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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Feb 01. 2017

어떤 간절한, 쓸쓸

기억만으로도 눈이 매워지는 게 사랑이다.



모든 연애는 달콤하다. 

또한 모든 연애는 고통을 동반한다. 

어제 일은 기억이 안 나도 벽에 걸린 액자처럼 분명하게 기억나는 지상 최대의 스펙터클한 쇼가 사랑이다. 

사랑에 나이와 국경이 없다는 명제는 물음표 보다 온점을 찍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일흔 살 남자가 열일곱 소녀에게 연애 감정을 갖는 부분에서는 의문 부호를 필요로 한다. 

사랑의 정치경제학에 노인이 제외될 필요는 없지만 젊은 여성을 탐하는 노인은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된다. 

사랑에 중독된 남성 노년들의 롤리타 신드롬과 마주하면서 이거야말로 분석이 필요한 현상처럼 보인다. 

늙는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가 아니다. 

나이 들어 보면 안다. 

껍데기와 감정이 정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이 말을 하고 보니 내가 이미 팔십은 된 것 같다. 

새해라고 했던 게 어제 같은데 1월이 도둑맞듯 지나갔다.

쇠털 같이 많은 날들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한 그루의 느티나무에 달린 이파리와 책 한 권에 들어있는 글자 수 중 무엇이 많을까 하는 비경제적인 의문을 하며 ‘어떤 간절한, 쓸쓸’에 대해 생각한다.     



롤리타 신드롬은 러시아 출생의 미국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장편소설 롤리타에서 유행되었다. 

파리 출생인 37세 중년 남자이며 문학 강사인 주인공 험버트는 미국 뉴저지의 하숙집 여주인인 샬로트의 열두 살 난 외동딸인 야생마 같은 롤리타에게 첫눈에 이성으로서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런 험버트는 오로지 자연스레 롤리타의 곁에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샬로트와 결혼한다. 

우연히 험버트의 일기에서 롤리타에 대한 마음을 알게 된 샬로트는 충격을 받고 밖으로 뛰쳐나가다가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그리하여 험버트는 롤리타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지만 롤리타는 험버트의 병적인 애착에 염증을 느껴 다른 남자 (퀼티)와 도망친다. 

험버트는 3년의 추적 끝에 롤리타를 가로채 간 퀼티를 찾아내어 살해하고 투옥된다. 

험버트는 복역 중 관상동맥 혈전증이라는 병으로 사망하고 롤리타 또한 험버트가 죽고 한 달 후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고 만다. 

이 충격적인 소설은 어린 소녀들에 대한 성적 도착증을 다룬 이야기로 님페트, 롤리타 콤플렉스, 롤리타 신드롬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젊은 여자가 서 있다. 

살이 비치는 민소매의 하얀 원피스를 입은 뒷모습이다. 

한쪽 손은 커튼 자락을 걷으며 다른 손으론 치마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다. 

신발은 있는데 맨발이다. 한 남자가 유채꽃 같은 노랑과 연두의 풍경 앞에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어쩌면 종아리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여자의 엉덩이가 실하다. 

왼쪽엔 말 한 마리가 유유자적 풀을 뜯고 있다. 

이정웅이 그린 박범신의 「은교」 표지 그림이다.




<은교>(문학동네. 2010)는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한 책' 이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문장 속의 ‘감히’는 사족이다. 

소설이 인간의 욕망과 근원을 파헤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이 ‘감히’란 단어에서 이 소설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 

소설은 늙은 시인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 그리고 풋풋한 소녀 한은교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한다. 

이적요는 감히 열일곱 은교에게 연정을 품고, 그로 인해 폭풍에 휘말린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애는 손녀 같았고 어린 여자 친구 같았으며, 아주 가끔은 누나나 엄마 같았다”라고. 

소설의 내용 중, 존재의 내밀한 욕망이 불을 뿜는 부분을 소개한다. 

은교가 시인의 가슴에 문신을 새겨주는 장면이다. 


「너의 머리칼이 나의 이마와 어깨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명주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온몸의 죽은 세포들이 새벽 봄꽃처럼 깨어 일어나고 있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가슴팍이 반질반질하세요.” “나의 가슴살이 반질반질한 것은 사실은 검버섯이 피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세포들의 시신이었다. 그러나 죽은 세포들을 뚫고 솟아올라오는 생성의 낯선 바람 때문에 나는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헤나로, 머리에 물을 들이기도 해요. 머리 물도 들일까요?” “아니… 나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너의 가슴이 내 어깨에 살짝 닿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움찔했다.” “가만히 계세요. 어른이 돼도 간지럼 타나 봐요.” 향기 나는 너의 머릿결이 어깨, 이마를 먼저 비질하고 지나가자, 온화한 선지자처럼, 이번엔 가슴 결이, 어깨를 쓱 스치고 머리께로 올라왔다. 이제 두 달만 지나면 열일곱 살이 될 가슴이었다. 그것은 넘치지 않고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남해의 태양빛이 잘 익힌 오렌지 같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자꾸 황금빛 오렌지의 원융한 테두리가 보이고, 바다로 내뻗은 팥알 같은 유두와 보라색 젖꽃판이 보였다. 그것들은 마치, 네 손등 위, 울근불근하던 피돌기처럼, 쏜살같이 내 시야로 진군해 들어왔다. 그리고 차츰 팽창했다. 어깨에 닿았던 가슴이, 네가 위치를 바꾸는 데 따라 머리, 광대뼈를 건들고, 턱을 살짝 눌렀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손끝은 껍질을 벗겨내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었으며, 입술은 오렌지 단물을 베어 물고 싶어 지옥문처럼 굳었다. 향기가 네 머리칼, 가슴에서 났다. 쥐스킨트 소설 <향수>에서 완성된, 세상의 모든 시간을 해방시키는 ‘처녀의 향기’였다. “저는요, 발목이 간지럼을 제일 많이 타요. 발목 뒤 옴씬 들어간 데요.” 네가 말했고, ‘옴씬’이 기름통, 내 몸에 성냥을 그어대는 것 같은 효과를 금방 가져왔다. 나는 경악했다. 우회해서 표현하진 않겠다. 갑자기 나의…」



단지 미화시킨 소설의 한 대목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사실적이다. 

소설은 사실을 근거로 한다. 

이적요라는 인물을 통해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동의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을까 생각했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서 칠십 세의 시인 이적요는 자신의 시적 생애 전부를 합친 것이 은교의 사랑을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불온한 시대와 투쟁하면서 내걸었던 온갖 명분과 가치는 ‘마지못한’ 것에 불과했으며 그가 진정 그리워했던 것은 열일곱 살 소녀의 숨결이자 따스한 온기다. 

그렇다면 70대 노년에게 하필이면 왜 열일곱 살의 소녀가 필요한가? 

회춘의 양생인가? 

열일곱 소녀의 얼굴에서 순수한 열일곱 소년이던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진 자신의 젊음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랑은 이기적이다. 

한때는 혁명을 꿈꾸었다고는 하나 늙은 그들에게 사회적 원로로서 참견할 자리는 더 이상 없다. 

그들이 사라져도 사회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돌아갈 것이다. 

사회라는 무대는 더 이상 늙은 배우를 원하지 않는다. 

길게 늘어난 평균수명으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병을 친구 삼아 홀로 늙어가는 것이다. 

이런 노년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물이 어린 시절 아늑한 엄마의 치마폭을 대신하는 소녀의 품속이다. 

천재성이 번뜩였고 그것이 신성(神性)과 시성(詩性)으로 맞닿아 있던 이적요 시인은 무능하고 의존적인 문학적 아들 서지우에게 자신의 미래를 부탁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비루한 신이 된다.

      



영화 롤리타에서 험버트 역을 맡았던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한 영화 <데미지> 또한 비슷한 맥락을 지닌다. 

조세핀 하트(Josephine Hart)의 원작 ‘아주 성공적인(Very Successful)’을 영화화한 데미지는 아들의 애인을 사랑하게 된 아버지의 삼각관계를 충격적이고 비극적으로 그린다. 


스테판 플레밍 (제레미 아이언스 분)은 사회적 영향력, 아름다운 아내와 저택 등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50대 후반의 정치가이다. 

어느 날 그는 한 칵테일파티에서 안나 바튼(줄리엣 비노슈 분)이란 여자를 만난다. 

두 사람은 불과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지만 매우 짜릿한 흥분을 맛본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스테판의 집에서 우연히 재회하는데, 놀랍게도 안나는 아들 마틴의 여자 친구였다. 

안나는 모르는 체 하지만 이후 그녀는 그의 사무실에 찾아와 자신의 주소를 알려준다. 

스테판이 그녀를 찾아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말이 필요 없는 연인이었다. 

마틴은 자신의 승진을 기념하기 위해 가족 파티를 열고 그 자리에 안나를 초대한다. 

저녁 식사 후 스테판은 아내 잉그리드에게 철야 청문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속이고 안나의 아파트로 간다. 

안나와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이런 상황 속에서 스테판은 아들 마틴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안나는 스테판의 걱정에 냉담하게 반응한다. 

스테판은 장관회의가 열리는 브뤼셀로 안나를 초대한다. 

안나는 이를 거절하고 마틴과 파리로 주말여행을 떠난다. 

이 소식을 접한 스테판은 회의에 불참한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파리로 향한다. 

일요일 이른 새벽 파리에 도착한 그는 호텔로 전화를 건다. 

잠든 마틴을 남겨두고 호텔을 빠져나온 안 나와 스테판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런던으로 돌아온 스테판은 안나에게 잉그리드와 헤어지겠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되면 마틴과의 관계를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싫다는 이유로 만류한다. 

이후 스테판의 가족과 안나 사이의 갈등은 첨예화되고 마틴과 안나의 약혼 발표로 어쩔 수 없는 주변 상황이다. 이에 스테판은 안나에게 절교를 결심하고 아들 마틴의 사무실로 찾아가 부자 관계가 극적으로 화해된다. 

그러나 얼마 후 스테판은 사무실로 배달된 소포 꾸러미를 받는데 그 안에는 안나의 아파트 주소와 열쇠가 들어 있었다. 

스테판은 그 주소로 안나와 재회하는데, 마침 마틴이 찾아오고 자기 아버지를 발견하여 놀라서 뒤로 물러서다가 난간에서 떨어져 죽는다. 

     


1816년 아내가 사망한 뒤 1923년, 74세의 괴테는 19세의 울리케 폰 레베초와 사랑에 빠진다. 

괴테는 울리케의 모친에게 딸을 달라고 부탁하지만 당사자가 끝내 망설이는 바람에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고, 이러한 배경에서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가 탄생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괴테와 울리케의 ‘스캔들’이다. 

후대에 와서 많은 사람들의 논란거리가 된 괴테의 이 마지막 사랑은, 현대에 이르러 여러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작품들이 괴테의 사랑을, 나이 많은 사람의 특별한 성적 기호로밖에 풀어내고 있지 않다.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 괴테


독일 대표 작가 ‘마르틴 발저’는 2007년 괴테의 사랑 이야기를 당대 사교계의 호사가처럼 세밀하게 그려낸다. 다양한 소재로 풀어내는 지성인들의 대화와 시와 연극, 춤 등이 끊이지 않는 예술적인 분위기,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치부하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낭만까지 당 시대 상황을 완벽하게 재현하며, 사유하는 거장 괴테의 내적 갈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괴테의 사랑>에서 일흔두 살의 괴테는 19살의 울리케에게 빠져서 자신이 젊은 베르테르라고 착각한다. 

평생 사랑받는 것에만 익숙했던 괴테가 온갖 치장을 하고 그녀를 만나러 가지만 

“오늘은 아름다워 보이네요”라는 울리케의 말에 상처받는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단지 아름다워 보인다는…, 그것도 오늘만?’ 

70대에 이르러 사랑의 고통으로 마침내 철이 든 괴테는 사랑 없이도 번식이 가능하다면 구태여 사랑의 감정이 왜 필요한지 번뇌한다. 

번뇌의 결과 괴테는 인간이 고통 없이 사는 꼴을 볼 수 없었던 신의 심술이 인간에게 사랑의 감정을 부여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사랑의 기쁨과 그 상실의 슬픔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의 단골 소재이자 시적 영감의 가장 강력한 원천이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감성을 예찬하며 숭배했던 낭만주의 시인들에겐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시인이 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똑같이 들뜨고 똑같이 슬퍼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과 품성에 따라 사랑을 노래했으며 상실의 슬픔을 위로하였다. 


울리케
괴테와 울리케


동 작가 마르틴 발저의 <불안의 꽃>은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극한의 행복과 불행의 절정을 모두 경험하는 노인의 이야기이다. 

원제인 ‘앙스트 블뤼테 Angstblute’는 ‘Angst-영어의 anxiety(불안, 열망)에 가까운 뜻’와 ‘Blute-영어의 blossom(개화)에 가까운 뜻’의 합성어이다. 

이는 전나무가 이듬해 자신이 죽게 될 것을 감지하면 그해에 유난히 화려하고 풍성하게 꽃을 피워 올리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두려움으로 인한 만개이며 완전한 소멸을 눈앞에 두었을 때만이 나타날 수 있는 살아 있음의 표시인 것이다. 

즉 생명을 가진 어떤 존재가 가장 살아 있고자 원하는 순간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죽어가면서 단 한 번 노래하는 백조의 노래와 같은 맥락이다.


마르틴 발저  <불안의 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조세핀 하트의 <데미지>, 백발성성한 마르틴 발저의 <괴테의 사랑>과 <불안의 꽃>, 그리고 박범신의 <은교>에 이르기까지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늙은 페르소나(사람의 몸을 조각한 작품)들은 국적 불문하고 치명적인 황홀경에 빠져든다. 

그들은 죽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에 눈이 멀고 귀가 막힌다. 

이 작품들에서 노년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 안정되어(유명한 시인, 교수, 광고회사 중역, 사진작가, 배우, 금융 최고경영자) 있다. 

사회적 지위, 명예, 부, 권력이 있다지만 젊음만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늙어간다는 것은 가난한 젊음보다 남루하다. 

혹은 늙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다.

이 노년들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은 늙는 것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라는 치욕이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남루한 노년의 몸은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휑하게 빠지거나 희어지는 머리카락, 늘어지고 쭈그러진 피부, 지친 심장, 삐걱거리는 관절, 물렁한 성기, 풀어진 괄약근. 이처럼 몸은 무너지고 삭아들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끔찍한 현실과 차마 대면하길 꺼린다. 

그러자 현대의 노인은 욕망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의 명령에 따라 피를 걸러내고 심장을 바꾸어 달고 주름은 당기고 치아를 심고 가발을 쓰고 젊은 척 사랑하며 후회 없이 죽고 싶어 한다. 

그 순간 그들에게 찾아든 사랑은 깊은 우물 바닥에 누워서 죽어갈 때 쳐다보는 사막 하늘의 초승달처럼 푸르고 찬란하다. 

삐걱거리는 관절에 꽃잎이 날아와 앉고 굳어가는 핏줄에 환희의 나비가 나풀거린다. 

늙은 그들에게 사랑은 대면하기 힘든 죽음과 고통을 감싸주는 진통제이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유혹의 얼굴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지막 위로의 처방전은 따스한 사랑이 아닐까? 

그래서 노년의 사랑은 죽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사랑,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든 삶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시대를 맞이해 늙은 아버지들은 더 이상 자식의 교육과 양육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면서 자식의 노예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식 세대 또한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지 않는다. 

노년의 불안은 이처럼 세대 간 연속성보다는 세대 간의 갈등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가족은 해체되고 효는 찾아보기 힘들다. 

노년을 폐기물로 만드는 세상에서 황혼의 반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늙은 아버지는 아들 세대의 여자까지 자신의 몫으로 챙기고 자기 당대에 모든 욕망을 소진시키는 것으로 보복한다. 

길게 늘어난 삶에서 사랑의 불씨를 끊임없이 되살려야 하는 노년은 감당하기 힘든 탐욕에 지친다. 

지쳐서 죽을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재생산의 약속과 연속성의 환상이 없는 고령화 시대가 보여주는 사랑의 정치 경제학이다.     

  

이제 노년은 오직 한 줌의 건강과 자기 육체의 감각과 쾌락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 

우리 시대 노년은 존중받기는커녕 사회적 폐기물이 되고 있다. 

세대 간 연속성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약속은 없다. 

인생에 있어서 희망, 순탄함, 성공뿐만 아니라 좌절, 인내, 비참함 등도 인생을 완성시키기에 의미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인생 완성의 과정이므로, 인생의 쓴맛, 단맛 모두를 음미하는 것이 곧 행복하게 나이 드는 비결이다. 

좀 젊었을 때 나의 인생을 이어주는 소소한 것들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면, 나이 듦은 불안과 체념이 아닌 항상 신선한 기대로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참 빠르다’, ‘내 나이도 벌써…’라는 생각이 들 무렵,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신중하게 되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희망과 목표로 가득 찼던 인생 초반기와는 달리 이쯤 되면 자녀 양육과 부모 부양, 그리고 책임져야 할 사회적 지위 등 현실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는 육체적 쇠퇴가 따른다. 

그러나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이며, 또 자기 스스로 먹을 수 있고, 배설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 소멸의 길을 영혼 완성의 길로 바꾸며 나아가게 된다. 

인생의 완성이 뒤늦게 찾아오게 되는 것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고 말할 수 있도록, 그 과정을 차분하게 음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기억만으로도 눈이 매워지는 게 사랑이다. 

누군가를 떠나는 순간, 본능처럼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면, 어느 누가 뭐라 해도 그건 분명 사랑이다. 

하루라도 좋으니 사랑할 일이다. 

사랑해 볼 일이다. 

사랑에 늦은 때라는 건 없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많은 관계라도 상대가 원한다면, 즉 상대적인 관계라면 그 어떤 경우든 사랑하라고 하고 싶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늘 뒤에 있는지도 모른다. 

먼 훗날은 그저 멀리 있는 줄만 알았다. 

근데 벌써 여기까지 와버렸지 않은가.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분노한다. 

사랑도 그중 하나다. 

나이가 들어 몸이 쇠잔해졌어도 식욕이나 수면욕보다 줄어들지 않는 욕구가 남자의 성욕이다. 

김정운의 책「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중 ‘하얀 침대 시트에서는 누구나 잘할 수 있다’라는 소제목이 있다. 

무엇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리라 믿는다. 

세상의 모든 남자는 목욕탕에서 옷 입을 때, 팬티를 ‘가장 먼저 입는 남자’와 ‘가장 나중에 입는 남자’ 로 나뉜다는 말도 있다. 

고속도로 화장실 남자 소변기 앞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고 한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남자에게 성은 목숨만큼 중요한 요인이다. 

노인도 남자다. 

그러니 노인의 나라에도 사랑은 있다. 

나이 들어도 젊은 여성을 탐하고 연정을 품는 건,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이치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대한 초조감, 또는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지만 허물어져가는 육체의 남성성이 그에 미치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부작용인 것이다.  

황혼은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젊은 여인으로 향하는 노인의 사랑이 무턱대고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빗대어 <노인을 위한 사랑은 있다>라고 말한다. 

  

토마스 만의 소설 「베니스에서 죽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 중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래시계가 있었지. 

허리가 너무 작아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을 처음엔 느끼지 못하지.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건 오로지 마지막 모래가 떨어질 때뿐이야. 

그런데 그때는 이미 늦었어. 그땐 생각할 시간이 너무 적거든” 



나는 생각한다. 

오늘이 가장 젊다고…. 

내일보다 오늘이 젊고, 한 달 후 보다, 1년, 10년 후 보다 오늘이 젊다. 

10년만 젊었더라면 … 할 텐데, 라고 생각할 그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러니 가장 젊은 오늘,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할 일이다. 

그럴 수 있을 때 노년이 갖는 ‘어떤 간절한’이나 ‘쓸쓸’이 덜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 

오늘이 가장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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