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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Oct 30. 2017

조선의 마담 시몬 드 보부아르

100년 전 나혜석은...



 ‘저~기 저기, 망태 할아버지가 잡으러 오네’ 그 소리만 들으면 울던 아이가 뚝 그쳤다. 망태 할아버지는 어린아이가 울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나 어김없이 나타나던 한없이 무서운 존재였다. 


  그땐 그랬다. 망태에 넝마나 폐지, 고철 등을 주워 팔아 끼니를 잇는 사람이 비일비재했다. 몸을 써서 벌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돈푼께나 되는 것을 차지하려면 남보다 먼저 부잣집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다. 운수 좋은 날엔 반닫이의 놋쇠 경첩이나 부러진 백동 자물쇠를 줍기도 했다. 1전을 받을 수 있던 맥주병이나 사이다병은 최고의 횡재였다. 수레를 끄는 사람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그날그날 들쑥날쑥하는 넝마주이의 수입과는 달리 일종의 계약직인 그들의 수입은 늘 일정했다. 명동에서 남산까지 70관(262.5kg)의 쓰레기를 실어 나르고 나면 어김없이 70 전이 쥐어지곤 했다. 


넝마주이


  몸으로 벌어먹는 일 중 최고는 뭐니 뭐니 해도 대소변을 퍼다 버리는 똥 지게꾼이었다. 하루 평균 일당은 90전이지만, 요릿집이나 유곽에 백이 있으면 팁을 받았다. 단 장사에 지장이 없도록 손님이 없는 이른 새벽에 감쪽같이 해치워야 한다. 되도록 구린내가 덜 나게 살살 퍼달라며 웃돈을 두둑이 얹어주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날이 꾸물꾸물하거나, 안개가 낮게 깔리는 날은 변소를 푸지 않는 게 상책이다. 골목 가득 무겁게 가라앉은 구린내가 두고두고 가시질 않기 때문이다. 무거운 분뇨 통을 양쪽 어깨에 짊어진 인부는 작대기의 리듬을 잘 타야 한다. 급하게 방향을 바꾸거나 노는데 정신이 팔린 어린아이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급하게 멈추기라도 할라치면 아이는 물론이요, 행동이 굼뜬 노인네들까지 똥 세례를 받기 마련이었다. 간혹 바닥에 분뇨 찌꺼기들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반면 경성역 앞이나 조선은행, 창경원 앞처럼 목 좋은 곳을 차지하고 앉아 하루에 1원(현재의 6만 원 정도)을 편안하게 버는 거지도 있었다. 뒷골목이나 산동네, 다리 밑은 빈곤과 굶주림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늘에 해가 박혀있거나 궂은 날씨와 상관없이 그곳엔 언제나 쉰내와 한숨이 흥건히 젖어있었다. 백 년 전 일이다.


  당시엔 집집이 술을 담가 팔았다. 그러므로 술청마다 맛이 조금씩 달랐다. 너무 달지도 시지도 않은 주막이 인기였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은 문인들도 마찬 가지였다. 명월관 같은 유곽은 엄두도 못 냈다. 마당에 우뚝 서있는 오동나무 때문에 이름 붙여진 오동나무집이나 주모 이름을 딴 민순자 집 같은 곳이 만만했다. 당시에는 그저 ‘**집’ 하는 식으로 불렀기 때문에  이렇다 할 간판이 없었다. 비록 유곽에서 대접받는 번듯한 교자상이 아닌 개다리소반 술상이지만 질펀하게 앉아서 마시던 터라 선술집보다 격이 높았다. 하지만 거의 매일 마시는 사람들에겐 그 또한 부담인지라 선술집으로 발길을 옮기는 날도 많았다. 주로 염상섭, 방인근, 김억, 현진건 등 주로 신문사 쪽 사람들이었다. 폭음가로 유명했던 빙허 현진건은 횡보 염상섭, 월탄 박종화과 하루가 멀다 하고 어울렸다. 현진건은 생계 수단으로 닭을 쳤다. 오다가다 들러서 병든 닭을 잡아 끼니 삼아, 안주 삼아 밤새 마시곤 했던 문우들이 솔찬았다. 때문에 빙허의 호구지책이던 양계 100수는 오래 남아나질 못했다. 


  일이 끝나면 몸이 물 먹은 솜처럼 천근만근. 넝마주이나 똥 지게꾼들의 유일한 낙은 선술집을 찾는 시간이다. 5전을 내면 막걸리 한 사발에 술국 한 그릇이 따라 나왔다. 어쩌다 시어 꼬부라진 열무김치 한 보시기를 덤으로 주기도 했다. 달궈진 가마솥뚜껑에 돼지비계를 쓱쓱 문지른 후 신 김치를 쫑쫑 썰어 넣은 비지를 지져낸 고소한 누름 전을 얻어먹기도 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너덧 잔 마시다 보면 하루 일당의 반인 30 전이 뚝딱 사라졌다. 막걸리는 술이라기보다 요기에 가까웠다. 하루 종일 굶은 채 쓰레기나 똥지게의 악취에 절어있다 보면 입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저 탁배기 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게 유일한 낙이며 약이었다. 


“아 글시 오늘 말여, 절간 쓰레기통을 뒤지는데 멸치 대가리가 수두룩하게 나오는 게 아녀?  스님들이 멸치를 먹는가벼.”

“이 사람아 스님은 무신 스님, 중놈들이지.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네 그려 쯧쯧….”

“근데, 요즘 장안에 떠도는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그 뭐냐, 동경서 공부한 사람 허구 수원 부잣집 딸이 혼인을 헌다는 기사가 날마다 신문에 난다 허드라고. 신문에 혼인 소식을 낼 정도면 대단한 집안 아닌개벼. 그날 거기 가면 먹을 것도 솔찮지 않겄어? 우리도 함 귀경 가보자고, 국밥 한 그릇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으면 좋겄구먼.”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된 동아일보에 결혼을 알리는 기사가 열흘 동안 매일 실렸다. 청첩 기사는 처음이라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식이 시작된 오후 3시, 정동 예배당은 하객으로 가득 찼다. 미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대며 식장 안을 기웃거렸다. 하객이라기보다 신문을 본 사람들과 여기저기서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양식 예복을 차려입은 신랑과 흰색 치마저고리에 하얀 면사포를 쓴 신부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당시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던 신식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조선의 전통 명문가의 자제들이다. 두 사람 모두 일본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명망 있는 변호사 김우영과 미술과 문학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재원 나혜석이다. 그해 영친왕 이은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 노미야(이방자)가 혼인을 했다. 제 264대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와 미국 배우 율 브리너도 모두 같은 해인 1920년에 태어났다.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나기정은 시흥 군수와 용인 군수를 지낸 개화된 관료이다. 혜석의 집은 수원에서 ‘나부자 집’으로 통했다. 아버지 나기정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었다. 심지어 넷째 딸인 혜석 보다 한 살 많은 어린 첩도 있었다. 혜석은 첩 때문에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다. 그 때문에 일찍이 여성의 정조 관념과 축첩 제도, 가부장적 제도에 수많은 의문과 반감을 품게 되었다. ‘계집년들 배워서 어디다 쓰나. 성질만 고약해지지’하던 시절이지만 나기정은 본처가 낳은 자식 모두에게 신교육을 시켰다. 혜석은 1913년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도쿄 시립 여자 미술학교 서양화부에 들어갔다.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였다. 일본 유학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 역시 오빠인  경석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딱 1년 만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 이듬해에 혜석의 여동생인 나지석도 오빠의 설득으로 도쿄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지석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 1년 만에 학교를 중퇴하고 돌아와 평안도의 부잣집 아들과 결혼했다.


나혜석(1920년 무렵)


  나혜석은 일본에서 알게 된 유학생 최승구와 사랑에 빠졌다. 첫사랑이다. 나경석은 최승구가 탐탁지 않았다. 이미 열다섯 살에 조혼하여 아내가 있는 데다가 폐병쟁이였기 때문이다. 최승구의 집안에서는 아들의 이혼은 절대 안 되지만 혜석을 첩으로 들이는 것은 허락한다고 했다. 그러던 중 최승구는 결핵이 악화되어 고향인 고흥으로 요양을 떠났다. 1년 후, 혜석은 최승구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와 조선으로 향했다. 혜석이 문병하고 도쿄로 돌아간 다음 날 최승구는 세상을 떠났다. 사망 소식을 들은 나혜석은 식음을 전폐하고 미친 사람처럼 몇 날 며칠 울기만 했다. 그리고 한동안 신경쇠약에 걸려 혼이 달아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황의 늪에 빠져 지냈다. 


  당시 춘원 이광수(1892~1950)는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오산학교 교감에서 물러나 와세다 대학에 편입했다. 춘원은 나혜석의 총명함과 뛰어난 문재에 흠뻑 빠졌다. 춘원 역시 고향에 본처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유부남이었다. 게다가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이라는 애인도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오빠 나경석이 춘원과의 사이를 결사반대했지만 혜석은 최승구의 사망으로 인한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춘원과 사귀었다. 본처와 두 애인 사이를 방황하던 춘원은 여의사 허영숙과 북경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다. 춘원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한 짓을 한 선생이라는 비난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최승구가 죽고 1년이 지난 7월 어느 날 혜석이 수원 집에 돌아와 있을 때였다. 오빠 나경석이 신사복 차림의 낯선 남자와 함께 안채로 들어섰다. 보통보다 조금 큰 키에 핸섬하고 균형 잡힌 몸매였다.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약간 인상이 차가웠다. 김우영이었다. 그는 혜석을 본 순간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감정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단박에 빠져들었다. 김우영은 서울로 돌아간 후 장문의 편지로 자신의 심경을 전했지만 혜석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후 일본으로 돌아간 혜석이 오사카에서 도쿄로 가는 전차에 타고 있었다. 잠시 정차 중인 전차에 사각모자를 쓴 대학생이 올라타더니 혜석이 앉아있는 자리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다. 김우영이었다. 순간 혜석의 가슴에 전율이 스쳤다. 혜석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교토에서 오사카로 올라갔던 것이다. 불같은 정열과 열정으로 다가서는 그의 표정에서 혜석은 어떤 강렬한 힘을 느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다. 그 날을 계기로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러나 우영이 결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혜석은 침묵했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단지 한 남자의 소유물이 된다는 뜻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김우영의 재촉과 압박은 계속되었지만 따를 수도, 헤어질 수도 없었다. ‘나를 거느리거나 종속된 여성으로 보지 않고 대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인다면…’, 혜석이 바라는 조건이었다.


수원 나혜석 기념관

  

  1918년 3월, 혜석은 도쿄 여자 미술학교를, 김우영은 4월에 도쿄제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10살이 많고, 사별한 아내 사이에 둔 딸 하나가 있었다. 그해 4월, 나혜석은 귀국하여 중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활동하며, 만세운동을 기획하는 등 독립운동에서 큰 활약을 했다. 1919년 3.1 운동 때 사용된 태극기가 바로 나혜석이 만든 것이다. 혜석은 만세운동을 사주했다는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법정에 섰다. 김우영은 1919년 여름 변호사 자격증을 갖게 되었다. 나혜석이 3·1일 운동 때 투옥되자 그녀를 변호하기 위해 달려갔다.  김우영이 6년 동안 변함없이 애정을 갖고 구애한 결과 결혼식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당시 나혜석은 네 가지 결혼 조건을 내세웠다. 이를테면 혼전 서약서 같은 것이다.


“저와 결혼하시려면 조건이 있어요. 제가 지금 말하는 것들을 모두 들어주셔야 해요.”

“그러지, 얘기해 보구려.”

“첫째,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세요. 둘째, 제가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은 저와 상관없이 따로 살게 해주세요. 그리고 혼인이 끝나는 대로 고흥으로 내려가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주세요. 이 모든 걸 약속해 주시면 결혼하겠어요.”

“알았소, 내 그리 하리다. 그 모든 걸 약속하오, 그러니 이제 나와 결혼해주겠소?”

“네, 그러지요.”


  김우영은 파격적인 이 요구를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혜석 역시 김우영이 원하는 대로 ‘예배당에서, 신문에 널리 알려 손님은 가급적 많이, 신식 결혼식으로’에 따르기로 했다. 결혼식이 끝난 피로연 자리에서 신부 나혜석은 입을 열었다.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이런 형식에 얽매인 결혼식은 원하지도 찬성하지도 않습니다. 결혼은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사자들의 마음이 더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의식이나 케케묵은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이란 인습의 굴레에 얽매이게 하는 장치라고 생각했던 혜석의 당돌한 말이 끝나자 하객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며 구시렁거렸다. 신랑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혜석은 이미 결혼하기 전,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 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을 장려한 것이다.’라는 글을 기고하며 여성해방운동가로 활동하던 여인이었다. 그는 현모양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보는 한국사회의 여성관을 비판하였다. 또한 잡지 <학지광>에 실린 ‘이상적 부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양부 현부(良夫賢父)의 교육법’은 없고 ‘양처현모(良妻賢母)의 교육법’만 있는 것은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 된 교육주의라며 비판하였다. 즉 현모양처만이 좋은 여성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신부의 전 애인이던 남자의 묘지로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건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뒷 담화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는 법, 소문은 장안에 퍼질 대로 퍼졌다. 김우영은 남자 망신 제대로 시키는 초점이 되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또한 조신하게 살림을 해야 마땅할 새댁이 남정네 못지않게 글 입네, 그림이네 하며 밖으로 나다니는 것을 비난했다. 이런저런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김우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의 예술적 재능을 아끼고 감쌌다.  


  나혜석이 평생 사랑했던 문학 작품은 노르웨이 작가 헨릭 입센이 쓴 <인형의 집>이다. 혜석이 처음 접했던 일본어판인데 번역이 영 탐탁잖았다. 혜석은 잡화상점 종업원 등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다. 인형의 집 영문판과 노르웨이 원서를 샀고 원문의 내용을 독파했다. 그리고 매일신보 1면에 연재된 <인형의 가(家)> 삽화를 그렸다. 혜석에게 노라는 일종의 대리만족이며 롤 모델이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 기뻐하듯 /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 (후렴) 노라를 놓아라 / 최후로 순수하게 / 엄밀히 막아논 / 장벽에서 / 견고히 닫혔던 / 문을 열고 / 노라를 놓아주게.’ 


  나혜석이 가사를 쓰고 작곡가 도쿄 음악학교 출신인 여류 피아니스트 김영환이 곡을 붙인 노래 <인형의 집>이 매일신보에 실렸다. 훗날 자신이 노라의 운명을 닮은 생을 살게 될지 이미 알고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외교관의 부인으로서, 화가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결혼한 이듬해 만삭의 몸으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전시는 전례 없는 대성공이었다. 개인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혜석은 첫 딸을 낳았다. 부부의 성을 나란히 쓰고 기쁨의 결정체라는 의미로 열(悅) 자를 넣어 김나열(金羅悅)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혜석은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거룩하고 신성한 일이지만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자녀를 위해 맹목적인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에 염증을 느꼈다. 모성애는 강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는 것은 사실상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 거룩한 일이니 그저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하는 것에 불만이었다. 그녀의 생각이 낳은 글은 남성들은 물론이요, 많은 여성들의 비난에 부딪혔다.


  혜석은 일본 외무성 만주(현재의 단동 시) 부영사로 부임하게 된 남편을 따라 안동 현으로 이주했다(1921년). 당시 부영사의 지위와 부는 막강했다. 찬모와 유모를 둘 수 있던 혜석은 집안일에 얽매이지 않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 결과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매년 입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많은 남성들이 시대를 한탄하며 붓을 꺾을 때에도 그녀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신문, 또는 이광수 염상섭 등의 소설이나 신문 삽화도 그렸다. 정치색을 띄지 않으면서 사회상이나 일상 풍경 등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렇게 나혜석은 한국 유화를 정착시킨 최초의 화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923년 6월 15일, 혜석은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강명화라는 스물세 살의 기생이 극약을 먹고 자살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애인 사이였던 남자 역시 그녀를 따라 자살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기생은 오늘날의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다. 기생을 따라 자살한 남자는 장안의 갑부였던 장 모 씨의 외아들인 장병천.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졌으나 남자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한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 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혜석은 자신의 극진한 사랑을 받다가 죽어간 최승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죽음은 마지막인데 사랑을 위해서 과연 목숨을 끊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혜석은 강명화의 자살 사건에 대한 생각을 동아일보에 발표했다.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다고 스스로 분사하는 것은 가장 부끄러워할 만한 비겁한 행위이다. 그것은 자신의 연애를 신성화시키려는 허영심에서 비롯한 것이다’ 라며 비판했다.


 

  어느 날 퇴근한 김우영이 신문 조각과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오늘 조선미전 관련 기사가 났기에 오려 왔소. 그리고 이걸로 그림 그리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사도록 하오. 넉넉히 넣었으니 여유 있게 쓸 거요. 부족하면 얘기하오, 더 마련해 주리다.”    


  혜석은 봉투와 신문 조각을 받았다. 남편의 따뜻하고 다정한 맘이 새삼 고마웠다. 남편 한 사람만이라도 내 그림을 보고 기뻐한다면 만족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그려진 <천후궁>이 1926년, 제5회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아들 진(辰)을 낳는 경사가 이어졌다. 한편 혜석은 만주 안동 부영사의 부인이란 막강한 힘을 이용하여 독립 운동가들의 밀입국을 돕기도 했다. 그해 8월 어느 날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남녀의 정사’라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실렸다.


천후궁

 

  ‘지난 3일 오후 11시에 하관(시모노세키)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배 이름)이 4일 오전 네 시경에 쓰시마 섬(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유류품으로는 여자의 돈지갑에 현금 일백사십 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남자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 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는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情死-연인끼리의 동반 자살)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실종된 남녀는 극작가 김우진(1897~1926)과 배우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1897~1926). 두 사람은 서른 살 동갑내기로 나혜석보다 한 살 적다.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여 ‘선상 정사(情死)’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승객명부에 남자는 전남 목포 김수산(30세), 여자는 경성 윤수선(30세)이라는 가명으로 씌어 있었다.  


     

  두 사람이 묵었던 선실에는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 주시오’라는 메모가 남아있었다. 윤심덕이 실종된 후 닛토 레코드에서 취입한 마지막 노래 ‘사의 찬미’는 급속히 유행하기 시작했다. 유성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울려 퍼졌다. 이 노래의 원곡은 헝가리의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다뉴브 강의 잔물결’이다. 그 멜로디에 윤심덕이 가사를 붙여 만든 노래이다. 유명 인사였던 두 사람의 스캔들과 미래를 예언한 듯한 비관적인 가사가 대중을 사로잡은 것이다. ‘사의 찬미’는 당시로서 경이적인 10만 장의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김우진은 목포 거부의 아들로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도쿄 유학 시절부터 연극 동우회를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는 등 신극 발전에 힘썼다. 김우진이란 이름은 윤심덕과 동반 자살한 남자로만 단순하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5편의 희곡과 20편의 평론을 남긴 1세대 연극인이었다. 윤심덕은 일본 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이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극단에서 처음 만났고 조선에서 순회공연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그러나 김우진은 이미 아들딸을 하나씩 둔 유부남이었다. 윤심덕은 닛토 레코드의 음반 취입 의뢰를 받아 일본으로 갔다. 연극을 하고 싶었으나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고민하던 김우진도 일본으로 건너왔다. 음반 취입을 마친 윤심덕은 사장에게 특별히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사의 찬미’였다.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오사카로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쳤다. 김우진이 한 걸음에 달려와 부관연락선에 함께 오른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끝이었다. 


사의 찬미



  어느 날, 김우영은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다. 변방에서 6년 가까이 고생했으니 머리도 식힐 겸 해외여행을 다녀오라는 것이다. 명분은 장기간 벽지에서 근무한 사람에게 베푸는 특전 같지만 일종의 올가미라는 것을 김우영이 모를 리 없었다. 나혜석은 오래전부터 해외여행에 대한 꿈이 있었다. 남편의 입장과 향후 거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만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 구미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여행을 앞둔 혜석은 흡사 신들린 것 같았다.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초인적인 힘을 안겨다 주었다. 맨 먼저 결혼할 때 마련했던 서울 집을 처분했다. 남편 몰래 푼푼히 모아 두었던 돈은 물론이요, 마련할 수 있는 돈이란 돈은 모두 끌어들였다. 이왕 떠나는 여행이니만큼 더 많은 나라, 더 많은 풍물을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혜석은 여행에서 네 가지 문제의 해답을 얻어 오리라 생각했다.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둘째, 남녀 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셋째, 여자의 지위란 어떤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지만 혜석에게 새로운 문제가 시작될지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나혜석과 김우영


 1927년 6월 부산진역은 평소보다 많은 사람으로 북적댔다, 김우영과 나혜석을 배웅 나온 친척과 많은 친지들 때문이다. 소매 부리에 금색 자수가 놓이고 금색 단추가 일렬로 달린 일본식 제복을 입고 한껏 멋을 낸 김우영은 일본도를 차고 있었다. 혜석은 모직 오버코트에 여우 한 마리를 통째로 벗겨 만든 목도리를 목에 둘렀다. 펠트 모자를 쓰고 장갑을 꼈으며 가죽 구두를 신은 모습은 당시 상상도 못 할 금 수저 패션이었다. 시어머니는 아들과 며느리 손을 번갈아 잡으며 빨리 돌아와야 한다는 말만 연신 하고 또 했다. 부부가 하얼빈으로 가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모스크바를 구경하고 폴란드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 것은 부산을 떠난 지 한 달 만이었다. 혜석이 꿈에도 그리던 파리였다. 여행의 일정에서 파리는 베이스캠프와 마찬가지였다. 유럽 인근의 나라에 가더라도 파리로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기차역에 마중 나온 유학생들의 안내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구름처럼 푹신한 침대, 창밖으로 비치는 노란 가스등 불이 낯설지만 아름다웠다. 파리의 첫 밤은 설렘 반, 기쁨 반으로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초 잡았던 여행 스케줄은 서너 달 정도. 백일도 안 된 막내까지 세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났던 터였다. 하지만 막상 파리에 도착하고 보니 그 짧은 기간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되었다. 두 사람의 여행은 장장 1년 8개월 동안 이어졌다. 파리는 별천지였고 눈에 비치는 모든 게 꿈이었다. 사람들은 늘상 먹고 마시고 춤을 추러 다니는 듯 보였다. 구라파의 남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성에게 친절하고 귀히 여겼다. 혜석이 꿈꾸던 이상적인 세상이 바로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군축회의 총회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김우영을 따라 스위스로 갔다. 때마침 영친왕 부부가 제네바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영친왕의 만찬에 초대받는 호사도 누렸다. 파리로 돌아온 부부는 비로소 본격적인 유럽여행을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거쳐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을 다녔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베를린에서 약 3개월 코스로 법률 공부를 하기로 했다. 부부가 함께 베를린에 머물 수도 있었으나 혜석은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다. 아내의 원이 무엇인지 아는 김우영은 흔쾌히 동의했고 혜석은 프랑스 야수파 화가로 유명했던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당시 파리 화단에는 피카소, 마티스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많은 화가들이 군림하고 있었다.  


  ‘이 집은 파리 상 라자르 정류장에서 전차로 25분밖에 아니 걸리는 파리 가까운 시외니 별장 많기로 유명한 레베지네 라고 하는 곳에 있다. 시외니 만치 수목이 많고 이 집 정원도 꽤 넓다. 정원에는 높은 고목이 군데군데 서 있고 푸른 잔디 위에는 백색 화초가 피어있고 우거진 수풀, 엉켜 오르는 덩굴, 작약화, 월계화, 등꽃이 피어 있고 그 옆에는 채소밭이 있어 딸기, 감자, 상추, 파, 콩이 심겨 있다. 또 한편 마당에는 토끼, 비둘기, 밀봉(꿀벌)을 기른다. 그리하여 꽃 꺾어 방에 장치하고 채소 뜯어 반찬하고 가축 잡아 공물로 쓴다. 외형 차림만 보아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중에서, 1936년 4월 <삼천리> 발표, 나혜석 전집 중, 태학사 2002)


  ‘이 집 가족은 50여 세 된 샬레 씨, 40여 세 된 부인, 18세, 16세 된 딸, 7세 된 아들,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 식구이었습니다. 집은 목재로 실용적일 뿐입니다. 아래층은 서재 겸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살레 씨가 여행 중에 수집한 남양 산물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2층에 올라가려면 내 방이 있고, 딸의 방이 있고, 부부 방이 있으며, 목욕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3층에는 재봉실이 있고, 유아실이 있어, 벽, 의자, 책상, 책장 모두가 진홍색으로 꾸미어 색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1934년 3월 <중앙> 발표)


   혜석은 틈틈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다녔다. 이름만 보아왔던 대가들의 작품을 맘껏 감상했다. 파리에서의 일상은 환희였다. 희미한 흑백사진으로나 보았던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그림을 볼 수 있음은 꿈의 완성이었다. 대가들의 그림은커녕 컬러 도록조차 본 적이 없었던 터였다. 화법을 익히고 미술서적을 읽기 위해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공부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구미 만유기 일 년 팔 개월 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얏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빡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 책상에서 불란서 말 단자(단어)를 외우고 때로 난 사랑의 꿈도 뀌여 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보았다. (중략) 실상 조선 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 상 아모 장애되난 일이 하나도 업섯다. 파리 시중 제일 큰 다점인 라 쿠폴 카페와 카페 돔이 있으니 야반(夜半)에 가보면 인종 전람회와 같이 모여들어 장관이며 카페 돔은 화가 많은 몽파르나스에 있어 늘 만원이다.’(‘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구미 만유하고 온 후의 나’ <삼천리> 1932년 1월 발표)


나혜석


  파리 들랑브르 가에 위치한 딩고 아메리칸 바에 금발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긴 남자가 들어왔다. 방금 ‘위대한 개츠비’의 탈고를 마치고 한 잔 하러 온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zgerald, 1896년 9월 24일, 미국-1940년 12월 21일). 그는 무명작가 한 사람을 출판사 편집자에게 소개했다.


“이 친구의 데뷔작 출간을 도와줬으면 좋겠어 친구.” 

“이름이 뭔데?”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입니다.”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즈음 미국 작가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는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다. 나혜석과 스콧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보다 세 살 위다. 고로 나혜석은 스콧 피츠제럴드와 동갑내기다. 어쩌면 비 내리는 어느 오후, 몽파르나스의 카페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우연히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서점은 거만해져서는 안 된다는 듯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무료로 헌책을 빌려주거나 가난한 예술가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기도 했던 그곳에 헤밍웨이도 1년간 머물렀었다. 혜석이 화구 박스를 들고 화랑에 전시된 그림을 보러 다닐 때 몽마르트르의 살롱 <검은 고양이>와 <물랭 루주>에는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 등 당대의 화가들이 모여 앉아 초록빛 요정 같은 압생트를 즐겨 마시곤 했다.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술에 취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 쓴 소설들은 시시하다고 말했던 피츠제럴드와 술보다 기쁨을 주는 것은 별로 없다고 말하는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년 7월 21일, 미국 - 1961년 7월 2일), 두 사람의 공통점은 술이었다. 진을 즐겨 마셨던 피츠제럴드는 맥주는 술도 아니라고 했다. 헤밍웨이는 위스키(40도)는 아무리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며 그보다 더 독한 럼(40도-75도)을 좋아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6명 중에 4명이 알코올 중독자라고 한다.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는 직업으로 바텐더에 이어 작가가 2위를 차지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술은 문학작품을 만드는 길목에 서 있는 노리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술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술과 문학은 앙숙이자 살가운 벗이다. 그 둘은 수없이 맞붙어왔지만 언제나 무승부였다.  


  당시 마흔 살이던 장 콕토의 집에서는 수시로 파티가 열렸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 피츠제럴드 부부와 헤밍웨이가 그곳의 단골 게스트였다. 피츠제럴드가 아직 문단의 인정을 받지 못하던 시절, 그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젤다에게 파혼을 당했던 때가 있다. 그런 젤다와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던 건 <낙원의 이쪽>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작곡가 베를리오즈와 셰익스피어 극단의 최고 여배우였던 헤리엇 스미드슨의 결혼 스토리와 비슷하다. 햄릿 공연을 보러 간 베를리오즈가 오필리어 역을 맡은 헤리엇 스미드슨에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스미드슨은 무명 작곡가의 청혼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에 베를리오즈는 자신이 겪은 실연을 바탕으로 한 이상한 꿈을 스토리 삼아 <환상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 곡으로 로마 대상을 거머쥐었고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 명성을 얻은 베를리오즈의 재 청혼에 헤리엇 스미드슨은 흔쾌히 승낙하여 결혼에 골인했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 피츠제럴드


  <노인과 바다>가 [라이프]지에 실리자 불과 이틀 만에 5백만 부 이상의 잡지가 팔려나갔다. 발 빠른 출판사는 인기의 기세를 몰아 단 일주일 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기염을 토했다. 헤밍웨이는 그 후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을 발표하며 최고의 작가로 등극했다. 반면 피츠제럴드에게는 긴 방황이 이어졌다. 아내 젤다 피츠제럴드의 상상할 수 없는 낭비벽으로 인해 경제적인 파국을 맞게 되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돈이 될 수 있는 글이면 뭐든지 닥치는 대로 써나갔다. 반면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가 돈벌이를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작품을 쓴다며 독설을 퍼부었다. 한때 <위대한 개츠비>로 명망을 날리던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44세) 한편 남 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딸로 태어나 미모와 돈, 명성을 모두 가졌던 젤다 피츠제럴드 역시 늙어가는 자신의 외모를 인정하지 못하고 정신병에 시달렸다. 그녀는 입원하고 있던 재활병원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사망했는데(48세) 남편 스콧 피츠제럴드가 죽고 8년 뒤였다. 한편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승승장구했던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가 죽고 난 후 두 사람의 작품이 끝임 없이 비교당하며 비판이 이어졌다. ‘글이 써지지 않아’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며 비관하던 헤밍웨이 역시 우울증으로 62세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헤밍웨이가 25살이었을 때 그의 부친 역시 스스로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헤밍웨이가 죽을 때 사용한 권총은 부친이 생을 마감할 때 사용했던 그 총이었다. 모든 죽음은 언제나 허무하다.


헤밍웨이


  10월 어느 날, 파리에 유학하는 조선인들이 화가 이종우(조선 최초의 도불 화가. 1899년, 황해도 봉산 - 1981년)의 집에 모였다. 최린의 환영회를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50세에 접어든 최린(1878~1958)은 서른 살 안팎의 유학생들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위인이었다. 최린은 3·1 운동의 33인 중 한 명으로 2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한 후 천도교에서 활동했다.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후 민족 개량주의로 흘러가 일본의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파리에 나타난 것이다. 유일한 여성인 혜석은 혼자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서 좌중을 둘러보던 최린의 시선이 나혜석에게 꽂혔다. 함경도 사투리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합쇼~” 혜석은 그 텁텁한 목소리에서 야릇한 호감을 느꼈다. 음식이 차려지자 하나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는 느낌은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혜석은 최린의 뜨거운 눈빛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최린과 나혜석은 만나기 전부터 서로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환영회가 끝나고 며칠 후, 어찌 알았는지 최린이 혜석의 숙소로 불쑥 찾아왔다. 혜석은 내심 반가웠다. 그날 두 사람은 오래 알고 지내온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녔다. 최린의 해박한 지식과 상 남자다운 매력이 혜석의 호감을 산 것이다. 최린은 정치가니 만큼 웅변에 뛰어났다. 동양 철학과 서양 근대사에도 박식했다. 게다가 시‧서‧화와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나혜석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남편 김우영이 안정적인 기반과 정신적, 물질적의 후원자인 반면 최린은 정열적인 사랑으로 혜석의 예술을 꽃피우게 해줄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밀회는 조선인들 사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최린의 작은댁으로 통할 정도였다. 11월 어느 날, 두 사람은 샤갈의 천장화 ‘꿈의 꽃다발’이 그려있는 <오페라 가르니에>에 나란히 앉아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관람했다. 고급 창녀 비올레타가 귀족 자제인 알프레도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비극이다. 오페라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밤바람이 차가웠다. 최린이 혜석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유난히도 쿵쾅거렸다. 그날 밤, 최린은 혜석이 묵고 있던 셀렉트 호텔에서 함께 묵었다.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거의 한 달 반 동안 같이 밤을 보냈다. 혜석이 남편을 만나러 베를린으로 가야 할 때가 되었다. 그즈음 최린은 일로써 이탈리아에 들른 후 독일로 갈 예정이었다. 베를린으로 가려면 쾰른을 경유해야 하므로 두 사람은 쾰른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매일 붙어살다시피 했던 최린과 떨어져 있던 며칠이 실로 억겁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기다리던 그날, 쾰른에서 만난 두 사람의 포옹은 그 어느 때보다 격정적이었다.   


“혜석 씨, 사랑하오.”

“저도 공을 사랑해요.”

“조선에 돌아가면 나와 함께 삽시다.”

“아니 되오, 저는 남편과 이혼할 수는 없어요.”

“허허~, 그저 해본 소리요. 과연 당신다운 대답이구료. 나도 그 말에 만족하오.”


  베를린에서 연말연시를 보낸 부부는 이듬해 1월 초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즈음 최린은 조선으로 돌아가고 김우영은 법률 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다시 홀로 남아 그림 공부를 하던 혜석은 남편의 공부가 끝나는 때에 맞춰 도버 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갔다. 거기서 한 달 반가량을 머물며 영어 공부를 했다.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 달 후, 부부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마지막 며칠을 보냈다. 파리와의 작별을 앞둔 혜석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미련도 아쉬움도 컸다. 그런 아내의 기분을 눈치챈 김우영이 혜석을 부드럽게 안았다. 그 무렵 막내아들 건이 잉태되었다. 


  두 사람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 뉴욕 항에 도착했다. 거기서 혜석은 김마리아를 만났다. 실로 감개무량한 만남이었다.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 시절 조선여자 유학생 친목회의 회장이었고 3‧1운동에 참여했다가 함께 옥고를 치렀던 친구였다. 사실 일본 외무성의 제안과 혜택으로 해외여행을 떠나오긴 했지만 기간이 길어지면서 상당 부분이 자비로 충당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미국 동포들은 두 사람에게 묘한 의혹과 질시를 갖고 있었다. 몇몇 조선 청년들은 김우영이 일본 놈 앞잡이라며 흉기를 휘두르기도 했다. 1929년 3월, 두 사람은 하와이와 일본을 거쳐 부산항에 도착했다. 열다섯 개 나라를 거친 1년 8개월 만의 귀환이었다.                             

  김우영의 어머니는 돌아온 아들 내외를 보자마자 ‘아이구, 제 새끼들 팽개친 이 귀신들이 이제야 돌아왔구나’하고 울며불며 꾸짖었다. 이제나 저제나 아들 며느리를 기다리며 어린 손주들을 건사해야 했던 2년 남짓한 시간은 실로 억겁과 같은 것이었다. 귀국 후 김우영은 떠나기 전의 고민과 달리 일본의 관직을 과감히 그만두었다. 실직을 하고 나니 살 길이 막막했다. 수중에 남아있는 돈이 거의 없었다.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끌어 모아 마련했던 2만 원을 죄다 썼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집을 처분하였으므로 살 집 조차 없었다. 당장 벌이가 없으니 형편은 궁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부터 가진 게 없던 사람은 없어도 산다. 하지만 쓰던 가락이 있던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실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달리 도리가 없었다. 김우영은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고, 나혜석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시어머니가 살고 있는 동래의 시집으로 들어갔다. 몇 달 후 파리에서 부친 짐, 두 궤짝이 도착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찬 시어머니와 시누이들,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구경이나 하자며 몰려들었다. 하지만 짐짝에 들어있던 것은 화구와 미술 책, 음반 따위뿐이었다. 어린 자식들을 팽개치듯 떠맡기고 떠난 것이 가뜩이나 못마땅한 데다 시댁 식구들을 위한 선물 하나 마련하지 않은 것이 미움을 가중시켰다. 시집 식구들의 눈총은 따갑고 혜석의 심신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당시 <별건곤>(別乾坤)은 꽤 인기 있는 잡지였다. 건곤(乾坤)이 천지(天地)라는 뜻이니 <별건곤>은 별천지라는 뜻이다. 기자가 동래 집으로 찾아와 나혜석을 인터뷰했다. 다음 달, <별건곤>에 ‘구미만유하고 돌아온 여류 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그중 이런 내용이 있다.


“파리에서 조선 사람은 더러 만났습니까?”

“예, 여럿 만났습니다. 최린 선생님도 만났지요. 근래 조선 사람으로 외국 유람 중에 내외국인에게 그토록 큰 대우를 받으신 분은 없을 겁니다. 나도 그분을 퍽 흠선하였습니다. 경성에 가시거든 안부 전해주세요.” 


별건곤 표지


  최린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지금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게 해 줄 방도가 있을 것만 같았다. 헤어진 지 2년이 다 돼가고 있었다. 편지를 썼다. 


‘당신과 다시 사귀기를 바라요. 바쁘시겠지만 틈을 내어 동래로 내려와 저를 만나주셨으면 해요.’ 


  사실 최린에게 있어 혜석과 함께 보냈던 시간은 단지 한 여름밤의 꿈이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여인에게서 느닷없이 날아든 편지는 성가시고 귀찮은 일 일뿐이었다. 파리에서처럼 밀회를 계속한다면 자신의 명성에 어떤 누를 끼치게 될지 불 보듯 훤했다. 친구에게 이 문제를 털어놓고 의견을 구했다. 나혜석의 남편에게 편지 내용을 알려주고 마누라 건사 잘 하라는 말을 전할 방도밖에 없다고 했다. 최린은 자신의 위치로 보나, 나이로 보나 그런 남우세스러운 말을 나누기가 뭣하니 대신 편지 내용을 전해 달라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친구는 김우영을 만나 혜석이 최린에게 보낸 편지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데 ‘다시 사귀기를 바란다’는 대목을 ‘내 평생을 당신께 맡깁니다.’로 부풀려 말했다. 김우영은 때마침 혜석이 최린을 일컬어 ‘우러러 공경하고 부러워한다’라는 뜻의 ‘흠선’이라는 잡지 기사에 화가 나 있던 상태였다.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었다. 김우영은 더 이상 부부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에 거쳐할 곳이 마땅치 않던 김우영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홀로 여관에 장기 투숙하고 있던 터라 제때에 따뜻한 밥 한 번 먹기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사건을 수임하려면 최소한의 경비가 필요한데 그 돈 조차 없어 일을 놓치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일본의 후원금으로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온 것에 대한 사람들의 질시 어린 후폭풍은 애초 짐작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는 점차 방탕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김우영이 딴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동래까지 들려왔다. 결혼 당시 ‘나만을 사랑한다’는 약속을 저버린 김우영은 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거부하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시댁 식구들 역시 한 목소리가 되어 혜석을 몰아쳤다. 이윽고 두 사람은 경성 법원에서 이혼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서른다섯의 나혜석은 결혼 10년 만에 김우영과 이혼했다.(1930년 11월) 2년 후 재결합할 수도 있다는 내용의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현 3천만 원)인 전답 문서 한 장만이 혜석의 손에 달랑 쥐어졌다. 하지만 김우영은 이혼 4개월 만에 동거 중이던 신정숙과 재혼했다. 최린과 남편의 배신은 혜석의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나혜석 인생의 1막은 실패한 연극 무대의 커튼처럼 그렇게 내려졌다.


  가만히 있을 나혜석이 아니었다. ‘정조 유린 죄’라는 죄목으로 최린을 고소했다. 그 내용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게재될 판이었지만 미리 귀띔을 받은 최린의 발 빠른 대처로 동아일보에는 실리지 않았다. 혜석은 위자료 1만 2천 원을 청구했고 이 사실은 즉각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 사건으로 최린은 남의 아내를 유혹해 파탄 낸 파렴치로 비웃음을 면치 못했다. 최린은 서둘러 합의금 조로 혜석에게 2천 원을 주고 입막음을 시도했지만 이미 퍼진 소문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최린의 손을 들어주었고 혜석은 패소하고 말았다.


신문 기사 : 여류화가 나혜석씨 최린씨 상대 고소

  

  문학과 그림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던 혜석은 이혼 딱지 하나에 온갖 명성을 일시에 잃었다. 당시 대단한 화제를 모았던 ‘이혼 고백장’을 발표하고, 재기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돌아온 건 냉소와 질시가 전부였다. 그녀의 외도로 이혼을 당했다는 점과 자유연애를 주장한다는 이유였다. 이혼 전 김우영이 딴 여자와 살림을 차린, 그러니까 남자의 외도는 언급되지 않고 혜석의 외도만이 비난 대상이 되었다. 매일신보에는 혜석의 글을 가리켜 불미스러운 작품이라는 인신공격이 가해지기도 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중략)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 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 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 고백서] 중에서


  여성의 적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고 했다. 남성과 대등한 여성으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혜석의 절규는 오히려 여성들에게 더 환영받지 못했다. 정숙하지 못하고 부도덕하며 더러운 여자라는 비난이 거세었을 뿐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 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이와 같이 활짝 피었던 꽃이 떨어지듯 푸근하고 늘씬하던 기분은 전후좌우로 바싹바싹 오그라들기 시작하였다. 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파리가 그리워…’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구미 만유하고 온 후의 나’ <삼천리> 1932년 1월 발표)


  당대 문화와 문물, 유행과 풍속을 담아내던 대중 종합지 <삼천리>는 혜석의 해외여행 기행문을 9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혜석은 최린에게 받은 돈으로 파리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그곳에서 모든 걸 잊고 새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으로 떠나면 아이들을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싶음을 포기했다. 대신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사립 미술학교를 열었다. 조선은 파리가 아니다. 당시 여성은 학교에 들어가 언문을 배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더욱이 단순하게 그림만을 배우고자 학교에 갈 수 있는 여성은 거의 없었다. 운영난을 지탱하지 못한 그림학교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돈만 날린 셈이다. 코티 분에서 저렴한 박가 분으로 바꾸면서 남은 돈을 아껴야 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혼녀라는 부정적인 시선은 늘 그녀를 따라다녔다. 유림과 보수적인 노인층은 타락과 탈선을 부추기는 요녀라며 비난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신여성들은 사회를 오염시킬 염려가 있는 퇴폐와 몰락의 상징이라고 매도했다. 혜석은 어느새 생계유지에 곤란을 느낄 처지까지 이르렀다. 뭐든 올라가기는 어려우나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이다. 그림은 쉽게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혜석이었다. 당장 몇 푼의 원고료라도 챙길 수 있는 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자전적 소설인 <김명애>를 완성하여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이던 이광수에게 맡겼으나 신문에 게재되지 못하고 유실되었다.  


  김우영 역시 타격이 컸다. 아내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일을 해결하겠느냐는 조롱 때문이었다. 김우영이 재혼을 하고 새 살림을 차리면서 자녀들은 김우영의 동생 내외에게 맡겨졌다. 혜석이 아이들을 만나러 종종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되돌아섰다. 경제적인 결핍을 어쩌지 못한 김우영은 하는 수 없이 변호사를 그만두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들어갔다. 혜석이 자녀들을 만나러 종종 학교로 찾아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순사들을 동원하여 제지시키기도 했다. 1935년, 장남 김선이 폐렴으로 열두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아들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분노와 심신의 고달픔이 겹친 혜석은 남편 따라 가졌던 기독교를 버렸다. 사회의 냉대 속에서 궁핍함은 점점 심해졌다.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으며 1940년 무렵부터 방랑생활이 시작되었다. 


  나혜석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자락을 찾아간 것은 동갑내기 친구 김일엽 때문이다. 동인지 <폐허>와 <삼천리>의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은 여승이 되어 수덕사에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일주문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은 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반갑게 만났다.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와 모든 것을 초월한 여승의 대화는 교차점을 찾지 못했다. 이미 10년 전, 일엽은 혜석에게 승려가 되라고 권했었다. 그러나 이제 승려가 되겠다고 찾아온 혜석을 일엽은 거절했다.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달라는 간청에 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했다. 하지만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 라며 일언지하의 거절을 했다.


수덕여관


  일엽이 쓴 ‘동생의 죽음(1907)’은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보다 먼저 써진 조선 최초의 신체시이다. 나혜석과 동갑내기인 김원주(일엽은 춘원이 지어준 필명)는 1896년 4월 평남에서 목사였던 부친의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일엽은 어머니가 돈벌이를 나가고 나면 어린 나이에 동생들을 달래 가며 저녁밥을 챙기곤 했다. 일찍이 개화한 어머니는 궁핍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딸을 여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열두 살 때 네 동생과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잃었다. 17살 때 천애고아가 된 일엽의 박복한 인생이 시작되었다. 일엽의 총명함을 알아챈  외할머니의 뒷바라지로 이화전문을 졸업했다. 22살의 일엽은 18살 많은 40살의 연희전문 교수 이노익과 결혼했다. 돈 많은 독신남 이노익은 한쪽 다리가 불구였다. 그와 함께 한 4년간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 사귄 시인 임장화와의 간통 사건으로 인해 이혼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지만 홀로 귀국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에도 삼각관계로 파장을 일으키는가 하면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와 동거하는 등 여왕벌 같은 남성 편력을 이어갔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몰살당하듯 차례로 잃은 충격에서 빚어진 일종의 결핍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일엽은 이어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철학박사 백성욱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어느 날 백성욱은 홀연 비구승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후 일엽은 만공스님의 법문을 듣고 수덕사에 입산했다. 불같은 열정과 사랑의 몸부림 끝에 32년 속세의 삶을 접고 스님이 된 것이다. 후에 일본에서 낳았던 아들 김태신이 찾아왔지만 ‘나를 어미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말한 일화가 전해진다. 일엽은 입산한 지 43년 만에 76세로 생을 마쳤다. 


일엽스님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5년 동안 머물렀다. 언젠가 스님이 불러주시리라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고암 이응노(1904.1.12 ~ 1989.1.10. 1983년 프랑스 귀화)를 만났다. 이응노는 혜석보다 여덟 살 아래다. 화가 장욱진 역시 그 시절에 나혜석을 만났다. 17살의 장욱진은 당시 견성암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혜석은 그를 아들처럼 여기며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고암 이응노는 바람처럼 살아온 혜석의 삶을 동경했다. 고암은 나혜석이 떠난 뒤 수덕여관을 사들여 한동안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훗날 고암이 본처인 박귀희를 버리고 21살 연하의 제자인 박인경 (현재 프랑스 거주)과 함께 파리로 훌쩍 떠났던 것(1959년)도 나혜석에 대한 동경이었다. 


이응노 작품
이응노
장욱진 가로수
장욱진 나무


  박인경은 스승이며 연인인 이응노와 파리로 떠나기 12년 전, 우연히 나혜석을 만난 일이 있다. 박인경은 안양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는 외사촌 오빠가 있었다. 그곳은 원래 고아원이었으나 해방 후 양로원도 겸하게 된 곳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인경은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그곳에 잠시 숨어 살았었다. 해방과 함께 박인경은 이화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어느 날 외사촌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법 유명한 여류화가가 양로원에 들어왔으니 한 번 다녀가라는 전갈이었다. 


  따스한 햇볕이 운동장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노인들은 겨울의 기나긴 터널을 막 벗어나 모습을 드러낸 햇볕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늙거나 병든 노인들은 하나같이 누렇게 바래고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옷도 늙는가보다. 그중 눈빛이 깊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서린 노인이 눈에 띄었다. 아직 이른 봄이지만 변덕스러운 추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다. 각각 다른 천으로 기운 옷이 얼룩덜룩했지만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외사촌 오빠는 인경을 화가의 방으로 안내했다. 여대생이던 박인경에게 나혜석은 생소한 인물이었다. 자그마한 방에는 낡은 이부자리 한 채가 깔려있었다. 막 피어나는 꽃 같은 젊은 여대생과 누구보다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보냈던 중년 여인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혜석은 다른 할머니들처럼 쪽을 지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뭉텅뭉텅 자른 티가 나는 단발머리였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세워둔 액자 속의 그림 몇 장이 눈에 들어왔다. 남성적이고 굵직한 터치들에서 힘이 느껴졌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던 혜석은 방 한구석에 팽개쳐 두었던 공책을 박인경 앞에 끌어다 놓았다. 몽당연필이 공책 사이에서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내가 심심할 때마다 써 놓은 글이네. 자서전 같은 거라고 할까? 학생이 읽어보고 교정해서 정서해 주면 좋겠는데….” 


  간절함이나 진지함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 박인경은 얼떨결에 대답을 공책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 읽어보니 우선 옛 문체라 이해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내용 대부분이 제 자랑이었다. 정서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무척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험 준비에 제출할 그림이며 할 일이 많았다. 더 중요한 건 그 기록은 박인경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 후 혜석의 공책이 본인에게 되돌려졌는지 그대로 유실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1959년 스승 이응노와 함께 떠나 지금껏 파리에 살고 있는 박인경은 올해 91세, 물 컵만 잡아도 벌벌 떨리는 고령이지만 붓만 잡으면 신기하게도 손이 떨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응노 미술관의 명예관장인 그녀는 지금도 매년 미술관을 찾는다. 지난해 고암 미술관을 찾은 박인경은 ‘나 자신과 10년 계약으로 100세까지 매년 신작을 내놓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응노, 박인경
박인경 화백

  

  1944년 안양 보육원을 나와서 다시 혜석이 맡겨진 곳은 인왕산 근처의 청운 양로원. 그곳 원장은 오빠인 나경석의 친구였다. 그러나 혜석을 양로원으로 데리고 간 것은 나경석의 부인인 배숙경이었다. 집안을 망신시켰다는 이유로, 그토록 아껴주었던 오빠에게도 버림받아 갈 데 없이 홀로 된 나혜석을 올케가 보살핀 것이다. 나혜석은 지팡이 없이는 거동이 어려웠고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배숙경은 양로원 사람들에게 시누이가 나혜석이라는 게 알려지지 않도록 방도를 취했다. 그때 혜석의 나이 49살이었지만 환갑이 넘었다고 속였고 이름도 바꾸었다. 최승구의 최씨, 만공 스님이 지어준 법명 고근, 그러니까 최고근이라는 이름으로 입소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혜석은 청운 양로원에서 해방을 맞았다.


  탕녀라는 주홍글씨가 따라다녔던 혜석은 갈수록 극심한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 몽유병 환자처럼 아무 때나 양로원을 빠져나와 절뚝거리며 거리를 헤맸다. 어느 날 거리에 쓰러져 있던 혜석은 행인의 도움으로 서울시립 남부 병원에 입원되었다. 또다시 병원을 나와 공주 마곡사로 갔다가(1948) 병세가 악화되자 그해 11월 용산에 있는 서울 시립 자재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오후 8시 30분, 그녀는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53세) 당시 기록에 의하면 나혜석의 소지품은 하나도 없었다. 갖은 질병으로 대화조차 어려웠던 혜석은 행려병자,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 1949년 3월 14일의 관보의 무연고자 시신 공고에 본적도 주소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자의 죽음이 발표되었다.


‘신원미상, 무연고자, 사망원인은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추정 연령 65~66세.’ 


  나혜석이 사망하고 20여 일 후 대한민국 제헌국회 내에 설치된 반민특위가 반민족 행위를 한 친일파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그중 1차적으로 검거된 사람 중에 김우영과 최린, 이광수가 포함되었다. 김우영은 혜석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에 사망했고 최린과 이광수는 6‧25 때 납북되었다.  


  여성의 지위는 분명 상승했다. 그런데 과연 상승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고 사회 곳곳에 진출하지 않는 곳이 없다. 여성의 지위를 두고 어떤 이는 세상 참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옳지 않다. 당연한 것을 당연시하지 않고 살아왔을 뿐이다. 하루아침에 얻어진 성과가 아니다. 여성에게 발언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던 시절, 수많은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며 싸웠기에 얻은 결과다. 하지만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친구들과 해외여행이라도 갈라치면 ‘남편이 허락을 안 해 줘서 난 못 가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여전히 남편과 아내의 종속 관계가 유지된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허락을 구하는 아내의 태도가 더 문제이다. 왜 부인은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남편은 부인의 주인이 아니다. ‘남편 밥은 어떻게 하고 여자가 보름씩이나 집을 비워?’라고 말하는 남편도 있다. 여기서 가장 잘못된 표현은 ‘여자가’이다. 어떤 경우든 ‘여자가’ 란 표현은 옳지 않다. 보통의 아내는 1년 열두 달 밥을 짓는다. 1년에 단 보름 동안이라도 남편이 밥 지으면 안 되는가 말이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 자체로서가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로서 정의한다. 여자는 자율적인 존재로서 여겨지지 않는다.’(1949, 제2의 성) 시몬 드 보부아르(1908, 프랑스 - 1986 )의 이 말은 이미 앞선 시대를 살았던 나혜석이 한 말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과 같다. 그렇다. 여자이기 전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나혜석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1882년 1월 25일, 영국 - 1941년 3월 28일)는 어릴 때부터 학자, 문인과 어울리며 많은 글을 썼다. 하지만 자신이 교류한 남자 지식인들과 자기 처지가 같지 않음을 인식했다. 예술가이기 이전에 여성이라는 한계성 때문이다. 버지니아는 수필 <자기만의 방>에서 사회가 여성을 차별하는 방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여성은 출산이나 육아, 가사로 인해 예술 활동에 제한을 받는 지점이 있다. 다시 말하면 만일 셰익스피어에게 그와 비슷한 문재(文才)를 가진 여자 형제가 있었다면, 천재 작가로 남지 못하고 미쳐버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페미니즘, 시대를 앞선 선각자, 파격적인 스캔들, 나혜석을 따라다니는 수식들이다. 그녀가 작품에서 다룬 것은 주로 제도와 인습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여성들의 삶이었다. 기존의 남성 위주의 사회 분위기에서 탈피한 길을 걸었던 그녀는 무연고자로 죽음을 맞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나혜석은 18년 동안 부서진 세계 속을 더듬거리며 인생의 2막을 지나왔다. 그녀는 결코 남보다 두터운 삶을 향했던 게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대로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단지 여성이기 전에 하나의 사람이길 바랐을 뿐이다.(*)


나혜석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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