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클린 뒤 프레, 엘가 첼로 협주곡
전화벨이 울렸다.
방안엔 그녀 혼자였다.
전화기가 놓여있는 테이블까지의 거리가 그녀에겐 사막처럼 까마득히 느껴졌다.
“그 사람일 거야.”
그녀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의 목소리를 향해 안간힘을 다해 휠체어 바퀴를 굴려 나아갔다.
벨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악몽을 꾸면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고통처럼 다급했지만 그 순간 그녀에게 쉬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힘겹고 느릿했다.
이제 수화기를 집어 드는 게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여 수화기를 바닥에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1급 지체 장애자가 몸을 뒤틀 듯 간신히 두 손목 사이에 수화기를 끼웠다.
그리고 목과 어깨에 가까스로 걸쳐 놓을 수 있었다.
“요즘 너무 바빠, 내일도 못 가겠어”
남편이었다.
몇 달 만에 걸려온 수화기 저편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낯설게 들려왔다.
간신히 떠듬거리며 “애--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
라고 말하는 사이 수화기가 손목 사이에서 스르르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통화가 끊어졌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뚜~ 하고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다이얼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이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허망했다.
아니 가슴이 터져나갈 듯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울고 싶었다.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안면신경의 손상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것이다.
코르크 마개를 막 따낸 샴페인처럼 싱그럽고 톡 쏘는 웃음 코드로 쾌활하게 잘 웃는 성격이었기에 smily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녀의 전신이 돌멩이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기도까지 마비될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영국 중산층 가정의 어느 거실, BBC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선율을 듣던 세 살 난 딸이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도 저 소리를 내고 싶어요.”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둔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1945-1987)의 첼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섯 살이 되던 생일날 처음으로 3/4 사이즈의 첼로를 품은 재클린은 그 자리에서 악기의 D선을 활로 그었다. 제대로 된 소리였다.
당시 어린이용 첼로 교재가 마땅치 않았기에 어머니는 직접 그림을 그려가며 딸을 위한 악보를 만들었다.
매일 아침 재클린은 눈을 뜨자마자 간밤에 어머니가 그려놓았을 악보를 찾아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곤 했다.
어머니는 다른 두 자녀들보다 재클린을 애지중지 보살폈다.
6세에 런던 첼로 스쿨에 다녔고 언니 힐러리는 플루트를 배웠다.
자매는 마치 쌍둥이처럼 모든 것을 함께 했다.
하지만 재클린은 언제나 언니 힐러리의 실력보다 뒤처졌다.
재클린은 언니를 따라잡기 위해 연습을 거듭했다.
콩쿠르에 나가면 자매는 각각의 악기로 최우수상을 타곤 했다.
그렇게 행복한 생활을 하던 재클린은 첼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길드 홀 음악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16세에는 위그모어 홀(Wigmore Hall)에서 첼리스트로 공식 데뷔하였다.
1960년 스위스에서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였고, 1962년에는 프랑스에서 폴 토르틀리에(Paul Tortelier, 1914-1990)에게, 그리고 1966년에는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 1927-2007)에게 사사하였다.
이렇듯 유복한 환경 덕에 당대의 대가들로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그녀의 천부적 재능과 맞물려 가공할 만한 연주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녀는 첼로에 있어서는 신동이었지만 지적인 면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순한 계산을 요하는 수학도 서툴렀고 가족 모두 할 수 있는 프랑스어도 능숙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악보 읽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문화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폴 뉴먼도 몰랐다.
선머슴처럼 쿵쾅거리며 뛰어다녔고 지나칠 정도로 활달했지만 지적인 토론이 오가는 자리에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보처럼, 또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새침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활달했다.
늘 시간에 늦어 허둥지둥 택시를 잡아탔으며 뭔가를 만날 잃어버리고 다녔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웃음과 따뜻한 열정은 주변 사람들을 전염시키듯 환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누구든 즐거워지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단 첼로를 잡기만 하면 딴 사람이 되곤 했다.
재클린이 열여섯 살 때 커다란 첼로를 몸에 안고 강렬한 보잉을 선보이며 데뷔했을 때 당대의 비평가들은,
“그녀는 나를 미치게 한다” 고 평했다.
재클린의 연주는 아슬아슬했다.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연주할 때는 첼로와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듣곤 했다.
마치 나체인 그녀가 첼로와 섹스를 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청중은 그녀의 몸과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환희와 고뇌가 겹치는 환상에 기꺼이 빠져들었다.
감정적 몰입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행위는 매력인 동시에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자유분방함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결코 머릿속에서 계산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음악이 나오는 통로였고 영혼의 내부가 가진 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 중에 흔들리는 템포나 자신의 몸놀림을 그녀 스스로 알지 못하고 분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테크닉의 한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듯 첼로의 현을 끊어트리기 일쑤였다.
저러다 악기가 폭발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신들린 듯 연주했다.
때로 히스테리와 과장이라는 비판도 들었지만, 여성 연주자 답지 않게 파워풀했고 풍부한 음색과 우아한 정감을 표현했다.
큰 체격에서 뿜어 나오는 스케일과 듣는 이를 아찔하게 만드는 소리의 낙차나 감정의 굴곡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환희로 가득 찼고 모든 것에 거침없었다.
두려움 없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당시 런던의 음악계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르네상스 시대였다.
비틀스가 세상을 뒤집어 놓고 있었으며 자넷 베이커, 존 오그너 등의 신인들이 매스컴을 장식했다.
게다가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 1937- ), 아르헨티나 출신의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1941- ) 등이 몰려들어 활기를 더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재클린 뒤프레가 있었다.
그녀의 애기(愛器)는 1712년 산 스트라디바리우스(다비도프)였다.
그녀의 연주를 들은 익명의 재력가가 선물한 것으로 수십억을 호가하는 명품이다.(다비도프는 현재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가 연주하고 있다.)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명기는 대부분 기업 메세나의 후원으로 사주거나 소유자가 좋아하는 연주자에게 수십 년씩 대여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장한나가 열한 살 때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 최연소자로 참가하여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우수상을 탔을 때 우리나라 기업 메세나에서 그 당시 10억이 넘는 첼로를 사주었다.
일본의 도쿄 4중주단이 사용하는 현악기 4대(바이올린 2개, 비올라 1개, 첼로 1개)의 값은 무려 300억이 넘는다.
그 악기들 또한 한 재력가가 20년 간 무상으로 대여해 준 것이다.
재클린이 21살이던 1966년, 음악인들이 모인 크리스마스 파티가 한창이었다.
곱슬머리에 체구가 왜소한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탱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연주엔 관심이 없는 듯 그의 시선은 줄곧 한 여인에게 향해 있었다.
큰 키의 늘씬한 몸매에 코발트색 드레스를 입고 길게 늘어트린 금발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여자는 구석에 홀로 서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남자의 포커스에 들어온 아가씨는 바로 재클린이었다.
재클린이 옆에서 책을 읽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프로이트군요.” 남자가 반갑게 말을 받았다.
“프로이트를 좋아하세요?” 그러자 재클린이 대답했다.
“프로이트가 원자폭탄만 만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좋아했을 거예요” 당황한 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
재클린은 인문학이며 시사, 문화 쪽에 영 문외한이었다.
세상이 다 아는 영국의 비틀스 멤버가 2명이라고 알 정도였으니 말이다.
피아노 연주를 끝낸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하이~, 나는 다니엘 바렌보임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재클린이 반갑게 대답했다.
“아~, 당신 이름 들어 봤어요”
“그래요? 나를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나요?”
“타고난 열정이 대단하다더군요. 저는 그런 사람에게 전염되긴 싫으니까 저한테서 멀리 떨어지세요”
그러자 바렌보임이 웃으며 말했다.
“전염은 신체적 접촉이 있어야만 되는 거니까 걱정 말아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우리 대화만 하고 키스는 하지 말기로 해요”라고 재클린이 말했다.
다니엘은 당돌하면서 솔직하고 거리낌 없는 그녀에게 묘하게 끌리고 있는 자신을 직감했다.
그때 한 여자가 “재키, 첼로를 차에 놔두고 왔더구나” 하며 그녀에게 첼로를 가져다주었다.
“응, 고마워 언니!”
첼로를 받아 든 모습을 보고 그제야 다니엘은
“재클린, 당신도 음악가군요?” 하고 물었다.
“당연하죠, 저도 당신처럼 유명한데 모르셨어요?”
두 사람 모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서로의 연주를 들어본 일이 없는 첫 만남이었다.
“당신은 음악가처럼 보이지 않아요, 음악가는 보통 당신처럼 금발이 아니죠, 언젠가 당신과 본능적 열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바렌보임이 코트를 입고 파티를 떠나려는 순간 첼로 소리가 들려왔다.
범상치 않은 연주였다.
발을 돌려 소리 나는 쪽으로 들어가니 바로 재클린이었다.
마치 운명처럼 약속도 없이, 리허설도 없이 그는 자연스레 피아노에 앉았다.
그리고 단선율로 그려내는 첼로의 여백을 화음으로 채워 나갔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한 사람들처럼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호흡이었다.
피아노와 첼로가 발화점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랑에 빠져 들었다.
거침없이 어서 빨리 전염되길 원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볼트와 너트처럼 서로를 맞춰 가며 치명적인 열정을 불태웠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였던 바렌보임은 이미 거장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고 있는 신성이었다.
그는 재클린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에고의 소유자였고, 철저하게 분석적인 사람이었다.
재클린은 그런 그의 강인함에 끌렸고 바렌보임은 그녀의 연주와 함께 더욱더 다양한 음악을 만들며 꿈꾸듯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3개월 후, 재클린은 남자 친구를 집으로 데려가겠노라고 전화를 했다.
가족들은 그녀가 데려올 남자가 어떤 사람일지 자못 궁금했다.
두 사람이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식구들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큰 누나가 막내 동생의 손을 잡고 온 것 같이 다니엘 바렌보임은 재클린 보다 훨씬 작았다.
게다가 늘 무릎을 덮는 원피스를 즐겨 입던 재클린이 빨간 미니스커트를 입고 온 것이다.
그녀가 그런 옷을 입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언니 힐러리가 물었다.
“재키, 네 스타일이 확 바뀌었구나”
만면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재클린이
“응 언니! 이 이가 사준 거야, 어때 예쁘지?”
가족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고 반갑게 그리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맞았다.
남자는 거실에 들어서자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안더니 즉흥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집안은 음악으로 가득 차면서 활기차고 따스한 분위기가 되었다.
식사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가 물었다.
“재키야,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 사람인데 이름이 이상하구나?”
“유대인이라 그래요.”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어지는 딸의 말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있잖아요 엄마,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같은 곳에서 결혼을 하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그러자 와인 병을 들고 가지러 왔다가 대화를 들은 남동생이
“누나 거기서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유대인들 뿐 이야.” 했다.
“알아, 그래서 난 지금 교육받는 중이거든, 유대교로 개종할 거야.”
그녀의 부모는 바렌보임을 그저 음악 동료로서 식사 초대를 한 거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재클린은 이미 결혼을 결심한 터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반대는 극심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라 최고의 첼리스트가 된 딸이 볼품없는 유대인과 결혼을 하겠다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택한 사랑을 위해 유대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유럽에서 유대교로의 개종은 오늘날의 성전환 수술보다 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신문에는 바렌보임의 품에 안겨 파안대소하고 있거나,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하고 있는 사진이 심심찮게 실렸다. 그의 원대한 포부는 한계가 없었고, 그가 이끄는 대로 재클린은 승승장구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연주회는 모두 대성황을 이루었고 언론의 평은 언제나 찬탄 일색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성공하기까지 딸의 재능을 믿고 열렬히 밀어준 어머니와의 사이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클린은 사랑을 위해 어머니마저 포기한 것이다.
어머니와의 불편한 관계는 그녀가 병에 걸리고 죽을 때까지 호전되지 않았다.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활약했던 그녀는 완벽할 정도의 기교와 풍부한 음악성으로 일반적 여성 주자들이 갖는 한계를 초월했다.
스케일은 컸고 당당했다.
바닐라처럼 향기로운 미모까지 겸비했던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와, 300여 곡의 레퍼토리를 언제나 악보 없이 연주할 수 있었던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으며 6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피아노는 물론 실내악과 지휘까지 뛰어난 다니엘 바렌보임.
그러나 <우아한 영국 장미>라 불리며 사랑을 받던 그녀가 15cm나(재클린 175cm, 바렌보임 160cm) 더 작고 볼품없는 곱슬머리의 <이스라엘 선인장>을 택한 데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그 커플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난 지 6개월 후인 1967년 6월 15일, 26세의 바렌보임과 22세의 재클린은 벤구리온 수상이 참석한 가운데 이스라엘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결혼은 가히 세기의 결혼이라 할 만했다.
세상은 서슴없이 ‘세기의 커플’이라 부르며 ‘카멜롯의 아서왕과 기네비어 왕비’에 견주어 보도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클라라 슈만과 로버트 슈만 이후 가장 뛰어난 음악인 부부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재클린의 부모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로써 바렌보임은 이스라엘과 영국이라는 강력한 후원 기반이 만들어진 셈이지만, 재클린의 입장에서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클래식 정통 음악 세계로 진입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클래식 음악세계에서 독일과 이스라엘은 정 반대의 입장인 부분이 크다.
유대인의 원흉 아돌프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음악가는 독일인 바그너이다.
그를 좋아한 이유 중 하나가 바그너 또한 반유대주의 자라는 것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내용은 독일 민족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신화를 토대로 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게 정석인 반면 독일에서 바그너의 입지는 대단히 크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인 바렌보임은 바그네리언(바그너 애호가)이었다.
그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극장(바그너 오페라 전용 극장으로 매년 바그너 페스티벌이 열림) 무대에 서기를 갈망하였고, 결국 그 꿈을 이루었다.
즉 바렌보임은 재클린을 유대인으로 개종시켜놓고, 정작 자신은 반 유대주의자인 바그너의 음악을 숭배하는 커밍아웃을 선언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바렌보임에게 올인한 그녀는 중동과 전쟁 중인 이스라엘로 날아가 이스라엘 교향악단과 협연을 할 정도로 강한 애정을 과시하며 모든 게 노 프라블럼이었다.
영국은 유럽의 중심에 있었지만 예로부터 클래식 음악의 자존감은 낮았던 곳이다.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헨델은 독일에서 귀화해 온 이민자이고 그 이후로 유명한 음악가는 이렇다 할 만한 사람이 없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품 [사랑의 인사]와 [수수께끼 변주곡],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1934)가 그나마 영국 출신의 소중한 음악가였다.
엘가는 작곡가 중에서 손꼽히는 애처가였다.
그의 곡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랑의 인사]는 아내가 된 엘리스에게 청혼할 때 바친 곡이다.
1919년, 엘가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첼로 협주곡은 초연에 실패한 뒤 별 인기를 끌지 못했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주춤거리며 느리게 시작된다.
그러나 궤도에 오르면 그 힘이 난폭하게 폭발한다.
첼로 협주곡은 엘가의 마지막 작품이다.
1934년 엘가가 죽은 후 그의 절친이었으며 당대의 명지휘자였던 존 바비롤리(Sir John Barbirolli, 1899-1970 영국의 지휘자며 첼리스트) 경은 이 곡이 세상의 싸늘한 반응으로 묻혀가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그 역시 엘가처럼 몽상가의 기질이 있었으며 다소 우울증 증세를 겪고 있었다.
때마침 재클린 뒤프레라는 기막힌 첼리스트를 만나 이내 무릎을 쳤다.
그리고 재클린 뒤프레는 1965년 4월 7일 당시 스무 살의 나이로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존 바비롤리가 이끄는 할레 오케스트라와 엘가를 협연했다.
그렇게 그 곡은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전설적인 첼리스트 카잘스는 그녀의 엘가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렸고,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 역시 그녀의 연주를 들은 후 자신의 연주 목록에서 엘가를 영영 빼버렸다고 한다.
신화는 이처럼 극적으로 탄생했다.
이 공연의 대대적인 성공은 재클린 뒤프레라는 여류 첼리스트의 이름을 모두에게 각인시킴은 물론 그동안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엘가의 위상까지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내성적이다가 묵직한 음량을 극적으로 쏟아내는 엘가의 특성을 잘 아는 바비롤리 경과 격정의 화신인 재클린의 만남은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첼로 명곡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엘가는 이제 20세기에 작곡된 첼로 작품 중 가장 비극적인 곡 [첼로 협주곡 E단조]를 남긴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당시 앨범을 녹음한 1965년은 뒤프레가 클래식계 최고 스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20세의 전도유망한 때였다.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 )을 만나기 전이었고, 아직 사랑의 열정을 알기 전이었다.
연주자가 특정 작품에 깊이 공감했을 때 어떻게 자신을 온전히 내던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곡이 재클린의 엘가 첼로 협주곡이라는 것이 정평이다.
쉼 없이 연주되는 4개의 악장은 평생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정신적 육체적 시련과 맞서야 했던 재클린의 삶을 연상케 한다.
협주곡은 인트로 없이 곧장 첼로의 더블 스톱핑으로 시작한다.
활은 현의 가장 묵직한 슬픔을 끌어내기 시작하여 후반부에선 오케스트라의 총주를 기다리며 하나의 음을 팽팽하게 잡아끄는 매서움은 그 어떤 칼날보다 섬뜩하다.
끝없이 침잠하는 3악장은 온몸이 굳어진 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가 연상된다.
그녀의 암울하고 슬픈 첼로 선율이 자신의 비극적 미래를 예언한 듯 슬프다.
나는 1967년 바렌보임과 재클린이 협연한 엘가 첼로 협주곡 리코딩 흑백 필름 비디오테이프를 애장품으로 갖고 있다.
온갖 영상물이 DVD로 바뀌었지만 이 비디오테이프만은 버릴 수가 없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독일 나치의 공포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러시아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이던 아버지에게 음악을 사사한 바렌보임은 재클린처럼 어린 나이에 이미 뛰어난 실력을 드러냈다. 이미 일곱 살 때 무대에 선 바렌보임은 가족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자 홀로 유럽을 돌면서 장학금을 받고 대가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열 살부터 시작된 그의 떠돌이 인생은 아르헨티나, 이스라엘, 스페인 국적과 팔레스타인 시민증도 갖게 되었고 6개 국어를 유창하게 만들었다.
그는 철학, 문학 등 인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고 날카로운 평론가답게 이성적이며 때로는 독설가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재클린이 본능에 충실한 반면 계산된 목표가 철저하게 뚜렷한 사람이 바렌보임인 것이다.
1970년에 들어서면서 재클린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첼로를 켜다 템포를 놓치는 경우는 다반사고 종종 활을 놓치기도 했다.
눈이 침침해지면서 악보가 보이지 않거나 연주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여 부축을 받아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한 증세는 재클린이 최고의 찬사를 받던 때에 시작되었다.
참기 힘든 피로감과 집중력 저하는 곧장 연주의 질로 나타났고, 바렌보임은 그 원인을 정신적 결함으로 여겼다. 한 발짝도 발을 뗄 수 없거나 아무 이유 없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음에도 바렌보임은 언제나 그녀에게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면서 걱정 대신 따끔한 충고를 하곤 했다.
공주처럼 유복하고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하던 재클린이었다.
살아오면서 거리낄 것도 부족한 것도 없었다.
한 번의 실패도 없었으며 그녀의 삶은 오로지 무지개 빛깔로 채색되고 있었다.
바렘보임과의 만남은 천사의 목소리처럼 아름다운 첼로에게 오색의 날개가 달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모든 걸 던져 사랑한 남편으로부터 그녀의 증세들이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핀잔을 받는 일이 반복되자 스트레스와 심리적 압박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재클린은 프로이트 학파 계열의 정신 분석의에게 상담을 받았지만 자괴감은 심해질 뿐이었다.
그녀의 연주는 점점 최악으로 치달았고 ‘너무나 훌륭해서 그녀는 나를 미치게 한다’ 던 비평가들은, ‘그녀의 일관성 없고 조리 없는 연주는 정말로 우리를 미치게 한다’는 악평을 쏟아내기에 이르렀다.
재클린은 갑자기 날개 부러진 작은 새처럼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외롭고 쓸쓸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재클린의 언니인 힐러리의 남편 역시 지휘자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부부는 음악가로의 삶을 포기하고 시골로 이사를 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보헤미안처럼 살고 있었다.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오던 힐러리는 멀리서 먼지를 풀풀 날리며 택시가 달려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외딴집이기도 하고 택시를 타고 올 사람도 없기에 누굴까?
의아해하며 서있자니 동생 재클린이 첼로를 갖고 내리는 것이 아닌가.
택시기사가 자동차 트렁크에서 커다란 여행 가방을 꺼내 주곤 온 길을 되짚어 떠나고 있었다.
재클린의 근황을 모르고 있던 힐러리는 동생의 예고 없는 방문에 깜짝 놀라 한참 동안 껴안으며 반가워했다.
언니가 그립기도 하고 몸도 안 좋아 잠시 쉬러 온 거라 했다.
힐러리는 기꺼이 반기며 얼마든지 있으라 했다. 어린 조카 둘과 형부가 집안에서 나왔다.
재클린은 소풍 온 어린아이처럼 조카들과 뒹굴고 놀며 오랜만에 행복을 만끽하며 꿈같은 며칠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재클린이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나 요즘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어, 형부를 나한테 좀 빌려주면 안 될까?”
그 말을 듣자마자 힐러리는 깔깔 웃으며
“재키!, 농담도 잘 하는구나.”
“언니, 농담 아냐. 나~ 형부랑 자고 싶어.” 재클린의 표정이 진지했다.
순간 재키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말문이 닫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재클린은 그간에 자신에게 일어난 증세와 바렌보임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들, 그리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을 언니에게 소상히 말했다.
힐러리는 동생이 안타깝고 불쌍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며칠 동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동생을 대하는 태도는 자연스럽지 못했고 남편과 섹스를 할 수도 없었다.
맘이 편하지 않음이 첫 째 이유요, 혹시나 아래층에서 자고 있는 동생에게 소리라도 들리면 어쩌나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고민 끝에 힐러리는 남편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남편은 펄쩍 뛰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그러나 어색하고 힘든 시간이 계속되자 힐러리 부부는 동생의 청을 들어주는 것에 합의했다.
남편과 자신의 침실인 방으로 잠옷을 입은 재클린을 들여보내고 힐러리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온몸의 감각이 두 사람이 있는 침실로 향해 있었다.
잠시 후, 피아니시모로 시작되는 서곡처럼 무슨 소리가 여릿여릿 들려왔다.
소리는 서곡에서 그치지 않았다.
마치 15분 동안 점점 음량이 커지기만 하는 라벨의 볼레로처럼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힐러리는 귀를 막았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했다.
행여 자신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릴까 입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은 밤새도록 여러 악장을 연주해 나갔다.
지옥 같은 밤이었다.
다음 날, 재클린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활기찬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연한 계약처럼 재클린은 공공연히 형부와 동침을 했고 힐러리의 남편 역시 미안해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그 관계를 즐기는 듯했다.
그렇게 언니 힐러리는 신경쇠약에 걸린 동생에게 정신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남편과의 동침을 허락하거나 외면했다.
훗날 힐러리가 쓴 재클린 회고록에서 드러난 이 사실을 재클린의 팬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힐러리는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것은 좋은 대로, 안 좋은 것은 안 좋은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힐러리는 재클린이 죽을 때까지, 아니 그녀의 사후에도 그러했던 동생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증세가 산발적으로 나타나던 그 병은 2년 후에서야 진단이 내려졌다.
<다발성 근육 경화증>,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 들어가는 병으로 걷는 것은 물론이요, 나중엔 말을 할 수도, 눈도 깜빡이지 못하며 숨을 쉴 수조차 없어져 사망에 이르는 끔찍한 병인 것이다.
그러나 재클린은 확실한 병명을 찾은 것을 반가워하며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괜찮아, 내가 미친 게 아니래, 얼마나 다행이니, 너무 좋아.”
이렇게 지독한 아이러니가 있을까?
그녀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게 될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1973년, 그녀는 연주자로서 최고의 절정기에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열여섯 살에 데뷔하여 고작 12년으로 마감해야 했던 짧은 연주 인생은 그렇게 허망하기 짝이 없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다발성 근육 경화증과의 싸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자신의 고립감이나 무력감과의 싸움을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온몸의 근육과 신경은 갈수록 굳어 갔다.
찾아오지 않는 어머니와 남편을 기다리는 것 말고 재클린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자신이 여전히 건강한 여성임을, 그래서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고 싶었다.
그 욕망은 매 순간 파고드는 음악과 점점 멀어지는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한 상실감으로 인해 더욱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있던 재클린은 약을 주러 온 남자에게 말했다.
“헨리, 부탁이 있어요.”
“네, 재키 말해요. 뭘 도와줄까요?”
결혼한 언니는 가끔씩 문병을 왔지만 지켜야 할 가정이 있었고, 남동생 역시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재클린의 남편은 발걸음을 끊은 지 오래였고 부모는 여전히 딸을 외면하고 있었다.
헨리는 재키의 휠체어를 밀어주거나 침대에 눕히는 등 간병을 하며 사소한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날 좀 사랑해 줘요?”
남자는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라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옷을 벗고 이리 와서 내 옆에 누워요.”
헨리는 그즈음 재클린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뜻을 쉽게 수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헨리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안돼요. 곤란합니다. 당신은 환자고….”
그러자 재키가 말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날 좀 안아줘요. 한 번만 안아줘요.”
근육이 마비되어 가는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청명한 하늘처럼 너무나 또렷했다.
막 피어난 장미처럼 정념은 타올랐다.
차라리 지우개로 지워지듯 뇌 세포도 조금씩 마비가 되었으면 싶었다.
그녀의 생각과 맘은 아직 젊고 싱싱한 여자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자는 재클린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로 갔다.
재클린은 첼로를 연주하듯 격정적이고 뜨거운 호흡을 마주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침내 재클린은 오랜 시간 여러 겹의 소외와 고립에 닫혀있던 여자의 문을 열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내 남은 삶을 어떻게 견디지요?”
그녀의 마지막 15년 삶은 이처럼 외롭고 처절했다.
열여섯 살부터 12년 동안 재클린 뒤프레는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던 최고의 연주자로 존재한 빛의 딸이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 15년간 아무도 대신해주지 못하는 병마의 고통을 혼자 외롭게 감내해야만 했던 어둠의 딸이었다.
그녀를 돌본 사람은 언니인 힐러리와 몇몇 친구들뿐이었다.
재클린은 최후의 수개월간 거의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았다.
최악의 상태였지만 그녀는 결코 인내심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용감했으며 그 용기가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지켜주었다.
1987년, 재클린은 한 마디의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눈을 뜰 수가 없어 눈꺼풀을 기구로 벌려 놓아야만 했다.
1987년 10월 16일, 폐렴에 걸렸고 10월 19일 의사는 최후의 순간이 왔다고 말했다.
그날 오후 재클린은 의식을 잃었다.
재클린의 의식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혼수상태, 또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있는 감각이 청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누워있는 방에 슈만의 첼로 협주곡 음반이 돌아가고 있었다.
언니와 남동생이 그녀 곁에 있었다.
연락을 받은 바렌보임이 파리에서 급히 날아왔다.
투병 기간 동안 철저히 외면해 온 남편이 비로소 죽음의 문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랑할 수 있어 감사했고 영원히 사랑한다’라는 말을 맘속으로 전하며 불행한 여자는 숨을 거두었다.
도로가 폐쇄되고 철도가 끊기는 등, 유례없는 폭풍이 몰아치는 날이었다.
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걷기를 좋아했던 첼리스트 재클린은 그렇게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재클린은 월요일에 죽었고 이틀 후에 장례식이 있었다.
힐러리는 묘지에 도착해서야 동생에게 주기 위한 꽃다발을 집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가까운 꽃집으로 달려갔다.
꽃가게 주변에는 색색의 꽃다발들이 쌓여 있었다.
“왜 이렇게 꽃들이 많은 거죠?”
“오늘 여기서 굉장히 큰 장례식이 있어서요. 위대한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가 죽었답니다. 주문이 너무 많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군요. 그런데 무슨 꽃을 드릴까요?”
힐러리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떠듬떠듬 원하는 꽃을 설명했다.
분홍빛이 도는 크림색 장미는 동생이 가장 좋아했던 꽃이었다.
계산을 하려고 보니 지갑도 없었다.
주인이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고맙다는 말이 쉰 소리로 간신히 새어 나왔다.
최악의 절망에 허덕이면서도 끊임없이 남편을 그리워하고 기다렸건만, 투병기간 내내 그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음악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연주를 할 수 없는 조강지처는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내 재클린이 처절하게 병과 싸우는 동안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와 동거를 하면서 두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재클린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훗날 아내의 장례식에만 잠시 참석했을 뿐 재클린의 무덤에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재클린이 세상을 떠난 후, 빼어난 연주력에 아름다운 외모, 게다가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았던 아내를 돌보지 않고 버린 파렴치한 남편으로 따라다녔던 주홍글씨는 그의 연주에 대한 폄훼로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음악가로 승승장구하던 그를 미워했으며 정서적으로 불편해했다.
각국의 평론가들도 외면했다.
영국에서는 재클린을 버렸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선 남미 출신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유대계 내부에서는 반 유대인 바그너 음악을 선호한다는 이유로, 또 미국에서는 음악가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이유였다.
게다가 바렌보임은
‘나는 하루 2시간 이상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는다. 그 이상은 내게 필요치 않다’고 공공연히 발언함으로써, 잘난 척하는 구제불능의 인간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재클린이 죽은 후 바렌보임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거하던 여인과 결혼했다.
그녀는 유대계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이머의 전 부인이었던 유대인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 키로바이다.
1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적 재능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의 일생은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흡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
영국인 특유의 금발과 수줍은 듯 밝은 표정을 가진 이 두 여자는 스물 남짓의 젊은 나이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화려하게 등장해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다 뜻하지 않게 때 이른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러나 각기 음악성과 아름다움이라는 드문 재능의 소유자였던 이 두 여인의 개인적인 삶은 우연히도 철저하게 불행했다.
재클린이 죽고 재혼한 바렌보임은 고전과 낭만, 현대음악을 섭렵하면서 역량을 마음껏 펼쳐 나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곧장 베를린으로 날아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했다.
이는 동베를린 사람들에게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이 없어졌다는 환희의 진실을 알려주는 특별한 음악회였고, 평화와 자유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와 베를린 오페라극장 예술 종신 음악 감독까지 맡게 된다.
독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마침내 바그너 음악의 독보적인 일인자로 올라섰다.
2001년 베를린 국립오페라단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방문한 바렌보임은 앙코르 곡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서곡을 연주하며 행동으로 바그너를 어필했다.
이 사실은 전 세계 신문 지상에 대서특필 되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가 홀로코스트의 숭고한 정신을 모독했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2002년 이스라엘의 최고 문화상을 수상하고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중동정책이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에 상반된다. 팔레스타인과 아랍국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가뜩이나 이스라엘 종교 관계자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상황에 그의 폭탄 발언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가정의 평화도 못 지키고 야망에만 눈이 뒤집혀 병든 아내를 버리고 도망간 남편이 감히 세계 평화를 논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연일 쏟아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평화 콘서트의 진정성이 알려졌고, 비난 수위도 그만큼 낮아졌다.
그러나 바렌보임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 뒤에 항상 따라다니는 뒤프레의 그림자와 정치적인 음악가라는 수식어가 그러했다.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되는 슈만과 클라라 부부와 달리 바렌보임과 재클린은 너무나 처절하고 애달픈 사랑을 했으니 세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95년 가을, 오랜만에 런던에 온 바렌보임과 힐러리가 만났다.
“다니엘, 재키가 그리울 때가 있나요?”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아주 많이요. 아직도 런던에 오면 재키와 연주하던 생각이 나서 즐거워요.”
“그러면 그 애 묘지에는 가봤나요?”
“아니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묘지 같은 데는 안 가요. 어머니 무덤에도 가본 적이 없거든요.”
그녀의 죽음은 36세부터 72세로 죽을 때까지 36년간 정신착란으로 폐인이 되어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이며 시인 횔덜린 (1770~1843)의 시 <운명의 여신들에게> 중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제 노래를 두고 떠나야 하더라도 결코 불평하지 않으리다. 적어도 한 번은 신들처럼 살아봤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나이다」
30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사랑한 남자 로댕을 기다리며 홀로 외롭게 투병하다 죽어간 카미유 클로델,
전신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그림을 그렸던 멕시코의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
그리고 열여덟 살에 발병한 다발성 신경 경화증으로 꼽추가 되어 버린 천재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
그녀들처럼 재클린 뒤프레 또한 처절하게 사라져 간 비운의 여성 아티스트 중 한 사람으로 남았다.
오펜바흐(Offenbach 1819-1880, 프랑스 작곡가)가 작곡한 <재클린의 눈물>이라는 첼로곡이 있다.
제목 때문에 오펜바흐가 재클린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펜바흐는 재클린보다 120여 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이며 현재 독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첼리스트인 베르너 토마스( Werner Thomas1951- )가 우연히 오펜바흐의 미발표 악보를 찾아냈다.
그리고 첼리스트 재클린의 죽음을 애도하여 <재클린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자신이 연주하여 세상에 알린 것이다.
오르페오에서 출시한 이 두 장의 CD는 베르너 토마스가 연주한 첼로곡 모음이다.
갖고 있는 수 천 장의 CD중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할 수 있는 음반이다.
음악에서 슬픔을 느끼는 건 황홀한 경험이다.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고,
슬픔이 행복할 수 있음이 음악의 힘이다.
재클린의 첼로는 찬란한 예술에 바치는 ‘눈물의 詩’다.
<재클린의 눈물>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어김없이 중얼거려지는 시구가 있다.
그녀의 첼로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남진우의 시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