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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an 02. 2017

코발트빛 고독의 경계에 서있던 피아니스트

- Glenn Gould



“기내식도 안 줘요, 항공 마일리지 그것도 안 줘요.” 

첼로용 비행기 좌석 티켓을 따로 구입하여 다니는 장한나는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첼로 장’에게 마일리지를 주지 않는 억울함을 이야기했다.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갖고 있는 현악기들은 적어도 200살이 넘은 고악기로 수 십억을 호가한다. 악기를 좌석에 앉히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사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화물칸에 실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니까 말이다. 


그런 반면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연주자들이 있다. 피아니스트들이다. 대부분의 큰 공연장에는 연주용 풀 사이즈 피아노, 스타인웨이 앤 손(Steinway & Sons)이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전용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니며 해외 공연을 다닌 연주자도 간혹 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5)가 그 첫 번째 피아니스트였다. 호로비츠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전용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닌 건 물론이며 연주회 시간은 언제나 일요일 오후 4시였고 그가 가는 곳엔 항상 전속 요리사를 대동했다. 정수기까지 갖고 다닐 뿐 아니라 단 며칠간 머무를 호텔방도 그가 원하는 식으로 완벽하게 리모델링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까다로운 그 모든 조건들은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는 순간 모든 게 용서되고 이해된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호로비츠의 피아노


예술가 중엔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정신세계로 인해 기이한 행동을 하는 이들이 많다. 하기야 그런 특이한 자아가 있어야 예술적 영감이 솟아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소 더위를 느끼게 하는 뉴욕의 6월, 베레모와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 장갑까지 낀 남자가 레코딩을 하기 위해 녹음실에 나타났다.(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평생 외투와 장갑, 머플러로 몸을 감싸고 다녔음) 그는 뉴욕의 물은 믿을 수 없다며 본인이 챙겨 온 식수 두병과 각기 다른 색깔로 구분된 5개의 약병, 그리고 한 무더기의 타월을 들고 왔다. 



게다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의자도 빠질 수 없었다. 남자의 아버지가 직접 만들었다는 그 의자는 흡사 초등학교 교실에서 볼 수 있는 작은 모양새로 낮았고 바닥에 닿는 부분은 고무로 되어 있다. 그는 이 의자에 앉아 누에고치처럼 상체를 둥글게 구부려 그만의 독특한 연주 자세를 만들어 낸다. 그는 마치 건반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전후좌우로 비트는 연주 습관을 갖고 있다. 콘서트를 할 때면 무슨 의식을 치르듯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조율시켰다. 그리고 관절들이 충분히 유연해지면 무대에 오르곤 했다. 남자는 그날도 예외 없이 뜨거운 물에 손을 20분간 담근 후 준비해온 수건으로 닦았다. 그의 연주를 녹음하던 음향 엔지니어는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행하는 기이한 준비 작업에 놀라고, 몸을 비틀며 연주를 시작했을 때 흘러나오는 음악에 두 번째 놀라고, 손가락으로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취에 빠져 입으로도 쉴 새 없이 허밍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세 번째 놀랐다. 음반을 녹음할 때 엔지니어들은 어떻게 하면 음악 이외의 잡음을 제거할 수 있을까 고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예 스스로 중얼중얼 허밍을 하며 피아노를 친다. 엔지니어에게는 최악의 연주자일 수밖에 없다. 간혹 그의 음반을 처음 듣는 사람은 무슨 잡음처럼 괴상한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그 음반이 불량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음반에는 크든 작든 이런 허밍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가까이에서 연주를 듣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오히려 허밍이 들리지 않으면 뭔가 허전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의 피아노는 우리가 보통 듣는 피아노 소리와 상당히 다르게 들린다. 그것은 가벼운 터치를 위해 기울인 피나는 노력과 녹음된 연주를 들으며 기술로 가능한 음향의 가감 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50년의 생애를 살면서 온갖 기행으로 점철된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32세(1964년)에 돌연 모든 연주 일정을 취소했다. 그 후 단 한 차례도 공개된 장소에서는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다. 그의 연주와 생애에 대해 알아갈수록 어쩐지 그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떠난 지 25주년, 탄생 75주년이 되던 2007년, 80장짜리 CD가 5천 조 한정 발매되었다. 이 사람을 기념하기 위한 프로젝트 음반이다. 전집을 선호하는 취향이 아니지만 그것만은 놓칠 수 없었다. 

 

이 기이한 피아니스트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출생한 글렌 굴드(Glenn Gould, 1932~1982)이다. 그의 아버지는 모피 제조공으로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어머니도 한때 직업 연주자를 꿈꾸었을 만큼 피아노 실력을 지닌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굴드는  세 살 때 어머니에게 첫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이후 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어린 굴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재능 있는 음악가들의 공통적인 현상 중 하나가 절대음감이다. 글렌 굴드 역시 절대 음감을 갖고 있었다. 다섯 살 때 단순한 곡들을 연주했고 즉흥적으로 곡을 만드는 등 뛰어난 천재성을 보였다. 굴드는 열두 살에 키와니스 페스티벌의 피아노 트로피 경연대회에서 일등 했다. 이듬해 굴드는 토론토 왕립 음악학교에 직업 피아니스트와 동등한 자격으로 합격한다. 그는 단순히 연주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었던지 열네 살에는 음악 이론 시험에서도 일등을 했다. 어린 굴드의 우상은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이었다. 굴드는 슈나벨의 연주를 듣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할 만한 말을 했다. 



“슈나벨은 실제로 악기로서의 피아노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피아노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수단이었는데, 그 목표는 베토벤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글렌 굴드는 그 목표를 아마도 바흐로 삼은 것 같다. 그리고 음향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만들어 낸 것이다. 1955년 1월 11일 저녁. 글렌 굴드는 뉴욕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연주회 바로 다음 날 CBS는 글렌 굴드와 녹음 계약을 맺었고,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 6월 CBS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굴드의 악명 높은 기행은 이때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1955년 녹음, 골드베르크 변주곡


굴드 역시 호로비츠처럼 늘 자신의 스타인웨이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다. 굴드의 거대  한 콘서트용 피아노는 배와 자동차, 비행기에 실려 세계의 수많은 공연장을 누볐다. 굴드의 연주여행에는 이 스타인웨이 외에도 별도로 고용된 당대 최고의 조율사가 따라다니곤    했다. 굴드는 늘 자신의 스타인웨이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콘서트 전날 밤이 되면, 피아노의 물리적인 속성을 빠짐없이 알고 있던 굴드와 그의 조율사는 스타인웨이를 완전히 분해했다가 조립하곤 했다. 음의 높낮이를 조율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연주 방식과 연주할 작품에 맞추어 피아노의 기계적인 성격들마저 새롭게 짜깁기해버리곤 한 것이다. 무슨 리볼버 권총도 아니고 2m 75cm의 길이와 480Kg의 중량, 88개 건반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피아노를 그때그때 분해와 조립을 반복했다니 과연 괴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광적인 팬들은 그의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벌써 그의 연주를 기다리곤 했다.      


굴드는 에어컨이 켜진 식당에는 절대 가려하지 않았고, 사람이 많은 곳은 물론 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일종의 대인기피증이 있던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전화를 이용해야만 했는데 통화 중에 상대방이 기침이라도 하게 된다면 감기 옮는다며 갑자기 전화를 끊어 버리기도 했다. 그의 노이로제 증세는 매우 심각해서 언제나 이스라엘 항공사의 비행기만을 이용했다. 그 까닭은 그 항공사의 비행기 수가 적으니 그만큼 정비에 시간을 더 들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나중엔 그나마 비행기를 타지도 않았다. 그의 대인기피증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상대가 손을 내밀면 올해는 악수 안 하는 해라며 거절하기도 했다.  굴드의 피아노 터치는 매우 가볍기로 유명하다. 왜냐하면 굴드 자신이 바흐 시대 악기의 특징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작고 변화 없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중시했던 것이다. 


굴드는 자신에게 맞는 피아노를 찾기 위해 매우 오랫동안 고심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스타인웨이 CD318> 제작 번호 174번이다.(스타인웨이는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므로 이름처럼 시리얼 넘버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174번은 1958년 클리블랜드 연주회 직후 피아노를 운송하던 트럭의 부주의로 크게 부서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의 상심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든 174번을 살려내기 위해 드린 그의 노력은 주변 사람들이 감동할 정도였다. 그러나 174번은 살아나지 않았다. 1960년 초 굴드는 자신의 새로운 피아노 건반을 좀 더 가볍게 하기 위해 스타인웨이 사의 전속 조율사 윌리엄 후퍼를 불렀다. 후퍼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애용하는 호로비츠와 굴드를 위해 스타인웨이 측에서 특별히 채용하고 있는 최고 실력을 가진 조율사였다. 굴드의 집에 온 후퍼가 굴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근함과 다정함의 표시로 그의 등을 가볍게 한번 툭 쳤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소련의 여류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와 만났을 때도 장갑을 낀 채 악수를 했던 굴드였다. 그런 그의 등을 친 것은 경천동지 할 일이었다. 그는 즉시 왼팔과 등의 통증과 왼손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며 스타인웨이 회사에 3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자신의 몸을 누군가 만지면 비스킷처럼 부서질 듯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굴드의 노이로제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대인 기피증, 무대 공포증, 군중 혐오증에 건강 염려증 까지 있던 굴드는 ‘감기에 걸렸다’ 혹은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등의 핑계로, 아니 핑계될 것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예정된 연주회를 취소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었다. 결국 이런 글렌 굴드는 평생 진정제, 소염제, 수면제를 끼고 살았다. 그러나 진짜 통증이 찾아왔을 때는 의사가 그것을 가볍게 여겨 결국 죽음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마치 ‘늑대가 나타났어요’를 외치던 양치기 소년과 다를 바가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날 클래식 연주자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타성을 발휘하길 원하는 청중들에 게 둘러싸여 있다. 사실 고전 음악의 전성기 때조차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받은 대접이 그렇게 훌륭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이든은 40여 년 동안 에스테르하지 후작 집에서 음악 하인으로 봉직했으며 모차르트는 자신의 몸 하나 누일 관하나 조차 허용되지 않은 채 공동묘지에 버려졌고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로서 비밀스레 평생 불안 속에 살다가 스스로 비소를 마시고 죽어가야만 했다. 그러면 현대의 연주자들은 어떤가? 예술가라기보다 메이저 음반사에 묶인 상품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현대의 대중들은 심연을 울리는 전 악장의 음악을 듣기보다는 쉽게 짜깁기된 컴필레이션 음반들을 더 선호한다. 그러므로 불황을 겪는 음반사들은 음악성보다는 비주얼 좋은 연주자들을 통해 매출을 극대화하려 드는 게 현실이다. 대개 클래식 연주가들은 레코딩보다는 실황 연주를 진정성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음악이라는 시간적 예술이 갖는 1회 적 재현에 대해 아우라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의 음악가들은 실황과 스튜디오를 병행하면서 부와 명성을 쌓고 있는 게 보통이다. 



글렌 굴드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음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음악은 내 안에 있고, 나는 음악 안에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부에서 외부로, 내면이 된 외부로 나아감이다. 에워싸고 조여 온다. 그러면서 귀로 올라오는 기쁨, 혹은 첨예한 고통으로서 아주 작은 부분이 되어 내부에 머문다. 굴드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제외하고는 같은 곡을 두 번 이상 레코딩하지 않았다. 굴드는 그런 식으로 연주를 하는 자신의 개성을 깊이 존중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연주를 표현해주는 스타인웨이의 개성 또한 존중했다. 나아가 두 개의 중첩된 개성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개성까지도 존중했다. 그리고 굴드는, 자신 역시 한 명의 청중이 되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연주를 사랑했다. 그에게 있어 연주는 자신의 삶 자체였고, 그 소리를 만드는 과정은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적어도 굴드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방식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했다. 말하자면 그의 예술은 그의 삶에 불과했다. 


1964년 4월 10일 LA 공연을 마지막으로 굴드는 콘서트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끝냈다. 전설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프랑코 총통이 스페인을 지배하는 동안엔 절대로 연주를 다시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 했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도 곧잘 콘서트 활동을 중단했지만 굴드는 그들과 달랐다. 왜냐하면 굴드는 그 후 공연장에서의 연주회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굴드는 콘서트 현장에서도 최고의 각광을 받는 피아니스트였다. 


1957년에 글렌 굴드는 냉전이 한창이던 소련에서 2주간의 연주회를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 순회 연주를 시작했다. 유럽 순회 기간 동안 <베토벤 3번 피아노 협주곡>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했으며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음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빨리 깨우친 카라얀이 녹음 과정 자체를 하나의 연주로 승화시킨 굴드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콘서트를 할 때면 자신이 마치 싸구려 배우처럼 초라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에 굴드는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어쩌면 굴드는 자신의 직업을 피아니스트라고 생각지 않았을지 모른다. 혹자는 글렌 굴드를 단순히 피아니스트라기보다 일종의 전위예술가로 구분해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글렌 굴드는 예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피아노만을 고집한 사람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 동안 콘서트 연주자로 활동한 기간은 9년 남짓한 시간에 불과했다.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에는 분명 다른 연주자와 다른, 단순히 파격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굴드는 녹음 기술을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채택했고, 자신의 연주 중 가장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에 대해 당시 다른 연주자들이 느끼는 거북한 기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에게 있어 피아노는 목적을 향해가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전엔 여자가 없었다. 그리고 평생 편식했다. 고기는 물론 야채도 즐겨먹지 않았다. 성인이 된 뒤에는 하루 한 번, 그것도 새벽 4시에서 7시 사이에 크래커와 오렌지 주스 같은 것들로 연명했다고 한다. 기행으로 일관한 그답게 좋아하는 작곡가와 곡들도 명확하게 구분된다. 단적인 예로 피아니스트라면 거쳐 가지 않을 수 없는 쇼팽과 슈베르트를 연주하지 않았고, 심지어 브람스는 녹음 직전에 겨우 연습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35세로 사망한 모차르트가 너무 오래 살았다는 독설을 퍼부었고 베토벤 역시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작곡가는 오로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였다. 굴드가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깨고, 두 번 녹음한 곡은 <골드베르크 변주곡>뿐이다. 다시 녹음한 이유는 1955년과 1981년 사이의 기술적 발전에 따른 도전이자 세월을 거치며 다시 마음속에 담게 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1981년 녹음, 골드베르크 변주곡


글렌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카네기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협연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최종 리허설까지 이 곡의 템포를 놓고 서로의 음악적 해석과 견해가 달라서 대립하고 있었다. 결국 번스타인이 굴드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엄청나게 느린 그의 템포에 오케스트라를 맞추기로 했다. 포디움에서 떨어진 적이 있을 만큼 힘차고 다이내믹한 지휘와 템포를 가진 번스타인이 굴드의 느려 터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을 지휘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어떤 상황이었을지 짐작될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번스타인은 그 순간 청중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방금 연주한 곡의 템포는 제가 원하는 템포가 아니라 굴드가 고집한 템포입니다, 너무 느리다고 느끼셨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번스타인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자신이 의지대로 연주한 굴드는 어리둥절해하는 청중들을 뒤로하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 버렸다.      


레너드 번스타인과 굴드


굴드와 상반되는 생각을 가진 지휘자로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1912년 ~ 1996년)가 있다. 그는 굴드와는 정 반대로 극단적인 레코딩 혐오가였다. 그러니 첼리비다케 역시 레코드형 인간 글렌 굴드만큼이나 희귀한 연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공연장 연주만이 진정한 음악을 전달할 수 있는 과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녹음을 대단히 꺼려했다. 실황 녹음은 아니지만 예외적으로  스튜디오 녹음이 몇 개 있긴 하다. 첼리비다케는 “음악이란 말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체험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첼리비다케의 연주를 들어보면 곡에 대한 철저한 구조 분석에 의한 구성의 통일이 엿보이며,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때로는 극단적인 템포와 음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녹음을 기피한 첼리비다케와 음반만을 추구한 글렌 굴드, 방법은 다르지만 그들의 음악에 대한 이상은 뫼비우스의 떼처럼 어디선가 만나지 않을까 생각된다.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Sergiu Celibidache, 1912년 ~ 1996년)


콘서트가"고통일 뿐인 속임수"라고 여겼다.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만 있다면, 2백 군데를 연결해서 하나의 곡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계적인 수단으로 만들어진 연주를 속임수라고 이야기하는 사고방식에 짜증이 납니다. 환상이나 조작을 최대한 이용해서 이상적인 연주를 만들어냈다면, 그 일을 멋지게 해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굴드는 팬들을 위해서도, 무대 앞의 관객을 위해서도 음악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음악은 그를 통해 재현되어야 하는 신의 형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의 고요가 필요했던 것이다. 청중의 피드백이라던가, 흥분과 광기 같은 것은 음악을 만드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과 만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중이 존재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서 연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음악이란 개인적 형태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악이 집단요법으로서, 또 그것과는 다른 어떤 공동체험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과 연주자까지도 명상 상태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위에 앉은 2천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이런 상상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글렌 굴드의 여권 - 그의 직업란에 콘서트 피아니스트라고 기재되어 있다.


굴드는 레코딩을 앞둔 48시간 동안은 피아노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또 피아노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좋은 음악을 하게 된다고까지 말했다.      

글렌 굴드는 피아니스트이면서 피아노적인 음악을 싫어했다. 여기서 피아노적인 음악이란 것은 낭만주의 음악을 주로 말하는데 화성적인 음악을 의미한다. 굴드 스스로 자신을 ‘대위법적 음악가’라고 칭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그가 피아노를 위한 작곡가라고 할 만한 쇼팽, 슈만, 리스트를 싫어했던 것은 논리적 귀결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들 음악에 별다른 매력을 못 느끼고 설령 녹음을 했더라도 통념을 벗어나는 해석을 보여주었다. 쇼팽을 연주하지 않는 피아니스트는 없다. 그러나 굴드의 쇼팽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굴드는 두 번 은퇴했다. 첫 번째는 콘서트 무대에서의 은퇴, 두 번째는 죽음으로써의 영원한 은퇴였다. 그러므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데뷔 레코딩인 동시에 마지막 녹음곡이 되었다. 골드베르크를 두 번째 녹음했던 그 이듬해인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의 아파트에서 50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숨졌기 때문이다. 피아노 건반에 코를 박듯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좀머씨처럼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하며 호수로 걸어 들어가듯, 쌩떽쥐베리의 야간비행처럼 지성과 순수라는 날개를 달고 차가운 겨울 하늘을 나는 조종사와 같이 홀연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글렌 굴드는 그렇게 경계선에 서있는 인간이었다. 아무도 선뜻 가보지 않았던 코발트 빛 고독 속에서 선을 고집했던 글렌 굴드. 그는 내면의 무언가를 끝내 세상에 내놓지 않고 죽음 속으로 가져가 버린 어린 왕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늘 혼자서 보냈다. 

그건 내가 비사교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술가가 창조자로서 작업하기 위해 머리를 쓰기 바란다면 자아 규제 , 바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절단시키는 한 방식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The art of Fugue - J.S 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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