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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Feb 06. 2017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상과 김환기, 두 천재를 사랑한 여자




1933년 3월 황해도 배천에 두 사내가 나타났다. 마른 덤불 위에 녹지 않은 눈이 메주에 핀 곰팡이처럼 드문드문 허옇게 남아있는 이른 봄이다. 집집의 굴뚝에선 뽀얀 연기가 머리 풀듯 하늘로 올라가고 청솔가지 타는 냄새와 밥 짓는 내음이 노을빛과 버무려져 마당 가득 내려앉고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자치기, 사방치기 놀이에 밥 때도 잊은 듯 까르륵거리며 놀던 아이들은 갑자기 기이한 풍모의 사내 둘이 나타나자 그 뒤를 졸졸 따라가기 시작했다.


  뻘쭘하게 큰 키에 까치둥지처럼 제멋대로 헝클어진 고수머리의 남자는 백구두를 신고 나비넥타이에 밤색 모직 코트를 입은 게 제법 멋을 낸 모양새였지만 지팡이를 휘휘 돌리며 연신 키득거리는 게 제정신이 아닌듯했다. 동행한 남자는 검은색 중산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물었는데 옆의 남자 반밖에 되지 않는 곱사등이로 동그란 안경테 너머로 뵈는 눈동자에선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동네 아이들은 범상치 않은 그들이 필경 경성에서 온 곡마단 패일 거라 착각한 것이다. 외양에서 느껴지는 바와 다르게 두 남자가 배천을 찾은 것은 온천 요양이 목적이었다. 보이는 대로라면 곱사등이가 요양할 사람이요, 키 큰 쪽이 스폰서 같지만 실상 환자는 키가 큰 쪽이요, 물주는 곱사등이였다. 두 사람은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937)과 구본웅(具本雄 서양화가, 1906∼1953).


                           이상                                                                                                        이상의 자화상


                                   구본웅                                구본웅의 친구                                                           



이상은 강릉 김씨, 이름은 해경(海卿)으로 1910년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인쇄소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손가락이 세 개나  잘리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상은 네 살 되던 해, 총독부 상공과 기술관으로 있던 큰댁에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백부는 어린 해경에게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부성애를 베풀어주었다.

  이상은 어려서부터 그림 솜씨가 뛰어났고  화가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있던 보성고보에 다니면서부터 그 꽃을 피웠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는 마치 신들린 듯 눈빛이 형형했다. 교내 미술 전람회에서 「풍경」으로 1등 상을 차지한 건 물론이요, 몇 해 뒤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자화상」을 내놓아 입선하기도 했다.


의탁하고 있던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해경은 현미빵을 팔며 고학으로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경성 고등 공업학교(서울공대의 전신)에 들어갔다. 환쟁이는 평생 가난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지만 기술이 있으면 배는 곯지 않는다는 백부의 분부 때문이었다. 「오감도」,「삼차각 설계도」등 건축과 깊은 관련을 지닌 표제와, 아라비아 숫자와 기하학 기호 등을 시어로 차용하고 수식보다 난해한 시들을 쓰게 된 것은 바로 이 고등 공업학교를 다녔던  영향이다. 성적이 뛰어났던 이상은 졸업 후 조선총독부 건축과에 바로 취직, 1932년 <건축무한 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했다. 1933년, 폐결핵 환자인 이상은 심한 각혈로 인해 건축기사 직을 사임했다. 23년 만에 백부 댁에서 나와 본가로 들어갔으나 불과 보름 만에 집을 나와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상과 구본웅은 어릴 때부터 이웃에 살던 보통학교 동기동창이다. 구본웅은 글씨를 잘 썼고 이상은 말을 잘했다. 구본웅은 이상보다 네 살이 많지만 불구인 데다 허약하기 까지 해서 학교를 다니다 말다 하는 바람에 이상과 같은 학년이 되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꼽추인 구본웅을 놀리며 따돌렸지만 단 한 사람,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인 이가 있었으니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이상이었다. 당시 동급생 중에는 구본웅보다도 나이가 더 많은 학생들도 있었으므로 가장 어린 이상은 적잖은 급우들에게 존대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졸업 후에도 이상은 구본웅에게 계속 존댓말을 쓰며 깍듯이 예우했다.


3월 배천의 밤,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꽃눈, 잎눈을 툭툭 건드리며 윙윙거렸다. 그 바람결에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구나 녹수야 흘러 내려갈망정 청산이나 변할 리가 있겄느냐’ 하는 육자배기 가락이 구성지게 들려왔다. 썩 좋은 창은 아니지만 썰렁한 여관방에 덩그마니 누워 있던 두 사내를 흥분시키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노래의 주인공은 붉은 비단 같은 이름의 ‘금홍’이라는 기생, 명자나무 꽃 같이 작고 붉은 입술과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가르마를 따라 새초롬하게 내려간 게 쌍꺼풀은 없지만 오목조목 귀여운 얼굴이었다. 빛바랜 연초록

치마에 낡았지만 자주 빛이 도는 옥잠화 색 비단 저고리를 걸쳤는데 체구에 비해 불룩한 가슴은 당장이라도 채 안고 싶을 정도로 요염한 여인이다. 이미 이상은 윤리와 도덕을 초탈한 듯 기이한 행동과 자학에 병든 몸을 내맡기고 있는 터였다. 금홍을 본 순간 쾌락의 안테나에 붉은 파장이 심하게 흔들렸다. 구본웅 역시 마음이 동했지만 그날 밤 이상이 금홍이를 차지하리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게 금홍은 불온한 바람처럼 이상의 곁으로 다가왔다.


배천의 이상과 금홍


이상은 덧없는 삶을 아예 찢어버리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각혈 약은 집어치우고 밤낮 술에 취하고, 금홍을 취하는 일에 골몰했다. 남달리 성 충동이 시시때때로 일어난다는 폐결핵의 증세가 그에게도 나타났음이다. 하지만 그는 매번 금홍을 잔뜩 열뜨게 만들어놓고서는 빠르게 그치곤 했다. 그게 미안했던지 이상은 친구에게 금홍을 빌려주어 동침을 강권하거나 남녀가 합법적으로 합궁할 수 있는 독탕에 들여보내는 기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달 뒹굴다가 서울로 돌아온 이상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금홍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당장이라도 인력거를 타고 장안에 내로라하는 멋쟁이 손님들에게 불려 다닐 것만 같은 상상에 그저 신이 난 금홍은 호들갑을 떨면서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나 현실은 거리가 멀었다. 그녀가 일류 요릿집이나 요정이 아닌 시골 온천의 술집 기생이었음을 감안할 때, 권번 출신의 전통 기생들과 견주면 뒤져도 한참 뒤졌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금홍, 구본웅이 그린 금홍의 초상화이다.




이상은 집에서 훔쳐온 집문서를 잡혀 다방 <제비>을 개업하고 금홍을 얼굴마담으로 앉혔다.

다방 뒷골목의 다 쓰러져가는 초가의 방 한 칸을 얻어 금홍이와 살림도 차렸다. 제비는 당대의 일급 문인이던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정인택, 윤태영 등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처음엔 차가 제법 잘 팔렸다. 그러나 이상은 다방 운영엔 흥미가 없는 듯했다. 일명 ‘도스토예프스키의 방’이라고 불리던 다방 뒷방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거나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금홍을 서울로 불러온 후에도 그의 기이한 여성 편력은 그치지 않았다. 한꺼번에 여럿의 창녀를 사서 한 방에 들여놓고 난음을 벌이기도 했다.




다방이 무료하고 싫증이 나는 건 금홍도 마찬가지였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시인이요, 화가였으니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도통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손님들 대부분이 서방 친구들인지라 진한 농지거리도 한 번 맘 편히 할 수 없고 뒷방에서 술을 팔아보았지만 거의 가난뱅이 글쟁이나 환쟁이인지라 매상에는 한계가 있었다. 금홍은 단세포 같은 여자였다. 배가 고파도 좀처럼 밥 짓는 법이 없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겨우 이부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설렁탕 한 그릇 시켜 먹고 외상이나 달아 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우두커니 다방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거나, 루주를 바르고 눈웃음을 흘리며 싸돌아다니는 게 일이었다. 바느질을 할 줄 모르는지 치맛단이나 버선 뒤꿈치가 늘 터져 있었지만 그 또한 개의치 않았다. 이상은 이상대로 금홍이는 금홍이대로 늘 어디론가 쏘다녔다. 다방은 차가 팔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송충이는 솔잎 먹고살아야 하고, 갈매기는 바닷가에서 놀아야 하는 법, 수입도 변변치 않거니와 서방이라는 작자는 남자 구실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빌빌 거리는 게 마땅치 않았던 금홍은 다방을 집어치고 종로에 있는 술집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 무렵은 손님과의 외박이 술집 아가씨들에겐 2차 불변의 법칙처럼 여겨지던 시절이다. 하루가 멀게 외박을 하던 금홍은 아예 대놓고 매춘을 시작했다. 이상은 그런 금홍을 멀거니 지켜볼 뿐 아무 말도 안 했다. 심지어 금홍이 자신의 거처에서 손님과 뒹굴고 있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말없이 친구 집으로 가서 자기 일쑤였다. 그런 나날이 이어졌지만 이상은 금홍이 요구하는 사랑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에로틱한 프리즘을 지닌 금홍은 아편처럼 위험한 여자였다.


친구들은 이상이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금홍의 외도를 귀띔해주었다. 그러나 이상은 한 술 더 떠서 금홍이 외간 남자와 벌이고 있는 육체의 향연을 그들로 하여금 훔쳐보게 해주었다. 이상의 친구들은 관음증 환자처럼 금홍이 적나라하게 펼치는 라이브 몸짓에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운 채 하악하악 숨도 쉬지 못했다. 이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정신병자처럼 낄낄거렸다. 친구들은 그런 그를 개탄하며 나무랐다. 그러나 이상은 분열된 자의식과 참담함에 빠져 술을 마실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상은 여자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여자에게 얽매이는 것도 싫어했다. 다만 여자의 몸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음계의 파장을 느끼곤 한 게 아닐까 한다. 그는 여자를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자에게 속을 일도 없었다.


금홍은 질펀한 탐미주의로 경성의 밤거리를 온몸으로 감내하는 집시가 되었다. 금홍에게 제비 다방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신파가 아니었다. 매춘의 현실에 감미료 같은 약간의 에로스를 비벼 먹은 2년일 뿐이었다. 가난에 찌들고 폐결핵으로 인해 성적 불구가 되다시피 한 이상은 금홍이 외간 남자들과 벌이는 분탕질을 계속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병신 같은 ××야! 너 때문에 내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잖아?”

 

금홍은 악다구니를 쓰면서 이상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그녀의 눈빛은 얼음장 같이 차갑고 승냥이처럼 무서웠다. 우박 쏟아붓듯 독설을 퍼부은 금홍은 뒤가 터지고 때가 꼬질꼬질한 버선 짝을 허물처럼 벗어던지곤 돌아오지 않는 바람처럼 이상의 곁을 휑하니 떠나버렸다.


1935년 가을, 이상은 제비 다방의 문을 닫고 인사동의 카페 <쓰루>를 인수했다. 쓰루에는 권순옥이라는 여급이 있었는데 그녀의 외모에서 풍기는 지적인 이미지는 은근히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고리키 전집을 독파하였을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권순옥이 이상에게 말했다.

  

  “상이 오빠는 꼭 D. H. 로렌스의 복제품 같아요”

  

사실 이상은 로렌스와 흡사한 점이 없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 근사한 고수머리, 즉흥적이며 무절제한 생활, 천재적인 작품세계가 그랬다. 그런 권순옥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이상의 친구 정인택이다. 연애 전과가 전무했던 정인택은 권순옥에게 푹 빠져 거의 매일 카페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신문사 월급으로는 턱도 없는 지라 하숙비 밀리는 건 당연했고 여기저기서 돈 꾸기에 급급했지만 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 되곤 했다. 그래도 이 친구 저 친구 카페로 데리고 가서 권순옥이 제 애인이라고 자랑하는 걸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권순옥은 이미 이상이 점찍어 놓은 여자였으며 그녀 역시 이상을 좋아하고 있었다.


정인택이 갖은 공을 들였지만 권순옥은 마음은커녕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낙심한 정인택이 짐짓 음독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권순옥은 떠나 버린 금홍의 환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보다 자신에게 목숨을 걸며 사랑을 증명한 정인택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상은 자살 쇼를 벌인 정인택에게 권순옥을 죽 쒀서 개 주듯 넘겨버렸다. 사실 이상은 된서리 같은 권순옥보다 무서리처럼 녹아내리던 금홍의 암내가 그리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적인 이미지로 목에 힘을 주는 권순옥 보다 한 장의 춘화처럼 가랑이 사이로 관음을 느끼게 하던 금홍이가 훨씬 좋았다. 권순옥이 정인택과 결혼하던 날, 이상은 금홍의 때 묻은 버선을 껴안고 불면의 밤을 보냈다.


재주 많고 머리 좋은 이상이 반거충이로 빈둥거리는 것을 딱하게 여긴 구본웅은 그에게 아버지가 경영하는 출판사의 교정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광화문 쪽에 있던 창문사는 제법 큰 출판사였다. 바로 그즈음 이상은 인생역전의 마지막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경기여고를 졸업한 후 동경을 거쳐 아테네와 프랑스를 여행하고 돌아와 이화 여전 영문과에 입학한 신여성이었다. 엄청난 다독에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으며 화술이 뛰어났던 그녀는 오빠가 경영하는 다방에 심심찮게 들르곤 했다. 레지가 가져다주는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가끔씩 용돈을 얻어 돌아가곤 했다. 이 아름답고 고고한 자유 연애론자 신여성은  변동림(1916~2004).


변동림


구본웅(1906-1953)이 네 살 때 열아홉 살 처녀가 계모로 들어왔다. 소설을 좋아한 그녀는 구운몽, 옥루몽, 삼국지 등은 거의 줄줄 외울 정도로 탐독했다. 게다가 뛰어난 기억력과 화술로 소설 구절들을 적절히 인용하는 재주가 탁월해서 주변 사람들을 탄복시키곤 했다. 그런 처자가 어린 나이에 애 딸린 홀아비에게 재취로 들어가기로 맘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때 거리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 보탬이 되려면 부잣집 남자에게 시집가는 게 맏딸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변동숙이다. 아들을 낳은 지 4개월에 만에 죽은 전처 아들이 꼽추라는 건 알지 못했다. 생모가 죽자 구본웅은 동네 아낙들에게 동냥젖을 얻어먹으며 자랐다. 어느 날 하녀가, 업고 있던 두 살 배기 구본웅을 댓돌 위에서 떨어뜨리는 사고를 당해 척추를 다친 것이 그만 꼽추가 된 것이다.


용모 반듯하고 화통한 성격의 변동숙은 남편은 물론 전처의 아들인 구본웅도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다. 아버지 변국선은 큰 딸 변동숙을 재취로 시집보낸 후 사위가 주는 돈으로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다. 그런 변국선이 몇 년 후, 첩을 들여 1남 2녀의 자식을 두게 되었다. 그중 막내딸이 바로 변동림이다. 변국선은 박식한 데다가 6척 장신에 풍채 좋고 인물까지 훤했는데 보헤미안 기질이 있었다. 가족의 생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핏하면 바랑을 지고 입산하여 여기저기 절에서 몇 달씩 지내고 돌아오곤 했다. 변동숙의 친정아버지가 첩을 들인 것은 남편 보기 민망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이복동생인 변동림의 존재는 당연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계로 말미암아 변동림은 구본웅의 이모가 되는 셈이다.   

  

박하 분처럼 새하얀 피부, 오똑한 콧날에 앙 다문 입술, 넓은 이마에 동글동글한 눈, 변동림은 중키에 아담한 체격이지만 귀티가 나면서 야무지고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인상이었다. 감색 스커트 투피스에 구두를 신은 모습에서 지적인 세련미가 넘쳐흘렀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그녀에게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는 책을 보며 자유 연애론자답게 여러 남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것이 행복할 뿐이었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변동림이 다방에 앉아 책을 보는데 오빠가 다가와 앉았다.


“이상이 앓고 있대.”

변동림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 친구가 병이 났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널 좀 소개해 달래.”

변동림은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두 번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변동림을 정식으로 소개받던 날, 이상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말끔히 면도한 피부는 파르스름할 정도로 창백했으며 봉두난발이던 헤어스타일 역시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딴따라처럼 계절 없이 신고 다니던 백구두는 온데간데없이 밤색 두루마기를 젊잖게 차려 입고 나타난 것이다. 주위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놀라고 신기하여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금홍이가 떠난 후 다방에 죽치고 앉아 온갖 위트와 독설로 좌중을 압도하며 방황하던 이상이 변동림과 만나는 자리에선 도무지 그 답지 않은 복색과 행동을 보인 것이다. 변동림과 마주 앉은 이상은 그 특유의 호기와 자신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럼 많은 숫총각처럼 각설탕만 만지작거렸다. 변동림은 그 모습이 참으로 생경하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이상이 싫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날마다 만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이상은 변동림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어디쯤이나 동림의 집 부근에서 그녀를 기다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변동림은 그를 따라 청량리 밖 갈대숲의 끝까지 걷곤 했다. 달밤이면 달이 밝았고 달이 지면 별이 환했다. 밤과 밤을 걷다가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때때로 크게 웃기도 했다.

  “동림아, 우리 같이 죽을까? 아님 어디 먼 데로 도망쳐서 같이 살까?”

사랑의 고백이었다. 동림은 오만한 지성을 자존심처럼 지니고 있으나 휘발유 같은 여자였다. 사랑의 본능 같은 건 느끼지 못했지만 그저 이상을 따라다니는 일이 기분 좋고 재미있었다. 마침내 변동림이 집을 나와 그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갔다. 가출한 그녀가 챙겨 온  가방 속에는 옷이나 화장품 따윈 들어있지 않았다. 몇 권의 책과 외국어 사전이 달랑 들어있을 뿐이었다.
   


작은 마루와 부엌이 딸린 방 한 칸이 그들의 보금자리였다. 대문을 열면 낭창거리는 버드나무 가지 아래로 개울이 흐르고 그 너머엔 온통 초록의 동산이 마당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상이 동림을 위해 준비한 것은 이불 한 채와 부엌살림 몇 가지였다. 소꿉 살이 같은 살림을 하며 ‘19금’ 영화 같은 밀월은 석 달 밤낮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여자는 밥을 하고 남자는 반찬을 만들었다. 두 사람이 벌이는 몸의 잔치는 입에 익숙한 음식의 촉감처럼 이어졌다. 그 무렵 이상은 <오감도>와 <날개>를 발표했고 두 사람은 영문학과 러시아 문학, 베토벤과 모차르트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두 사람에 대한 스캔들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변동림은 이상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가장 심한 반대를 한 사람은 이복 언니 변동숙이었다.

  “네가 부족한 게 뭐냐? 하는 일도 변변찮지, 여섯 살이나 많지, 게다가 폐병환자라          면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건지 원…”

언니의 결사반대에 동림은 응수했다.  

  “폐병환자면 어때? 사람만 좋으면 된 거 아냐?”

할 뿐 모든 걸 개의치 않았다. 사실 동림은 이상과 함께 지내는 몇 달 동안 그가 각혈은커녕 기침 한 번 하는 것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상이 결핵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의 이목과 소문이 창피했던 이상과 동림의 어머니는 서둘러 혼인을 준비했다. 초여름 햇살이 따갑던 1936년 6월, 두 사람은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단칸 셋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방과 카페의 연이은 실패로 빈털터리가 된 이상은 병세가 깊어져서 누워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변동림은 남편의 약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바에 나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카페에 여급으로 나갔다.


기대와는 달리 실상은 냉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자존심만 내세우는 무능한 남편에게 단 한 번의 싫은 소리도 하지 않고 지극 정성으로 보필했다. 그러나 변동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궂은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꺼성한 몰골에 허접한 가방 하나 달랑 든 이상은 아내와 구본웅의 배웅을 받으며 동경으로 떠나버렸다.

예술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예술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일반 사람의 영역은 아니다. 현실과의 괴리에서 언제나 붕 떠있는 듯한 기질과 특이한 마인드를 무기 삼아 살아가는 예술가들은 좋게 보면 로망이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일은 심신의 출혈을 동반하는 일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상에게서는 두 달 동안 한 통의 편지도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소식을 기다리는데 동경 경찰서 검인이 찍힌 노란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반일 조선인 지식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한 달 넘게 구속되었던 이상이 위독하니 급히 일본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동림은 열두 시간 기차를 타고, 여덟 시간 연락선을 더 탄 다음, 다시 스물네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나서야 동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다다미가 깔린 입원실에 누워 있었다. 인기척에 눈을 뜬 이상이 애써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동림이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잡으니 그는 안도하듯 다시 눈을 감았다. 이상의 눈가와 입가는 거뭇거뭇했으며 뼈마디만 앙상한 손가락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해 보였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죽어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상은 다시 눈을 뜨려다가 감았다.

  

  “먹고 싶은 게 뭐예요?”

  “멜론이 먹고 싶어”

  

쇳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간신히 들렸다. 멜론을 사다가 그의 입에 넣어주었지만 삼키지 못했다. 언뜻 미소 짓는 듯한 표정이 보였을 뿐 이미 눈은 감긴 채였다. 동림은 이상의 손을 잡고 그가 가끔씩 눈 뜨는 것을 지켜보며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그의 몸이 점점 싸늘해지고 있었다. ‘멜론이 먹고 싶어’ 그게 이상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렇게 천재는 짧으나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1937년 4월 17일) 동림은 이상의 유골을 안고 서울로 돌아와 미아리 묘지에 안장했다. 스물한 살에 과부가 된 변동림은 그 후, 이상의 묘지를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간간히 수필이나 소설을 잡지에 기고하며 지내던 변동림은 친분이 두터웠던 노리다케 가츠오(1919∼1990)의 주선으로 총독부에 취직하게 되었다. 백석과 이중섭의 절친이었던 노리다케는 변동림을 아끼는 시인이었다. 그는 변동림에게 소개하여주고 싶은 남자가 있다는 말을 몇 차례 전했다. 그때마다 변동림은 귓등으로 흘려들었고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좀처럼 대면하질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의 집으로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갔을 때 바로 그곳에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남쪽 어느 섬에 살고 있다는 남자는 멀뚱하게 큰 키에 뿔테 안경을 쓰고 마른 장작 같은 어깨에 걸친 양복 재킷이 얻어 입은 양 헐렁하여 촌 놈 티가 물씬 풍겼다. 남자는 말수가 적었다. 식사를 하고 동행한 이들과 더불어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을 뿐 두 사람이 따로 나눈 이야기는 거의 없이 헤어졌다.

  

그렇게 남자에 대한 기억이랄 것도 없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변동림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화가가 글을 잘 쓰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정이 넘치면서 마음을 울리는 다감한 남자였다. 편지글 대부분은 독특하고도 간결한 문장으로 써진 한 편의 시 같았다.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아름답고 희떠운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여러 통의 편지를 받는 동안 변동림은 가끔 한 번씩 답장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글의 힘은 묘한 거라서 두 사람은 편지 속에서 점점 가까워져 갔다. 가득한 그리움으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엔 오랜 시간 사귄 사람들처럼 허물없이 정을 나누게 되었다. 바로 그 화가가 오늘날 경매의 최고가를 갱신하는 대화가인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이다.

  

김환기 자화상


김환기는 전남 기좌도에서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난 외동아들이다. 부친은 천석을 거두는 대지주였는데 수준급의 가야금 솜씨에 엽총으로 사냥을 즐길 정도로 풍류를 아는 멋쟁이였다. 김환기는 남도의 조그만 섬마을에서 자란 그는 푸른 바다와 깊고 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소년 시절을 보냈다.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바이올린을 켰으며 키가 육 척(180cm)이라 특히 농구를 잘 했다. 그러나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중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넉넉한 재산과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부친은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 중학교에 다니게 했다. 이어 도쿄 일본 대학 예술학원 미술부를 다니던 김환기는 술을 즐겨 마셨지만 남이 사는 술은 잘 마시지 않는 성품이었다. 그림은 물론이요, 글 잘 쓰지, 인물 훤하지, 악기도 연주하는 등 다방면에 뛰어난 그의 주변엔 늘 여자들이 많았다.


부모님은 독자였던 아들의 혼인을 서둘렀다. 집안에서 맺어준 여인과 맘에 없는 결혼을 하고 초야를 보내게 된 그의 나이 겨우 열아홉이었다. 일찍이 서울과 동경에서 신여성들을 보아왔던 터라 촌부였던 부인이 눈에 차지도 않을뿐더러 정 또한 없었다. 졸업을 하고 1937년에 귀국했지만 독자였던 김환기에게 고대하던 아들은 태어나지 않고 딸만 내리 셋을 두었다. 어머니는 대가 끊어질까 봐 근심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그 무렵 김환기의 아버지는 소작인들의 빚만 가득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김환기는 미련 없이 아내와 이혼했다. 조혼과 이혼, 딸 삼 형제를 둔 홀아비에 상속받은 유산도 변변치 않던 그는 변동림에게 자신을 내세울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변동림은 그런 사실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높은 안목으로 조선의 목공과 백자의 참맛을 아는 김환기가 그저 좋았다. 그의 껑청 거리는 걸음새나 높은 웃음소리와 억양조차 멋지게 느껴졌다. 변동림은 김환기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역시 변동숙의 반대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전실 자식이 있는 집으로 개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는 일이라며 동림의 머리채를 잡고 뒤흔들며 적극 반대했다. 이에 변동림은 이렇게 응수했다.


  “내가 낳아야만 자식인가? 열이면 어때? 내 그 아이들 데려다가 보란 듯이 교육시킬 테니 두고 보라고….”


  그녀는 변씨 가문과 인연을 끊겠다는 선언을 하곤 집을 나와 김환기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 후 변동숙은 죽을 때까지 변동림을 상면하지 않았다.


  “내게 향안이라는 당신의 아호를 줘요. 변동림이 아닌 김향안으로 평생 당신을 위해 살겠어요.”


물방울 다이아몬드도 아니요, 평수 넓은 아파트도 아니었다. 김환기의 아호, 그것이 변동림이 재혼할 때 내건 조건이다. 1944년, 김환기는 변동림이라는 이름 대신 김향안이라는 이름의 아내를 맞아들였다. 김향안은 과부가 된 지 7년 만에 면사포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당당하게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 나이 28세였다. 이후 두 사람은 남부러울 것 없는 금슬을 자랑하며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서울미대에 재직하던 김환기는 퇴근 후에 곧장 집으로 오는 일이 드물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돌아오곤 했다. 부잣집 외동아들로 어려움 없이 성장한 김환기는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해야 직성이 풀렸다. 고향 땅을 팔아서 백자 항아리나 고미술품들을 사 모을지언정 가계를 돌보기는커녕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향안은 온종일 노모와 아이들 뒷바라지를 즐겁게 해 나갔다. 그러나 남편의 월급은 여섯 식구가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옹색한 살림살이가 이어졌다. 쌀을 꾸러 다니거나 김환기의 담뱃값을 꾸러 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불편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옥동 같이 추운 날이었다. 땔감이 떨어졌는데 나무 드릴 돈이 없었다. 노모와 아이들을 위해서는 뜰 안의 감나무라도 베어야만 했다. 어줍은 솜씨로 나무를 베고 도끼질도 했다. 며칠간은 불을 지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떨어지도록 남편은 아는지 모르는지 땔 나무를 들여 주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다 못해 남편의 그림이 꽉 들어차 있는 골방 문을 열었다. 물감 냄새가 훅 끼쳐왔다. 몇 해 동안 골방 신세를 지고 있는 그림틀을 모두 떼어 부수면 일주일은 족히 땔 것 같았다. 쥐가 쪼아댈까, 장마 때면 탕이 날까 거풍 하고 먼지 털며 갖은 정성을 기울이며 보관해온 귀한 그림들이었다. 언제고 그림들이 팔려 나갈 좋은 날이 오리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김향안은 그림틀을 떼 내어 땔나무로 쓰기로 했다. 김환기는 꿈을 먹는 예술가였지만 그의 아내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겨내는 강한 어머니였으며 똑 소리 나는 아내였다. 그 당시 김환기는 김향안에게서 느끼는 침묵의 불안감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내는 내가 술을 마시든 게으름을 피우든 아무 소리가 없다.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데도  아무 소리를 안 한다. 먹을 것이 있든 없든 항상 명랑하고 깨끗하다. 세상이 귀찮고 그림을 못 그릴 때면 나는 부지중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그럴 때면 찻값을 주어 내보내든지 술을 사들고 와서 한 잔 권할 때가 있다. 나는 아내에게 하숙하고 있는 셈이다.'


김향안은 낙천가였다. 도무지 절박한 상태를 모르는 것 같았다. 입을 것이 없어도, 아침거리가 없어도, 천연덕스럽게 듯 잠자리에 들었다. 또한 그녀는 문학은 물론 다양한 예술 장르에 관심과 소양이 깊었다. 김환기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아는 것보다 김향안이 피카소를 이해하는 정도가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그런 아내가 밉지 않았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김환기가 말했다.

  “나 언젠가 파리에 가고 싶어, 가게 되면 당신도 꼭 데려갈 거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김향안은 불어 공부를 시작했다. 피난 보따리에 불어 사전을 챙겨갈 정도로 열심이었다. 김환기는 얼기설기 산만한 성격인데 비해 김향안은 치밀했다. 김환기는 불처럼 욱하는 성격인데 김향안은 얼음처럼 냉정했다. 두 사람이 오순도순 강아지처럼 살았던 이유는 두 사람의 성격이 한쌍의 볼트와 너트처럼 아귀가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김환기는 우리나라의 백자 항아리를 병적으로 좋아했다. 우리의 정신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항아리에 심취한 것이다. 항아리를 사들이느라 가산을 탕진하다시피 하고 항아리 그림을 그리고, 항아리 시를 쓰고, 잡담의 주제까지도 항아리일 정도로 소문난 백자 애호가였다. 그러나 김향안은 한 마디 싫은 내색 없이 그가 좋아하면 함께 좋아했다. 그러나 부산에서의 3년 피난살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자 사랑하는 항아리들은 거의 모두 박살나 있었다. 그 후 김환기는 항아리를 수집하지 않았다. 어느 날 술이 얼근하게 취해 들어온 김환기가 말했다.

  “대체 내 예술이 어디쯤 위치한 건지 알 수가 없어. 그걸 알고 싶어.”

  “그럼 외국엘 나가 봐요!”

  “어떻게 가야 하지?”

  “내가 먼저 가서 기반을 준비해 놓을 테니 당신은 그때 오세요.”

다음 날, 김향안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당장 프랑스 영사관을 찾아갔다. 파리에 가고 싶다고 하니 여권을 만들기도 전에 비자부터 내주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집을 팔았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한 김향안은 파리로 떠났다. 김환기가 이화여대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아내를 따라 파리로 건너간 것은 다음 해인 1956년이다.

남편보다 먼저 파리로 떠난 김향안은 불어와 미술사를 공부하며 틈틈이 발품을 팔아 남편의 아틀리에까지 마련해 놓은 터였다. 화가들이나 화상들과 친분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갤러리에 작품을 가지고 다니면서 전시회를 잡기도 하고, 김환기의 통역도 하며 만능 내조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 시작했다.


달과 항아리



돈 한 푼 없이 파리로 건너간 김환기였지만 일급 갤러리가 아니면 전시를 하지 않겠다는 자긍심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 파리의 생활고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김향안은 남편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그러면서 김향안 자신도 소르본느 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전공하는 등 대단한 학구열을 보였다. 파리에서 보낸 3년 동안 파리, 니스, 브뤼셀, 피렌체 단테의 집, 모나코 등에서 5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파리에 체류하는 3년 동안, 불행한 일도 많았다. 야심 차게 준비한 7월에 오픈한 전시는 바캉스 시즌과 겹치는 바람에 파리만 날리기도 했고 부고를 뒤늦게 전해 듣는 바람에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르기도 했다.



1959년 귀국한 김환기는 홍익대학교 미대 교수를 거쳐 미술대학장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교수나 행정 일 같은 건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하여 명예상을 수상한 걸 계기로 1964년 두 사람은 다시 재산을 정리하여 뉴욕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록펠러 재단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는가 싶었다. 그러나 1년 만에 지원이 끝나고 또다시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변동림은 백화점에서의 판매원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김환기의 뉴욕시대는 회화가 정점의 경지에 올라 완전한 추상으로 전환된 시기이기도 하다. 점화로 대표되는 김환기의 뉴욕 시기 그림들은 가장 원초적인 조형 요소인 점에 대한 미적 탐구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 탐구는 단순히 형식적인 미에 대한 반영이 아니다. 김환기가 과거에 몰두했던 한국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 점화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는 그의 작품 세계 형성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0년 대 부터 시작된 해외 생활은 잠깐 한국에 들어온 몇 년을 제외하고 죽을 때까지 지속되며 죽기 직전까지 뉴욕에서 작품을 제작하며 노마드적인 삶을 살았다. 그 당시 쓴 김환기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술을 마셔야 천재가 된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피난 열차


큰 캔버스에 점을 찍고 그 속에 바다를 그려 넣었다. 김환기는 하루 16시간씩 작업하면서 출렁이는 파도와 별빛과 달빛을 그림 속에 투사시켰다.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오묘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향 바다와 친구를 생각하는 매우 동양적인 사고와 우주관을 반영했다. 꺼지지 않은 야경도 될 수 있고, 작업실에서 떠올린 고향 바다, 또는 보고 싶은 친구들의 얼굴일 수도 있다. 일일이 점을 찍은 후 다시 네모난 테두리를 그어 공간을 만드는 작업은 흡사 고승의 수련을 연상시킨다. 점은 각각의 세포 인지도 모른다. 세포는 모두 다른 모양을 하고 있고 어떤 것은 갈라진 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만날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각자의 세포 안에, 혹은 밖에 다른 주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술에 대한 고뇌와 고향에 대한 향수가 만들어 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1970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 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은, 김환기의 절친한 벗이었던 김광섭의 시(詩) <저녁에>의 한 구절에서 따 온 것이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4년 7월 7일, 김환기는 목 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 뉴욕 유나이티드 병원에 입원했다. 7월 12일 1시, 수술을 앞둔 김환기의 침대엔 <Nothing by Mouth:금식>라는 표식이 붙여졌다. 김환기는 병상에서 ‘어서 내일이 오기를 기다린다’ 고 일기에 썼다. 그게 그의 마지막 일기가 될지 아무도 몰랐다. 7월 13일 수술을 마친 김환기가 덜덜 떨며 괴로워했다. 김향안은 그 모습을 불쌍하게 지켜보았지만 며칠 후면 회복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열흘 후 7월 24일,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던 김환기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 불과 예순둘이었고 김향안과 결혼한 지 꼭 30년이 되는 해였다. 변동림, 아니 김향안은 또다시 두 번째 남편의 임종을 지켜봐야만 했다. 1973년 그가 작고하기 1년 전에 쓴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란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라.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남편이 작고한 후 30년 동안 김향안은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자신의 배우자였던 두 천재 예술가의 예술혼을 기리며 작품 세계를 정리하는 일을 신념처럼 펼쳤다. 첫 째, 그녀가 가진 힘과 아낌없는 지원을 발판으로 보성고등학교 교정에는 이상의 기념비와 문학비가 세워졌다. 둘째, 김환기 사후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글을 쓰며 해외 비평가들의 평들을 국내에 소개했다. 그녀는 김환기의 미술세계를 이끌고 완결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화가 생전에 작품 활동에 영적 감흥을 불러일으킨 예술의 반려자였으며, 화가 사후엔 유작과 유품을 정리해 종로구 부암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미술관인 환기미술관을 건립했다. 다음은 김향안이 환기 미술관을 건립하면서 남긴 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집을 지었어도 미술관에 담긴 내용이 빈약하여 관람자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할 때, 미술관은 아무것도 아니다. 미술관을 돌아보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크고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예술 작품이 있어야 한다. 세계 방방곡곡의 미술관을 답사하고 온 사람들이 세계의 미술관은 많으나 좋은 미술관은 극소수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금세기에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미술관들이 내용면에서 명실공히 아름다운 미술관이 되려면 앞으로도 요원한 시일이 요구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환기 미술관은 진통의 시기를 합치면 20년이 충분히 걸린 거다. 미술관의 문을 열면서 이제부터 익어가야 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다양한 프로제를 구상한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역사와 병행할 것이며 민족과 인류의 운명에 따를 것이다. 또 오늘의 미술관은 살아서 움직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요구하는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 시각적인 것, 음악적인 것 그리고 시가 읊어져야 한다. 최근에 읽은 어느 비평가의 말이 생각난다. 어느 작가의 작품을 가르쳐, ‘푸르되 풍경이 아니고 파랗지만 하늘이 아니고 노랗지만 태양이 아닌 빛깔과 마티스의 종이 오림이 아닌 포름을 토왈에 유채로 그린 새로운 그림이다.’라고 했다. 나도 그런 새로운 미술관을 만들고 싶고, 만들 것이다.



환기 미술관을 만들 때 쪽마루의 나무 한쪽 한쪽마저도 그림의 느낌과 결을 맞추려고 애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녀는 치밀했다. 이미 팔린 작품이더라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은 다른 그림과 바꿔서라도 미술관에서 소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상의 죽음, 김환기와의 재혼, 도불과 도미로 이어지는 뮤즈로의 인생역정, 환기미술관 건립 그리고 그녀가 이상과 수화를 기리는 말년의 추억은 로맨틱 영화처럼 아름답다. 김환기의 기일(忌日)은 물론이요, 생일과 금혼식을 기념하는 작품집을 발간하고 전시회를 하는 등 그를 기리는 많은 행사들을 기획하고 실시했다. 1977년에 뉴욕에서, 그리고 1988년에는 서울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몇 권의 수필집을 냄으로써 문필가로서의 역량도 과시했다. 김환기 사후에도 쭉 뉴욕에서 거주해온 그녀는 서울을 오가며 김환기의 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사업을 적극 펼쳤다. 그녀는 김환기가 죽은 지 꼭 30년 만인 2004년 2월 29일, 남편과 11년 동안 살았던 뉴욕에서 88세(1916~2004)로 눈을 감았다. 천수를 누린 김향안은 그녀가 원했던 대로 뉴욕의 웨스체스터에 있는 김환기 화백 묘소 옆에 안장됐다. 천재 시인의 어린 아내 변동림으로 살았던 3개월, 그리고 30년 동안 천재 화가의 반려자로서 영감을 전해 준 예술계의 뮤즈 김향안, 그녀가 선택한 인생은 처음부터 어울림 화음이 아니었다. 불완전했던 몇 개의 소리들을 반죽하고 메꾸거나 조각해 나갔다. 그 결과 수 세기가 지나도 지속될 울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예술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데서 시작된다. 평범하지 않은 사고와 기행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두 천재 이상과 김환기의 작품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변동림과 김향안으로 살았던 그녀는 본인이 가진 여러 가지 예술적 능력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두 천재의 성공을 위해 헌신한 아내였으며 내조의 끝판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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