았더라면 동참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가 지휘하며 힘 없이 웃던 모습은 얼마나 해맑고 순수한 지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었다. 특히 그가 지휘하는 베토벤 7번 2악장을 잊지 못한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까지 걸어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티켓을 사려면 우선 번호표를 뽑아야 한다. 이탈리아어로 쓰여 있지만 어림짐작으로 보니 레지오날레(완행열차), 고속열차, 국제열차로 구분된 듯하다. 레지오날레라고 생각되는 글씨를 터치하고 번호표를 뽑았다. 10 여분 기다리니 창구에 번호가 떴다. 당일 피사 왕복 티켓과, 다음 날 아씨시행 왕복 티켓도 예매했다. 


  피사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기까지 약 1시간 30분의 여유를 두고 티켓을 샀다. 역 근처에 있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과 산 로렌초 성당을 둘러볼 생각에서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역에서 5분 거리에 있다. 그린과 화이트의 대리석으로 대칭되게 만든 전면 파사드가 돌로 만든 데칼코마니처럼 아름다웠다. 산 로렌초 성당 역시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메디치 가문의 전용 성당이란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했지만 정면 부분을 완성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화려한 컬러의 대리석도 아니고 채색되지 않은 거칠고 투박한 돌이 주는 질감이 나름 성스럽게 느껴졌다. 회랑을 돌다 보니 어느 방에서는 보카치오의 필사본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피사 역에 내리니 비가 그쳤다. 역 앞, 맥도널드에서 버거 세트를 먹었다. 화장실에 가니 조폭 사촌쯤 돼 보이는 인상의 두 남자가 영수증을 보여 달라고 한다. 지갑을 뒤적거리는데 그냥 들어가라고 한다. 치사하다. 이탈리아는 버스나 메트로의 티켓을 대부분 타바키라는 담배 가게 같은 작은 상점에서 살 수 있다. 그러나 미처 사지 못했을 때는 버스 기사에게 살 수 있지만 값이 거의 두 배다. 기울고 있는 피사의 탑을 두 팔로 받히는 흉내를 내며 사진을 찍느라 여기저기 유쾌한 웃음소리가 소소하다. 우리도 시도했지만 그게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피렌체로 돌아와 일식집에서 돈가스, 덴뿌라 우동, 볶음밥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아침에 산 로렌초 성당을 보고 역으로 가던 중 어떤 블로그에 소개된 맛 집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피렌체로 돌아오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보는 석양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말을 많이 읽었다. 모라끄 역시 매번 강조했다. 그러나 비 내리는 하늘에 일몰이 만무하다. 그래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The Mall>에서 돌아오는 버스가 멈춘다. 너나 할 것 없이 양손엔 큼지막한 프라다 쇼핑백이 몇 개씩 들려있다. 피렌체 근교엔 프라다며 구찌 등 이탈리아 명품 아웃렛 매장이 여러 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포기한 터였다. 오들오들 떨며 그들의 쇼팽 백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저곳에 갔어야 했어’라는 후회는 없었다. 

  다음 날, 아씨시로 가기 위해 다시 SMN역으로 갔다. 전광판에는 노선별로 정차할 역의 도착 시간이 안내되고 있다. 그런데 아씨시는 피렌체에서 무려 2시간 45분이 소요되는 게 확인되었다. 전 날, 티켓팅 하며 물었을 때엔 2시간 걸린다는 대답을 들었었다. 기차로 대략 왕복 여섯 시간에 아씨시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두오모까지 오가려면 차 시간이 딱딱 맞아도 이동시간이 7~8 시간은 족히 걸릴 터였다. 생각보다 너무 긴 시간이 걸리는지라 망설여졌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아씨시로 가는 노선 중간에 아레초라는 글씨가 보였다.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아레초로 가자. 티켓을 바꾸고 환불도 받고 기차를 탔다. 로베르또 베니니가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촬영지이며 매 월 첫 주 일요일마다 이태리에서 가장 큰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곳이다. 아쉽게도 그 날은 첫째 주 토요일이다. ‘그렇게 큰 벼룩시장이라면 오늘도 혹시 장사하는 사람이 몇몇 있을지도 몰라.’ 일종의 희망사항을 주문처럼 걸었다.




  Arioso


  아레초에 도착하여 두오모로 가는 버스를 물어보니 걸어가면 된다고 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 귀도가 살던 도시 아레초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봤던 낯익은 장소들이 오버랩되며 시선을 붙잡았다. 비 오는 날 귀도가 도라를 위해 카펫을 굴려 깔아주던 계단, 둘이서 비를 피하던 곳, 골목 어디선가 귀도와 조수아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다가 부딪힐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작은 마을이다. 


  맨 먼저 찾아간 곳은 아레초의 자랑거리인 산 프란체스코 성당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화 ‘참된 십자가의 전설’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프레스코 연작으로 꼽히는 이 그림은 어린 나무가 자라 십자가가 되고, 그것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찾아 가져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12장면 연작이다. 유명세 때문인지 티켓 값이 꽤 비쌌다. 게다가 관람객 수를 한 번에 25명으로 제한하므로 우리는 한 시간 후에 볼 수 있다고 한다. 공짜 화장실을 사용하고 공짜 무인 라커에 배낭을 보관한 후 밖으로 나와 길을 나섰다.

 

  언덕을 오르는데 곳곳에 노점상들이 천막을 치고 물건을 진열하는 게 보인다. 물건들의 상태와 종류를 볼 때 벼룩시장이 분명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물어보니 매월 첫 주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장이 선단다. 내 주문이 효험을 본 것인가? 아씨시에 가지 못한 아쉬움이 고마움으로 바뀐 듯 희색이 만연한 나를 보고 

  “잘 됐네, 벼룩시장 좋아하는 사람이…, 아직 일러서 시장이 열리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어. 한 바퀴 돌고 나서 구경하라고….”

  “호호, 좋아.”

마음에 풍선이 주렁주렁 매달린 듯 심장이 붕붕 떠가는 느낌이다. 

  아레초는 평지부터 시작해서 완만한 오르막길이 계속되며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피아차 그란데를 지나 도시의 맨 위까지 올라가 보니 오래된 성벽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아름다운 토스카나의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나는 왠지 토스카나(영어로 투스카니)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좋다. 책이든 영화든 토스카나라는 제목이 들어간 것은 무조건 본다. 아레초 길은 특이하다. 큰길은 별로 없고 길 하나에 가지 치듯이 골목이 많다. 골목들끼리 이리저리 얽혀 있어 제각기 특색이 있다. 여기 뭐가 있을까? 하는 설렘으로 골목을 다니는 게 즐겁다. 피아차 그란데는 영화에서 가장 빈번히 나오는 곳이며 아레초의 중심이 되는 광장이다. 보통 이탈리아의 도시들에는 중심을 이루는 광장이 하나씩 있는데,  아레초의 광장은 ‘그란데(Grande)’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작다. 아레초의 곳곳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온 장소 라기보다 그냥 아레초 그 자체였다. 

  ‘참된 십자가의 전설’을 대충 보고 나왔다.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아진 까닭이다. 거미줄 같은 골목과 광장엔 어느새 빼곡하게 장이 섰다. 공연이 끝나고 한꺼번에 빠져나온 관객들처럼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금세 나타났는지 곳곳에 사람들로 복잡하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여 둘러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싶은 맘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바뀌었다. 많아도 너무 많다. 물건도 사람도 골목도….



  벼룩시장이란 말마따나 벼라 별 게 다 있다. 없는 게 없다. 오래되고 큼직한 가구들과 빛바랜 액자에 끼워진 고풍스러운 그림들이 나의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는다. 맘에 드는 접시와 각종 장식품들도 많다. 그러나 그림의 떡이다. 가져갈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악어가죽으로 만든 핸드백이 눈에 띄었다. 보통의 악어가죽은 짙은 갈색이지만 그것은 자연스레 손때가 묻은 연 베이지 컬러이다. 게다가 크기도 제법 큰 것이 맘에 들었다. 큼지막한 진주 귀걸이에 은발이 우아한 할머니께서 아주 아름다운 백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얼마예요”

  “80유로”

12만 원이다. 저 정도 퀄리티라면 이태원 엔틱 샵에서 사오십 만원은 족히 부를 거라 짐작했다. 

  “싸게 해 주세요”

고개를 젓는다. 그건 너무 아름답고 고급인 크로커다일이라 결코 비싸지 않다는 대답을 했다. 미소와 함께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다가 발길을 돌렸다. 진품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개에 2천만 원쯤 한다는 켈리 백이며, 루이뷔통, 구찌 같은 것들도 간간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본 베이지 빛 가방에 마음이 간다. 다시 그곳엘 찾아갔다. 할머니 대신 뚱뚱한 할아버지가 앉아있다. 

  “얼마예요?”

영어로 물었는데 대답은 이태리어다.

나는 모른다. 이태리어의 1,2,3,4를.

펜을 내밀며 써달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쓴 숫자는 ‘50’

엥? 기회가 왔구나 싶어 나는 그 종이에 ‘40’을 쓰고 불쌍한 그러나 여우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꼬깃꼬깃한 비닐봉지를 찾아 이미 백을 넣고 있다. 

  ‘앗! 이거 너무 쉬운데, 더 깎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당장이라도 할머니가 등장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다. 얼른 값을 치르고 그 자리를 부리나케 떠났다. 그렇게 크로커다일 백은 할머니가 원하던 값의 반인 40유로(6만 원)로 내 손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오시면 할아버지는 분명히 혼날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덕을 내려오는 내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나는 모피를 싫어했다. 밍크나 폭스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볼 때마다 무슨 동물이 걸어 다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모피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듦이라는 게 그런 것인가 보다. 밍크 가격은 가볍게 천만 원을 훌쩍 넘는다. 경차 하나 값이다. 엄감생심 꿈꾸지 못할 일이다. 그런데 눈앞에 밍크 재킷과 코트가 주렁주렁 걸린 행거가 보인다. 몇 개 뒤적이다 맘에 드는 디자인이 있어 입어 봐도 되냐고 하니 당연히 “Sure"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데 이 오빠, 비주얼이 장난이 아니게 멋지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그의 옷차림이 2류 모델처럼 근사하다. 소위 옷 빨 받는 그런 총각이다. 사이즈는 잘 맞았다. 컬러도 그럭저럭 어울리는 축에 들었다.

  “얼마?”

  “600”

구십만 원, 벼룩시장이라는 걸 생각하면 비싸지만 새 상품 가격을 생각하면 헐값이다. 피렌체를 오가며 엔틱 숍에 걸려있는 밍크코트 가격이 1200유로였던 걸 보았던 터였다. 

  “깎아 주라”

  “이건 밍크야, 얼마나 좋은 건데”

  “나도 알아, 하지만 헌 거잖아, 400에 해줘”

  “안 돼…, 에라 좋다, 500에 줄게”

  “현금 줄게, 그러니 싸게 해줘도 되잖아”

  “난 크레딧 카드도 가능한데…, 현금이면 450에 줄게”

  “400 아니면 안 살래” 하며 떠나는 시늉을 했다.

  “오케이 알았어”

그렇게 50%를 디스카운트한 가격에 밍크 장만, 경축!!



  한 도시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가 피렌체 말고 또 있을까. 한 시절 유럽의 부흥을 주도했던 번영의 자취들은 도시의 상징이 된 두오모, 메디치 가문이 수 세기에 걸쳐 모아 온 위대한 유산 우피치 미술관으로, 산타크로체 교회나 피티 궁전 등 셀 수 없이 많은 역사적 유물로 남았다.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날, 산티시아 안눈치아타 광장을 거쳐 다시 두오모와 조토의 종탑을 지나고 시뇨리아 광장과 바르젤로 국립 박물관, 단테의 집까지 두루 돌아보았다. 모든 영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 피렌체, 유형의 유물보다 이 도시를 빛내는 건 이곳에서 재주를 펼치고, 기량을 겨루고, 명성을 얻었던 이들의 흔적이다. “이제야 겨우 예술에 입문했는데,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다니!”라고 임종 직전에 고백했다는 미켈란젤로, 그가 죽어서도 돌아오고 싶어 했던 도시가 피렌체였다. 로마 교황청이 나이 일흔의 갈릴레오를 재판을 위해 불렀을 때, 세상이 그를 버린 순간에도 기꺼이 마차를 내주고 보호했던 유일한 도시. 그래서 피사 출신의 갈릴레오는 이곳 산타 크로체 성당의 미켈란젤로 옆에 묻혀 있다. 피렌체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곳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쫓겨났던 단테는 교황에 대항했다는 죄목으로 두 번이나 사형선고를 받고 도시를 몰래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토록 그리던 이 도시로 돌아오지 못하고 라벤나에서 객사했다. 뒤늦게 잘못을 뉘우친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시신을 되찾아 오기 위해 아직도 라벤나 시민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비가 내리면 선글라스를 팔던 흑인들이 우산을 판다. 그러나 여행자도 우산은 챙기는 게 상식이다. 하나같이 비쩍 마르고 뻘쭘하게 큰 키 때문에 배가 고파 보이는 그들의 입성 또한 얇고 허술해서 추워 보였다. 누구 하나 우산을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에 몇 개를 팔 수 있을까? 어디서 자고 먹고 할까? 하나도 못 팔면 굶는 건 아닐까? 동포도 아닌데 왜 그리 그들에게 맘이 쓰이는지 모를 일이지만 우산을 내미는 그들의 검은 눈을 보며 내내 가슴이 아파 결국 하나 사고 말았다.

  ‘어쩌면 난 전생에 흑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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