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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Feb 06. 2017

C'est la vie

구스타프 말러 부인, 알마 마리아 쉰들러



  ‘거 거~거기 경찰서죠? 하, 하이네켄 주점인데요. 공터에 시체가 있어요. 머리가 댕강 잘린 여자 시체가 있다고요. 빠~빨리 좀 와주세요’ 


1919년 어느 날 밤, 독일 드레스덴의 한 경찰서에 신고가 들어왔다. 

급히 출동해 보니 시체가 아니라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로 똑같은 사이즈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이었다. 



드레스덴 미술학교의 교수로 임명을 받은 한 남자의 축하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그의 옆 자리엔 아름다운 여인이 그림처럼 앉아 있었는데 거나하게 취한 남자가 갑자기 여자를 번쩍 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곤 포도주 병으로 여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1년 동안 분신처럼 데리고 다니던 여자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똑바로 떠진 그녀의 눈에 푸른 별빛이 비쳐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드레스덴 미술대학


남자는 실연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애인과 똑같은 얼굴과 신체 사이즈의 인형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파리의 유명한 디자이너 드레스를 구입하여 입혔고 매일 침대에서 그녀와 함께 잤다. 

그뿐인가? 

그녀를 마차에 태워 오페라 공연장에 대동하고 나타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인형과 남자가 함께 앉아 있는 자화상도 그렸다. 

그렇게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던 엽기적인 남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와 함께 빈의 3대 화가로 꼽히는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이다. 


오스카 코코슈카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스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죽기 1년 전(78세), 29세 연하의 매니저의 아홉 번째 결혼설이 보도된 적이 있다. 

또한 타이거 우즈의 내연녀 숫자가 계속 늘어나자 ‘우즈의 내연녀 미인 선발대회’가 열렸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런 건 단지 ‘여자와 남자’, 여전히 누구에게나 자신의 문제인 그리고 사라지지 않을 주제일 뿐이다. 

그러나 남녀의 가십거리는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흥미로운 스토리임이 틀림없다. 

그게 우즈의 여자든 리즈의 새 애인이든 상관없다. 

겉으론 흉을 보며 도덕이 어떻고 윤리가 어떻고 하지만 내심 대리만족의 심리에서 이런 얘깃거리를 알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인형의 여주인공은 알마 마리아 쉰들러(1879~1964). 

알마는 오스트리아 빈 출생으로,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 

화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림도 잘 그렸으며 많은 독서로 교양이 넘쳤고 뛰어난 재능과 미모는 거의 신화였다. 그러니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예술가들에게 두려움 섞인 선망의 대상이던 건 당연한 일이다. 


알마 마리아 쉰들러


알마의 첫사랑은 화가였던 아버지 에밀 쉰들러의 제자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였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은 현재 세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화가로 그의 그림이 걸리기를 원하는 사람의 숫자가 몇 년 동안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 등, 많은 그림들이 알마의 관능미에서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알마는 첫 키스 상대였던 클림트와 이태리로 야반도주할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구속받기 싫어했던 클림트는 적절한 시기에 그녀에게서 발을 뺐다. 

클림트의 별명은 ‘빈의 카사노바’, 그의 그림 속 여성들은 유달리 성적 매력을 풍긴다. 

이유는 그가 여성을 그릴 때면 알몸을 먼저 그린 후 옷을 입히듯 그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모델이 된 여성과는 꼭 잠자리를 가져야 직성이 풀린다는 풍설이 있을 만큼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다. 그러나 클림트는 어느 누구 하고도 결혼하지 않았다. 


구스타프 클림트


알마를 놓아준 후 숱한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14명의 사생아를 두었던 클림트는 진정한 쾌락을 즐겼을 뿐 구속과 소유는 사양했던 남자다. 진정 선수는 다른 법이다. 언젠가 클림트를 해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클림트와 에밀 플뢰게


알마는 21세 때, 빈 오페라 지휘자였던 42세의 구스타프 말러(1860-1911)와 결혼했다. 

띠동갑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샷 더 마우스’다. 

이 경우 완전히 더블 장사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두 남자의 이름은 똑같이 구스타프다. 

음악적인 명성과 지위에, 예쁘고 어린 신부도 얻었지만 노총각이던 말러의 맘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빈에서 손꼽히는 지성과 미모의 어린 마누라를 가둬 둘 수도, 감춰둘 수도 없는 일, 나이 어린 미인을 아내로 데리고 산다는 건 풍전등화와 다를 바 없었다. 

아내가 자기 곁에 있는 것을 밤새도록 몇 차례씩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말러의 삶은 고독했고 가정은 매우 불행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정신병을 앓았으며 8명의 형제를 일찍 잃었다. 

가족 중에는 맹아도 있었고, 정신병과 뇌종양을 앓거나 권총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므로 조신하게 아들딸 낳고 집에서 요리나 하길 바라는 말러의 희망사항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요구에 모든 걸 포기한 듯 그러마 했다. 

하지만 말러가 유난히 사랑했던 둘째 딸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제목이 불길하다며 반대하는 알마의 의견을 무시하고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발표한 후 첫째 딸마저도 잃고 말았다. 

부부 사이엔 점점 북풍한설이 몰아쳤다. 

활화산에 뚜껑을 덮는다고 휴화산이 될 수 없는 법, 알마의 하루하루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말러와 함께 했던 10년의 결혼 생활에서 우울증이 생겼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자유에의 갈망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구스타프 말러
말러와 결혼하여 얻은 두 딸


그러던 그녀 앞에 따뜻한 사랑의 집을 지어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 바우하우스의 창시자)가 나타났다. 

게다가 그는 알마 보다 4살 연하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다. 

구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다. 

말러가 노심초사 행여 어린 아내를 놓칠까 꽁꽁 감싸 두었지만 일이 터져 버린 것이다. 

어느 날, 그로피우스가 알마에게 보낸 편지를 우연히 말러가 받아 읽게 되었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알마는 이판사판 케세라 세라 하며 남편에게 결혼 생활의 불만과 좌절을 털어놓았다. 

그제야 비로소 말러는 알마가 작곡한 곡을 들어보고 그녀의 재능이 훌륭함을 인정하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후회할 때는 늦은 게 아니라 하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가 있었다. 

말러는 마지막 교향곡 악보에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는다, 알므시!”(알마의 애칭)라는 스케치를 남기고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일찍 죽으면, 그 책임을 전부 여자에게 돌렸던 시절이 있었다. 

남편이 일찍 죽은 것도 서러운데, 서방 잡은 년으로 몰아세웠었다. 

그처럼 당시 빈 역시 알마가 말러의 피를 말려 죽였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떠돌았다. 

남의 아픈 사생활을 즐기듯 떠들어대는 건 국제 공통인가 보다. 

어쨌거나 알마는 남자의 혼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릴 만큼의 치명적인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돌싱(돌아온 싱글)이 된 알마를 얻기 위한 남자들의 경쟁으로 빈이 발칵 뒤집혔다. 

미망인 알마는 여전히 예뻤다. 그리고 젊었다. 

빈 사교계, 퀸 오브 더 퀸으로 다시 등극한 그녀에겐 멋진 남자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알마의 심미안은 대단했다. 

남자의 재능과 능력을 알아보는 눈이 고수 중 고수였던 것이다. 

그녀가 만나거나 사랑에 빠진 남자들은 모두 역사에서 빠트릴 수 없이 기라성 같은 주요 인물들이라는 게 그 증거다. 


발터 그로피우스


미망인이 된 이듬해 4월, 한 파티에서 알마는 6살 연하의 젊은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를 만났다. 

첫 남편 말러와의 세대 차이에서 질려버렸던 걸까? 

알마는 남편이 죽은 후 계속 연하남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알마는 맘속으로 외쳤다. 

‘그래 이거야 이거, 바로 이 사람이야’ 파란 눈에 늘씬한 키의 관능적인 몸놀림, 그러나 결코 천해 보이지 않는 여인 알마가 그를 다른 방으로 은밀히 유인했다. 

그리고 고혹적인 목소리로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이졸데의 죽음>을 노래했다.

 이쁘지, 몸매 죽이지, 노래 잘 부르지, 그림 잘 그리지, 유식하지, 교양 있지, 화려한 싱글이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그녀였다. 

그리곤 농밀한 눈길로 조용히 청했다.

‘제 초상화를 그려주시겠어요?’ 그런 그녀에게 안 빠지면 비정상이다. 바보다. 

그렇게 해서 코코슈카는 알마에게 평생 목을 매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인생에서 가장 격렬한 사랑을 나누는 듯 보였다. 

코코슈카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유산하게 되고 점점 막이 내려질 기미가 보였다. 

사랑의 호르몬 유통기한은 ‘3년’이라는 말이 신빙성 있는 것처럼 알마는 코코슈카를 보기 좋게 차 버린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코코슈카는 400여 통의 연애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알마는 그에게서 집착과 질투가 강했던 말러의 환상을 보듯 지긋지긋함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탁월함과 소유욕을 잘 알고 있었다. 

3년 만에 끝나버린 알마와의 사랑은 격정적이었으며 코코슈카에게는 화가로서 말할 수 없는 창작의 자유와 열정을 안겨다 준 시기였다. 

그러나 사랑의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있으므로 소리 나지 않을 뿐이다. 적어도 코코슈카에겐 그랬다.   


오스카 코코슈카 자화상


사랑은 늘 핑크빛이지만은 않다. 

어는 땐 잿빛이 되고 검은빛을 띠기도 한다. 

단테의 ‘신곡’에 평생 떨어지지 않고 함께 붙어 열정 속에 사는 연인이 등장한다.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다. 

코코슈카는 알마가 그를 배신하기 전, 이 연인의 모습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 <바람의 신부>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다. 

감당하기 힘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 연인이 휘날리는 천에 뒤엉킨 채 하늘에 몸을 맡기고 누워있다. 

알마는 코코슈카의 품에서 눈을 감고 자고 있지만, 알마의 손을 꽉 쥔 코코슈카의 두 손은 왠지 불길하다. 

그림에서나마 자신의 신부가 된 알마가 곁에 있지만, 온 근육이 뒤틀어진 채 시선이 허공을 맴돈다.

바람만이 알 것이다. 곧 폭풍이라도 몰아치면 그녀는 바람처럼 날아가 사라져 버릴 허상임을, 그가 홀로 남겨질 파멸을 직감했던 걸까? 

두 사람은 껴안고 있으나, 칼끝으로 후비듯 가학적인 몸짓들이 별리를 예감케 하는 그림이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40년이 지났지만, 코코슈카는 알마에게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애정 어린 편지를 보냈다. 그는 옥스퍼드와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고 세계적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94세에 천수를 다하였다. 


바람의 신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는 어찌 되었을까? 

야생마처럼 분방한 알마는 코코슈카와의 열애를 끝내고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했다. 

그로피우스는 생전의 말러가 질투심에 밤마다 잠을 설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내연남이었으니 알마가 코코슈카와 사랑하던 3년 동안 양다리를 걸쳤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그 결혼 역시 길지 않았다. 

5년 후,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독일의 건축가 그로피우스와도 이혼했다. 

그 이유 또한 알마의 양다리 걸치기 연애, 즉 11살 연하의 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사귀었던 것이다. 

그녀 나이 50세에 베르펠과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유태인이던 베르펠은 나치의 강요에 의해 1940년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할리우드에 정착했으나 베르펠은 55세로 일찍 사망하고 말았다. 


프란츠 베르펠


노년에 알마는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잊기 위해 오래도록 유럽을 여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줄곧 뉴욕에서 살다가 1964년에 쓸쓸히 죽었다. 

그녀의 85년 생애는 누구보다 능동적이고 화려했다. 

어떤 남자도 그녀를 정복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녀가 정복자였다. 

그녀의 뛰어난 재능은 그녀가 어디를 가든 주위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녀는 늘 중심에 있었다. 


알마 마리아, 1960


알마는 평생 동안, 지휘자 부르노 발터, 작가 토마스 만,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가수 엔리코 카루소 등 세계에서 내로라할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작곡가 알반 베르크는 자신의 오페라 보체크를 그녀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알마는 이를 테면 조르주 상드, 까미유 클로델, 클라라 슈만, 루 살로메, 엘뤼아르, 오노 요코 등과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영감을 격동시켰던 뮤즈 중 한 명이었고 남성들의 꿈과 악몽을 동시에 구현하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알마는 유럽 당대 최고의 예술가이던 세 명의 남자와 결혼을 하는 등 남녀 연애 사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대단한 여자였다. 

그녀가 55세였을 때 만난 신학자 호렌 슈타이너는 추기경 지위를 버리고 알마를 선택하기도 했다.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기막힌 노릇이다. 예쁘고 볼 일이다.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제라도 성형 견적을 내 봐야 하나?


그녀는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을 애인으로 거느리면서 페미니스트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여성 혐오자이면서 염세주의자인 아더 쇼펜하우어는 가장 좋은 예술로는 음악을, 가장 좋은 종교로는 불교를 꼽았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특수한 집단혼을 모범적인 결혼으로 제안했는데 먼저 두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인이 나이를 먹으면 그 남자 둘은 다시 두 번째 부인으로 젊은 부인을 들인다. 

이런 결혼방식을 쇼펜하우어는 4명의 남녀가 결합하는 결혼이란 의미에서 ‘테트라가미’ 라 이름 붙였다. 

테트라는 그리스어로 4라는 뜻인데 알마의 결혼 방식이 테트라가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쇼펜하우어


누군가 말했다. 

‘사랑은 일종의 흥분 상태다. 그 흥분 상태는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누구도 그 흥분상태에서 오래 견딜 수 없으므로…’ 

사랑은 봄 빛 속의 나른한 현기증 같은 것이다. 

그 속에선 몽롱하게 젖어들어 영원한 휴식을 꿈꾸지만, 결국 해는 지고 봄날은 간다. 

알마 마리아 쉰들러, 그녀 인생에는 구속과 안정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녀는 19세기 말의 회색빛 가운을 입은 팜므파탈이었으며 보헤미안이었다. 진정한 예술가의 탄생은 자유로부터 시작된다.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정신과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재능과 열정은 하나의 완전한 예술작품으로 이어진다. 

말러로부터 억압받은 첫 번째 결혼 생활이 아니었더라면 그녀의 예술혼이 얼마나 살아났을지 알 수 없다. 

그 점이 안타깝다. 그러나 말러 입장에서 보면 그 또한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본명 알마 마리아 쉰들러 외에, 알마 말러, 알마 그로피우스, 알마 베르펠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그녀의 삶은 멋졌다. 

그러나 그녀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C'est la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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