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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an 02. 2017

삶의 코드, 나를 파괴할 권리  

쳇 베이커



바람 좋은 저녁, 나뭇잎들이 빗방울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가을이었다. 

카 오디오엔 슈베르트와 바흐, 차이코프스키와 말러, 그리고 그리스 계 미국인 크리스 스피어리스의 기타 음악과 조시 그로반 등 6장의 CD가 들어 있었다. 

밀크 티 같이 부드러운 음색인 조시 그로반의 노래 <My confession>이 끝남과 동시에 차는 빨간 신호등 앞에 정지했다. 

FM을 켜니 어떤 남자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노래였다. 

아니 처음 듣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은 처음 듣더라도 바흐인지 모차르트인지 말러인지 구분할 수 있다. 

시대별, 또는 작곡가 특유의 패턴이나 컬러가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많이 듣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러나 재즈의 경우는 다르다. 

많이 접해보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나 그 노래는 나도 모르게 그러나 너무도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미국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였다. 

그가 노래도 불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노래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쳇 베이커가 생각났다. 

고독한 읊조림과 안개 같은 남자의 음색이 그의 트럼펫 소리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비보라토 없이 가냘프게 뿜어내는 음색이 애상적이다 못해 몽환적으로 들렸다. 

마치 흘러가는 음에 입맞춤하듯 이지 리스닝의 완성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문적인 보컬리스트에 비해 탁월한 솜씨는 아니지만 풀어진 음색은 다분히 퇴폐적이었고 개성미가 있었다. 

아무튼 그 노래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나를 빨아들였다. 

노래가 끝나자 아나운서가 말했다.

‘쳇 베이커의 노래 <She was too good to me>를 들으셨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노래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She was too good to me


그의 트럼펫 연주 <My funny valentine>을 처음 들었던 것은 2000년 12월의 어느 밤이다. 

그 또한 운전 중 FM에서였다. 

세상을 삼켜버릴 듯한 안개와 희미한 트럼펫 소리가 화학 작용하듯 귓가에 적셔대던 촉감을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눈물을 흘렸었다. 

그의 음악은 처음부터 그렇게 아름다운 한 처럼 다가왔다. 

그의 연주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 

화려한 스킬이 아니지만 본능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의 초상」에서 “그의 음악에선 청춘의 냄새가 난다” 고 했다. 

글루미한 날에는 쳇 베이커의 음반이 제격이다. 

하지만 심약한 트럼펫 소리 그 이상의 쳇의 삶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My funny Valentine - Trumpet


우리나라가 올림픽 준비로 한참 분주했던 1988년 5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어느 공연장에선 쳇 베이커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작 시간이 다 되었어도 연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행색이 형편없이 초라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의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공연장 출입 관계자는 그를 무대 뒤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가 바로 쳇 베이커였던 것이다. 


13일의 금요일, 그러니까 1988년 5월 13일 금요일 로이터 통신이 전 세계에 타전한 비보가 있었다. 

새벽 3시 10분경,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 3층 방에서 미국의 유명한 트럼펫터 겸 싱어였던 쳇 베이커가 창밖으로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추락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목격자도 없었다. 

순찰하던 경찰이 트럼펫을 안고 추락한 사람을 발견했을 뿐이다. 

코카인과 헤로인을 합성한 주사제와 약간의 동전과 싸구려 라이터, 그 자신이 불던 트럼펫을 남아있을 뿐이었다. 

로스엔젤리스로 옮겨진 유해는 사진가 브루스 웨버가 장례식 경비를 댔고 두 번째 부인과 세 번째 부인, 그리고 급히 찾아온 몇 명의 친구가 전부였다. 

향년 59세, 하지만 그 무렵에 나온 그의 음반 재킷에 비친 쳇 베이커의 모습은 70을 훌쩍 넘긴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술과 마약, 여자들에 둘러싸여 방황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와 함께 했던 어떤 여성도 그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하지는 않았다. 

외롭고 초라한 죽음이었다. 



2009년 6월 25일, 미국의 댄스가수 마이클 잭슨이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향년 50세). 

사인은 잭슨의 불면증 치료를 담당하고 있던 개인 의사가 마취제인 프로포폴(일명 우유 주사)을 과다 투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망 당시 잭슨은 수년간의 공백을 깨고 컴백 라이브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3주 후면 런던의 아레나를 시작으로 50회 공연에 돌입할 예정이었고 입장권은 매진된 상태였다. 

잭슨의 사망 뉴스는 사망 판정이 내려진 지 18분 만에 가십 웹사이트인 TMZ.com에 보도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1963년 존 F. 케네디와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 사망 때와 맞먹는 애도 물결이 일어났다. 

장례식은 7월 7일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이후 수많은 스타들이 한 자리에서 그를 추모하는 공식 행사가 열려 전 세계적으로 12억 명이 넘는 인구가 시청하였다.   

  

유작이 된 콘섵 앨범 This is it


2012년 2월 11일, 미국 '팝의 여왕' 휘트니 휴스턴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 비벌리 힐스의 비벌리 힐튼 호텔방 욕조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48세). 

몇 분 내로 911 응급 구조팀이 호텔에 도착, 휴스턴에게 심폐소생술을 행하는 등 약 30분간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그녀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휴스턴은 이날 오후 3시 55분 공식적으로 사망진단을 받았다. 

제54회 그래미상 시상식을 꼭 하루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이날 밤에는 미국의 유명 음반 프로듀서 클리브 데이비스가 비벌리 힐튼 호텔에서 저녁 만찬을 베풀기로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미 음악계의 수많은 스타가 해당 호텔로 집결했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팝 음악상인 그래미상을 과거에 6차례나 수상했던 휴스턴은 이날 저녁 만찬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고 TMZ는 보도했다. 

팝의 여왕 휘트니 휴스턴은 약물 중독에 빠진 이후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녀는 끝내 ‘팝의 전설’로 남게 됐다.     


I have nothing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고 불리며 팬들에게는 영원한 청춘의 심벌로 각인되어 왔던 쳇 베이커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히어로로써 혜성같이 나타나서 재즈 팬들을 매료시켰던 트럼펫터이자 보컬리스트였다. 

석연찮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가 음악적 컨셉션에 강하게 용해되었다.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다. 

어차피 한번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인데 별다른 감정 없이 시절이 다 해서 저 세상으로 갔다면 간단한 논조로 끝나겠지만, 쳇 베이커의 사망에 대해서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았다. 

물론 매년 많은 유명 뮤지션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지만, 쳇 베이커의 사망은 그때 당시 이루 말로 형연할 수 없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쿨 재즈의 상징 쳇 베이커는 비현실 속에서 살다 간 사람이다. 

여린 감수성은 삶이 고통이고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는 단순한 명제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상향을 좇던 그의 마음은 언제나 무책임하게 꿈의 여인을 찾아 헤매었다. 

자신의 안으로 끝없이 침잠해가는 달콤한 쾌락은 특히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치명적인 유혹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허무와 퇴폐의 미학이다. 

그는 그 안에서 타락해갔다. 

약물에 찌들고, 친구의 여자를 빼앗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거짓말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마치 미학 인양 현화시키고 관철시킨 인물이다. 

여느 범인과 달리 쳇 베이커가 치기 어린 삶의 태도를 끝까지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능력이 준 자부심과 절대적인 고독 속에 외줄 타기 곡예를 하듯 살았기 때문이다. 

강렬하면서도 사색적인 질감, 야윈 모습으로 눈을 감은 채 바람에 흩날리는 헝클어진 머릿결로 나른하게 흩어지는 연주는 그의 삶 자체가 재즈였음을 말해준다. 

현실과 꿈의 접경에 머물러 있는 담배 연기 같은 흐릿함과 백치미 속에 담긴 영롱함, 거기에 쳇 베이커가 있었다.     



쳇 베이커, 본명 체스니 헨리 베이커(Chesney Henry Baker 1929-1988)는 1929년 오클라호마 주 예일에서 태어났다. 

베이커의 아버지는 전문 기타 연주자였다. 

쳇에게 트롬본을 선물했으나 어린 아들에겐 악기의 밸브가 너무 길었으므로 트럼펫으로 바꾸게 되었다. 

1952년 찰리 파커의 오디션에 발탁된 그는 본격적인 프로 뮤지션으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당시 할리우드 헤이그에서 연주하던 제리 멀리건의 피아노 없는 4중 주단에 들어가서 취입한 레코딩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50년대에 서부를 배경으로 일기 시작한 <쿨 재즈>라는 시류와 맞물려 그의 감성은 대단히 개성적인 스타일로 받아들여졌고 특히 여성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1950년대 초반 쳇 베이커 4중주를 결성하여 유럽 순회공연을 했다. 

그때 특별한 기교나 실험성을 배제한 <My Funny Valentine>을 발표하여 최전성기를 누렸고 이 노래는 쳇 베이커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1955년에는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 제의가 들어와 <Hell's Horizon>이라는 영화에 배우로도 데뷔를 하게 되지만 그 이후의 출연 제의는 거절하고 유럽 투어를 떠나게 된다. 

유럽 투어를 계속하면서 바비 티몬스와 함께 Bop재즈 앨범을 내기도 하고 이탈리아에 잠깐 거주하면서 이탈리아 영화에도 배우로 출연을 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그의 상품성에 계속 미련을 가지고 그의 일생을 영화화하기도 한다. 

위와 같이 쳇 베이커의 50년대는 소위 잘 나가는 시절이기도 했지만 마약에 손댄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1960년대에는 마약으로 인해 급격한 추락이 시작된다. 



1960년, 이탈리아에 체류 중이던 그는 마약 복용 혐의로 체포되어 1년 반 동안 복역을 했다. 

출옥을 하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듯 출옥 기념으로 <Chet is Back!>이라는 앨범을 발매한다. 

이 앨범 이후에도 마약으로 인한 말썽은 줄을 잇는데 독일에서 체류 중이던 1962년 말 다시 마약 복용으로 프랑스로 추방당했다.

프랑스에 1년 여 간 살면서 영국, 스페인 등에서 활동을 하지만 또다시 마약 복용 혐의로 미국으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5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본의 아닌 귀국을 한 그는 뉴욕과 L.A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1966년 쳇 베이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4명의 남자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게 되어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손상되는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역시나 마약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트럼펫 연주자는 치아와 입술이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입술의 모양으로 소리를 내고 음높이를 조절하는 트럼페터에게 입술 부상은 치명적인 타격인 것이다. 

틀니를 끼고 60년대 말에 다시 음반을 발매하지만 그의 추락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트럼펫 연주를 전혀 하지 않던 그는 마약 치료 노력과 함께 1973년부터 뉴욕의 클럽 <씬>에 다시 등장한다. 

그의 재기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1970년 중반에 유럽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유럽에서 살았다. 

1987년에 사진작가인 Bruce Webber는 그의 일생을 다큐멘터리 영화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되기 전인 1988년 5월 유럽 투어 중이던 그는 암스테르담 공연이 끝난 날 밤, 호텔에서 마약을 복용한 후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생애를 주제로 만든 다큐멘터리 <Let's get Lost>는 1988년 9월에 개봉되어 그해 아카데미 상 후보까지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기자 : “어떻게 마약에 손을 대게 됐나요?” 

쳇 : “내가 재즈계에 있던 1950년대엔 마약 복용이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어요. 선배들 대부분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과 같은 감각으로 마약도 가지고 다녔어요.” 

기자 : “계기는?” 

쳇 : “잊어버렸어요. 내가 좋아했던 피아니스트 딕 트와르직과 유럽 투어에 나가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된 건 확실해요. 유럽은 뉴욕보다 질이 좋은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기자 : “ 50년대에는 마일스를 능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재즈계의 아이돌이라고 불렸다죠?” 

쳇 : “난 그런 자각이 없었어요. 그때 이후로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에도 지금도 같은 기분으로 담담하게 음악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에요. 그런 내 음악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쁘고… 어떤 세계든 찬반양론이 있어요.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요?” 

기자 : “지금까지 여러 가지 변화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쳇 : “여러 가지 있었죠. 가정도 없어졌고 이도 없어졌고…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후략)> 그의 인터뷰에서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씨 봉방」을 떠올리게 된다. 

이보다 더 쓸쓸할 수 없다.      

그는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야말로 그의 연주는 번뜩이는 속도로 미끄러져갔다. 

그는 악보를 볼 줄 몰랐다. 

한 번 들으면 연주할 수 있는데 독보법을 굳이 배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C 코드조차 몰랐다. 

그저 본능에 따라 귀에 들리는 것에 따라 연주할 뿐이었다.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모든 곡의 핵심을 꿰뚫을 만큼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뮤지션이었기 때문이다. 

쳇 베이커는 스윙감을 잘 살렸으며, 어느 누구보다도 편안하고 부드러운 음질을 선보였다. 

또한 긴 프레이징의 대가답게 즉흥연주로 항상 새로운 멜로디를 선보였다. 

쳇 베이커의 음악은 항상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슬픔을 담고 있다. 

트럼펫뿐 아니라 보컬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쳇 베이커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평생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독과 방황의 늪에서 지냈던 그의 삶이다. 

그는 마약을 살 돈을 벌기 위해 연주를 했다. 

하지만 이미 연주를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생계가 막막하게 되었을 때 그의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몸을 팔았다. 

그렇게 벌어온 돈까지 식구 몰래 갖고 나가 마약을 찾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잔혹했지만 소름 끼칠 만큼 진한 감동을 안겨준 음악을 남겼다. 

오히려 그의 음악은 살아 있을 때보다 세상을 떠난 이후에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인생처럼 그의 음악은 삶의 고독과 슬픔 또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쳇 베이커는 조각 같은 외모와 반항아의 이미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원한 청춘의 대명사’ 제임스 딘(23세 때 교통사고로 사망한 배우)을 닮았다. 

제임스 딘의 잘생긴 외모와 존재의 카리스마적인 면모, 그리고 짧은 생애를 살았던 것이 그렇다. 

밝고 경쾌한 노래를 할 것 같은 외모와 달리 그의 노래와 연주는 슬프고 어둡다. 

쳇 베이커의 음악은 삶 자체다. 

노래에 자신의 인생을 담고 구슬프게 트럼펫을 연주한다. 

그의 연주와 노래는 다른 재즈 뮤지션에게서 찾기 힘든 특별한 감성이 있으며 인간적인 슬픔과 아픔, 그리움이 함께 묻어난다. 

전 세계 순회공연을 하면서 잘생긴 외모와 우수에 찬 목소리, 감성적인 트럼펫 연주로 수많은 여인의 연인으로 추앙받게 된다. 

천재적인 음악의 감각을 타고 태어났지만 그는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빛이 스러진 눈빛 속에서도 그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주변의 여인들은 더 강한 집착으로 그의 곁에 머물고 싶어 했다. 

어느새 그는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사랑한 건 음악과 마약뿐이었다. 

여인들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를 사랑했다. 

마약에 깊이 빠져 정상적인 생활과 사고가 불가능했다. 마약으로 그의 삶은 황폐해졌으며, 팽팽하고 준수했던 그의 얼굴은 급속하게 늙고 쭈글쭈글해졌다. 

그렇게 그는 제멋대로 살다가 죽었다.

쳇 베이커의 음악에는 그가 아니고는 전달할 수 없는 가슴의 상처와 내면의 풍경이 있다.  

자연스럽게 공기처럼 빨아들이고 밖으로 내뿜는 호흡 속에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 거의 없다. 

자신이 매우 특별한 존재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 특별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여름의 아름다운 저녁노을처럼, 소리 없이 어둠에 삼켜져 버리고 말았다. 

마약 남용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추락이 변제기간을 넘긴 빚처럼 그를 덮쳤다. 

술과 마약, 여자와 자동차 그리고 정처 없는 여행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그가 토해내는 노래와 연주는 그의 인생만큼 독특하고 인상적이어서 듣는 이를 대번에 매료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보컬과 연주에는 그러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정적이고 부드럽지만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하고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 수 없을 어두운 적막이 대지 위를 뒤덮는 듯 조용히 엄습해온다. 

화려하지 않지만 직설적이고 차분한 음색에서 흥분에 벌겋게 달아오른 몸뚱이를 조용히 감싸주는 손길이 느껴진다. 

그의 음악이 삶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일까? 아니면 그것이 애처롭게 보여서일까? 

삶이란 때때로 그렇듯 순탄치 못한 것이다.    

   


『시동을 걸자 쳇 베이커의 거친 저음이 깔려 나온다. “이 사람 알아요?” 그녀는 아주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땅 속에서 내 몸을 잡아끄는 것 같네요. 깊이깊이 꺼져버릴 것 같아요.” “쳇 베이커라는 재즈 뮤지션이죠.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았지요. 이름을 날린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재즈사에 남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죠.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트럼펫 연주가 탁월했던 사람도 못 됐죠.” (김영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중)』    

 

한 젊은 예술가가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이라는 제목의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젊은이는 피아노를 치다 말고 객석으로 내려오더니 앞자리에 앉아 있던 존 케이지(John Cage, 1912~ 1992 세계적인 미국의 전위 작곡가)에게 다가갔다. 

젊은 예술가는 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내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무대를 나가버렸다. 

영문을 모르는 관객들은 어리둥절했다. 

근처 술집으로 간 예술가는 공연장으로 전화를 걸어 “저 백남준입니다. 

공연은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백남준에게 넥타이를 잘린 존 케이지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스승이었다. 

그는 스승의 넥타이를 자름으로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존의 권위와 규칙을 깨는 행위예술을 한 것이다. 

기존의 틀을 깨뜨리고 틈으로서의 새로움을 창조하며 평생을 살았던 예술가 백남준. 

훗날 그의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들은 가위로 서로의 넥타이를 댕강댕강 잘랐다. 

그 퍼포먼스를 통해 숱한 권위와 규칙을 버렸던 그의 사상을 기념한 것이다. 변화하는 게임의 규칙을 파악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은 자신이 게임의 틀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다. 


John Cage
백남준


규칙이란 어떤 틀이다. 

규칙, 즉 틀보다 틈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백남준은 틀을 깨버린 사람이다. 

쳇 베이커는 틀보다 틈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아니 그는 틀을 아예 무시하고 살았다. 

그것은 곧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상에 당연한 규칙은 없다. 

그래서 살맛 나는 것이고 그래서 살기 힘든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틀 없이 틈만 가지고도 살 수 없다. 

틀과 틈, 그 사이를 넘나드는 일이 쉽지 않다. 


삶의 코드를 자신의 인생을 파괴할 권리로 두고 살았던 쳇 베이커의 틈, 그 사이에서 그의 노래를 듣는다. 

<She was too good to me> 

혈관의 피가 가느다란 튜브를 통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저마다 갖고 있는 기준이 다른 ‘틀과 틈’,

어둑신한 카페에서 라임과 테킬라 더블 스트레이트 샷 잔을 즐기며 틈을 즐기고 싶은 날이다.

쳇 베이커가 공기를 가르며 날고 있어야 제 맛일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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