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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May 25. 2017

어리석고 허무한 세월의 농담(濃淡)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아침 10시, 햇살이 엷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마지못해 기울던 해가, 불과 서너 시간 후면 쏜살같이 떠오르는 여름과는 반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은 금빛 해를 좀처럼 보기 어렵다. 며칠 동안 퍼붓던 눈은 그쳤지만 바람 속에는 유리알 같은 얼음가루가 서걱거린다. 흑백의 농담(濃淡)으로 세상의 민낯을 낱낱이 보여주는 겨울 한 복판, 사람들이 미끄러운 빙판 길을 종종거리며 하나둘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삭 성당 부근

  


  1849년 12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세묘노프스키 광장, 열댓 명의 죄인들이 기둥에 묶여있고 10미터 남짓한 곳에 총을 든 사수들이 서있다. 먼저 처형될 죄수들 머리에 검은색 두건이 씌워졌다. 그는 세 번째 줄에 서 있다. 광대뼈에 붙은 살가죽이 찢겨나갈 듯 칼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맨발에 전해지던 얼어붙은 땅의 냉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사형수들에게 최후의 5분이 주어졌다. 옆에 서있는 동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니 3분이 남았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생각하니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숨 쉬기가 고통스러웠다. 죽기도 전에 몸이 굳어져갔다. 28년의 생이 헛되었다.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이미 사형 선고는 내려졌다.

집행관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일동 장전!”

“조준!”

정적이 흘렀다. 

찰나였는지 억겁이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발사!”라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말 탄 병사가 흰 깃발을 흔들며 달려왔다. 황제가 보낸 특사였다. 급히 하달된 명령문이 낭독되었다. 

“죄인들에게 내려진 사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에 처하노라!”

                       


세묘노프스키 광장




  시내버스 차장에게 돈을 내며 물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 가죠?’

‘네! 맞아요. 하지만 이 버스는 지금 그 수도원에서 돌아오는 길이 라오. 그러니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해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서 길을 건너가 타세요.’ 

차장은 친절하게 말하며 차비를 돌려주었다.     


  버스는 네바 강을 건너고 강변도로를 한참 달린 후 정차했다. 강바람이 거칠게 불어왔다. 강 건너 쪽에 연두와 금빛의 겨울 궁전(에르미타주 미술관)이 보였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아마도 여기 어디쯤에서 저 궁전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20 코페이카짜리 은화를 손에 꼭 쥐고 열 걸음 정도 걷다가 궁전이 보이는 네바 강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 화려한 정경은 말도 하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혼령으로 가득 차있는 것 같았다.” <죄와 벌 중>


  버스를 잘못 탔던 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제대로 탔다면 그 시각, 그 장소에 있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여행이란 길을 잃을수록 묘미가 있는 법, 예기치 않은 곳에서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떠올리다니…, 하기야 여긴 상트페테르부르크 아닌가? 버스를 타자마자 말했다.



네바 강변의 겨울 궁전
네바강변의 도스토옙스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 가려고 하는데요.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알려주시겠어요?’

차장 아주머니는 20분 정도 걸리니 앉아있으라고 했다. 역시 나이가 지긋한 분인데 영어가 유창하다. 많은 승객들이 한꺼번에 올라타기라도 하면 괜스레 내가 정신이 없고 마음이 바쁘다. 그러나 차장은 단 하나의 승객도 놓치지 않고 차비를 거두어갔다. 신기했다. 졸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쏟아지는 법, 얼마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았는지 머리가 유리창에 쿵! 하고 부딪히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깼다. 민망함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졸다가 깬 걸 알아챘는지 다가와 말했다.  

‘아직 더 가야 하니 걱정 말아요.’ 

그렇게 2~3개의 정류장을 더 지나서야 그녀가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모든 건 지나간다.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이든, 회한과 슬픔과 고통이든…. 그 지나감이 멈추는 곳이 묘지이다. 3년 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주일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그 수도원 묘지를 찾아가지 않았던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기필코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터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이 처음인 친구들이 여름궁전에 다녀오는 동안 나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으로 가는 중이다.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이주한 스베틀라나(Svetlana)라는 러시아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는 가끔 아버지가 기타를 치며 러시아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녀의 뇌리엔 눈을 지그시 감고 고향을 그리며 노래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스베틀라나는 파리의 카바레에서 아름다운 고향의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를 좋아했다. 스베틀라나의 음반에 삽입된 노래 중 한 번만 들어도 마음속 한쪽에 잿빛 바람이 불어 가는 느낌을 주는 노래가 있다. 


스베틀라나



<나 홀로 길을 가네>


나 혼자 길을 가네

안개를 지나 돌길을 걸어가네

밤은 고요하고 황야는 신에게 귀 기울이고

별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네

하늘의 모든 것은 장엄하고 경이로운데

대지는 창백한 푸른빛 속에 잠들어 있네

나는 왜 이렇게 아프고 괴로운 것일까?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기다리는가?

이 삶에서 더 이상 바라지 않고

지나가버린 날의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네

나는 자유와 평온을 구하고 싶네

이제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잠들고 싶네



  슬플 때는, 나보다 더 슬픈 음악이 위로가 된다. <나 홀로 길을 가네>는 마음이 낮은 곳으로 한 없이 가라앉는 날 즐겨 찾는 음악 중 한 곡이다. 그런 날은 통통거리는 밝은 음악보다 마이너의 깊은 울림이 오히려 제격이기 때문이다.


  <나 홀로 길을 가네>는 요절한 러시아 작가 레르몬토프(1814-1841)의 시에 스비리도프(1915-1988, 러시아)가 작곡한 노래이다. 레르몬토프는 푸시킨과 함께 근대 러시아의 사실주의 문학가로 조국의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고 아름다운 전원생활을 그리워하다가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삶의 회의와 내밀한 아픔, 숙명적인 외로움 등을 많이 그렸는데 <나 홀로 길을 가네> 역시 뭔가 박복하고 기구한 삶의 외로움과 고독이 짙게 배어있다. 거기다 끊어질 듯 가냘프고 구슬픈 스베틀라나의 목소리와 프랑스 억양과 믹스된 러시아어의 미묘함에서 더욱 아련한 아픔이 느껴진다. 영화 <닥터 지바고> 중 세 줄의 현악기 발랄라이카의 트레몰로가 제격인 라라의 테마 역시 러시아 특유의 우수를 자아낸다. 


  전쟁에서 죽은 병사가 고향에 묻히지 못하고 학이 되어 날아간다는 내용의 노래, 한 때 드라마 <모래시계>에 삽입되어 누구나 ‘우우우 우우~ ’ 흥얼거리던 노래, 끝이 어딘지 모를 깊고 어두운 밑바닥에 웅숭그린 바위의 읊조림 같은 저음이 마음을 후벼 파는 그 노래의 제목은 ‘백학’이다. 이 곡은 러시아 변방의 다게스탄 공화국의 감자토프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겪으며 만든 노래로 러시아 가수 이오시프 코브존이 불렀다. 유혈의 전장에서 쓰러진 병사들을 애도하는 마음이 그려진 이 노래 역시 무겁고 쓸쓸하다. 게다가 레드 아미 코러스(Red Army Chorus)의 노래는 또 어떤가? 


백학(The Cranes)


  러시아의 예술은 어둡고 무겁다. 그게 러시아의 매력이다. 내게 러시아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나라처럼 멀게 만 느껴졌었다. 이루어질 수 없을 꿈같은 곳이었다. 며칠을 달리고 달려도 하얀 수피를 입은 자작나무 숲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나 안나 카레니나의 상실감을 느껴보고 싶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들이 거닐던 골목과 운하와 다리를 건너며 그들을 호흡하고 싶었다. 그렇게 러시아의 예술은 언제나 내 안 깊숙한 곳의 촉수를 건드리곤 했다. 막연히 언젠가 갈 수 있겠지 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결코 꿈이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도원이 보였다.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의 곁을 지나는 맘이 편치 않았다. 작은 다리를 건너니 정면에 수도원의 정문이, 좌우에는 묘지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매표소에서 물어보니 예술가 묘역과 수도원은 각각 200 루블, 나사로 묘지는 공짜란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술가 묘역으로 들어갔다. 무덤의 위치를 표시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영문 안내지도를 받았지만 정작 묘비에는 키릴 문자로 표기되어 있어서 구분이 쉽지 않았다. 한 무리의 여행자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마침 영어였다. 조금은 민망하고 얌체 같지만 사진을 찍으며 그들 틈에서 귀동냥을 하며 따라다녔다. 그곳에는 도스토옙스키, 차이코프스키, 글린카, 림스키 코르샤코프, 무소르그스키, 보로딘 등이 잠들어있다.  


도스토옙스키 묘지
차이코프스키 묘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1악장


  단체여행자들이 묘역을 한 바퀴 돌고 모두 빠져나가니 홀로 남았다. 묘역을 다시 느릿느릿 거닐었다. 초록의 나뭇잎 사이로 콩새들이 재잘거리며 날아다녔다. 묘비엔 누군가 가져다 놓은 꽃들이 죽은 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았다. 내가 그토록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와 차이코프스키 때문이다. 살해당한 아버지로 인한 충격 때문인지 돈과 살인의 스토리를 많이 썼던 비운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 실상 그가 글을 쓴 이유는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함이었다. 돈이 곧 자유라 믿으면서 늘 돈에 쪼들렸던 가난 전문 작가였다. 그리운 연인을 만나러 찾아온 사람처럼 한동안 그의 흉상을 바라보았다. 단지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비소를 마시고 죽어야만 했던 비운의 음악가 차이코프스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유서가 되어버린 6번 비창 교향곡 첫 소절의 바순 멜로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렇게 두 번째 찾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넷째 날이 지나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1821–1881, 러시아)는 모스크바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러시아 상인의 딸이고 아버지는 리투아니아 사람이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전투에 참전했던 군의관으로 당시 마린스키 빈민 병원 의사였기에 병원 관사에서 살았다. 그즈음 러시아에서는 귀족도 농민도 아닌 중간층을 잡 계급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과 달리 의사, 상인, 성직자 등이 여기에 속했다. 그의 아버지가 일하던 마린스키 빈민 병원은 모스크바의 빈민가 중에서도 최하층인 곳으로 죄수들의 묘지는 물론 정신병원, 고아원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부부는 어린 아들이 집 밖에서 혼자 노는 것을 금지시켰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병원 밖에 나와 있는 환자들과 얘기하기를 좋아했다. 잡인 출신이긴 했지만 부모님은 기독교 신자였으며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 덕에 도스토옙스키는 성서를 외우고 쓰면서 글자를 터득했고 특히 아버지는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직접 가르칠 정도로 교육열이 뜨거웠다. 사실 부친이 아들을 직접 가르친 이유는 교육비를 아끼려는 목적도 없지 않았다.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데다가 귀족도 아니지만 근검절약하여 조그만 영지라도 마련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비교적 많은 책이 있었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두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부엌과 이어지는 복도 한쪽을 막아서 형제가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작은 방을 만들어주었다.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형 미하일과 도스토옙스키를 위한 배려였다. 그에게 있어 형은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 등을 털어놓곤 했던 유일한 친구였다. 집 근처 마린스키 빈민구제 병원에는 가난하고 핍박받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릴 때부터 그들에 대한 연민을 가졌고 기억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므로 그가 쓴 첫 소설이 <가난한 사람들>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극빈은 곧 죄였다. 극빈은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을 빼앗고, 사랑하는 이를 빼앗았다. 도스토옙스키에게는 현실이든 소설이든 늘 그놈의 돈이 문제였다. 


가난한 사람들


  도스토옙스키가 열여섯 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 학교에 입학하게 된 건 순전히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곳을 졸업하면 탄탄한 직장에 취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학교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셰익스피어와 파스칼, 빅토르 위고 등의 책 읽기를 좋아했던 조숙한 청년이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아들에게 건축가가 되라고 공부시킨 격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부모들은 자식이 법관이 되길 바랐다. 당시 차이코프스키의 부모 역시 본인의 희망과 상관없이 법률학교에 보내졌으나 결국 음악원 교수가 되었던 것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진로 또한 공병학교와 무관하게 흘러갔다. 학창 시절 그는 아버지께 용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수시로 보내곤 했는데, 아버지는 언제나 아들의 요구보다 더 많은 돈을 부쳐 주었다. 형편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아들의 편지가 워낙 구구절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수중에 돈이 생기면 한꺼번에 다 써 버리곤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녔다.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용돈과 함께 아껴 쓰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은 지 보름 후, 도스토옙스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고향의 농노가 부친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편지는 마지막 유언이 된 셈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낭비벽이나 도박은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의 영향도 없지 않은 듯하다. 발자크 역시 낭비벽으로 평생 빚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궁핍을 면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양의 글을 쓴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발자크의 문체는 물론 그의 삶까지 멋지게 보였다. 발자크는 일종의 롤 모델이었다. 공병학교를 마친 도스토옙스키는 발자크의 소설 <외제니 그랑데>를 번역했다. 발자크의 인기에 힘입어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번역의 대가는 시시했고 판매는 부진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의 소설을 번역했다. 


외제니 그랑데 - 발자크


  조르주 상드(1804~1876)의 본명은 아망틴 오로르 루실 뒤팽(Amantine Aurore Lucile Dupin), 그녀는 그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인 신여성이었다. 상드는 열여섯 살에 지방 귀족인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지만 시골 영주의 안주인으로 참하게 살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상드는 남작과 헤어져 두 아이를 데리고 파리로 이주해 <앵디아나>라는 소설로 데뷔했다. 조르주 상드라는 이름은 이 소설을 발표하면서 사용한 가명으로 조르주는 영어로 조지로 남자 이름이다. 당시에는 여성작가들이 남자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그 이유는 여성의 출판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여성들은 참정권도 없을 뿐 아니라 대학교육도 받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철학이나 과학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여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여성이 배울 수 있던 분야는 문학 외에 음악이나 회화 정도였고 대외적인 활동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쇼팽과 상드의 시대, 그러니까 낭만주의 시대의 여성 음악가로 슈만의 아내였던 클라라 슈만과 멘델스존의 누나였던 파니 멘델스존이 슈만이나 멘델스존 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대외적인 활동은 하지 못했다. 화가도 마찬가지이다. 19세기 낭만파 화가로 유명한 고흐, 드가, 모네, 르누아르 등이 모두 남성인 걸 보면 설명이 된다. 상드는 이름만 바꾼 게 아니라 남장을 하고 다녔다. 그녀는 과감하게 살롱을 드나들며 손가락보다 더 두꺼운 시가를 피우고 최고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상드의 앵디아나는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발자크, 빅토르 위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그녀의 소설은 영어로 번역되어 영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고 최고 수준의 작가들보다 오히려 높은 수입을 올리며 단숨에 유명 작가로 부상했다. 


앵디아나 - 조르주 상드


  당시 상드는 자신의 별장에서 건강이 악화된 쇼팽을 간호하며 틈틈이 글을 썼고 쇼팽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 중 마지막 작품 3번을 작곡했다. 상드는 쇼팽의 음악인생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쇼팽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는 상드와 프랑스의 노앙에서 지낼 때였다. 고국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쇼팽은 곱상한 외모는 물론 심성이 여성처럼 예민하고 몸은 허약하여 오래도록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그는 여섯 살 연상인 상드의 모성애적 사랑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당대는 물론 훗날까지 일부 뭇 남성들은 상드에 대해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험담을 퍼부었다. 상드의 남성 편력과 별난 과시욕, 많이 팔리기는 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B급이라는 등의 비난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상드는 쇼팽에게 헌신적이었다. 귀족적 취향에 성격은 까탈스럽고 상드의 남자관계를 의심하기까지 했던 쇼팽의 곁에 9년간이나 머물렀던 상드는 쇼팽에게 행복과 영감을 주었던, 어머니 같은 연인이었고 예술의 뮤즈였다. 


            


  도스토옙스키는 가난한 청년과 소녀와의 사랑을 통해 빈민가의 삶과 사회적 모순을 고발한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출판했다(1846년). 이 작품을 읽은 후 평론가 벨린스키가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 1809~1852)이 환생했다”라는 찬사와 함께 스물네 살의 새내기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문학계의 대스타로 만들었다. 소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당시 러시아 문학사에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도스토옙스키가 작가로서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문화 예술의 거점지로 당대 최고의 문인인 푸시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등이 활동하는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성격이 까다롭지요. 혹시 누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가 싶어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곤두세웁니다.’<가난한 사람들 중>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크고 작은 101개의 섬을 365개의 다리로 연결해 완성한 도시다. 교외까지 합치면 다리는 무려 625개에 달한다. 내가 알기로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운하의 도시 이탈리아 베니스의 다리는 약 400여 개, 그러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운하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는 네바 강이 시내 중심을 관통해 핀란드만으로 유입하면서 형성된 자연의 섬 델타와 운하에 의해 생긴 인공 섬들 위에 이 도시를 만들었다. 표트르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모델로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우선 늪지를 메워야 했다. 늪지를 메우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다. 표트르는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선박과 사람들에게 돌을 가져오라는 칙령을 내렸다. 배의 크기에 따라 30㎏이상의 돌을 10~30개씩, 사람에겐 통과세란 명목으로 자신의 머리보다 큰 돌덩이 2개씩을 내도록 했다. 도시가 세워지는 동안 노역에 동원된 4만 명의 포로와 농노가 가혹한 자연과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숨져갔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시신까지 돌덩이처럼 늪지로 던져졌다. 그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여졌다. 그렇게 온갖 시련 끝에 마침내 화려하고 웅장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세워졌다. 무려 1/10이 늪지였던 곳에 말이다. 그 후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문화·예술·혁명이 뒤엉킨 역설의 도시로 세계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문화·예술의 총역량이 결집된 이곳은 중세 말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200년 동안 러시아의 수도이며 문화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곳은 원래 늪지대였기 때문에 건조한 여름 말고는 안개가 잦고 습도가 높다. 그래서 시인 푸슈킨은 화창한 여름날에 <유럽을 향한 창>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면 습하고 냉혹한 겨울날은 <고전과 퇴폐, 찬란한 아름다움과 우울함이 동시에 피고 지는 세속적인 도시>이라 평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도스토옙스키이다.

 

알렉산드로 푸시킨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로 인해 시작된 빈부의 차는 어마어마했다. 빈민굴로 내몰린 사람들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헐벗고 병든 사람들의 주검들이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현실을 비판하며 개혁 운동에 가담하여 1847년부터 매주 어떤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문학, 철학, 정치를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단체였다. 약 1년 후 어느 날 새벽, 그는 영문도 모르는 채 긴급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이라 불리는 비밀조직에 가담했다는 이유였다. 제정 러시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그 당시 유럽 전역에 퍼지고 있는 정치적 불안감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프랑스까지 공화정이 실시된 마당이라 혁명에 대한 염려가 컸던 황제는 이런 개혁 모임들에 스파이를 두고 감시시켰고 도스토옙스키가 거기 걸려들었던 것이다. 


  1849년,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체포된 동지들 모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 파블롭스크 요새에 8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당시 그 정도 죄는 대부분 몇 개월의 유배 생활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기 때문에 그다지 큰 염려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재판이 있던 날, 그들이 끌려간 곳은 뜻밖에 재판소가 아닌 세묘노프스키 광장이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상상도 못 한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총을 든 수십 명의 병사들, 광장에 박힌 말뚝들, 구경 나온 수백 명의 군중, 그리고 시신을 기다리는 수십 개의 관과 신부님,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나쁜 느낌은 비껴가지 않는 법, 한 장교가 나와 서더니 그들의 반역죄에 총살을 명한다는 선고를 내렸다.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이 멍해졌다. 근처 교회의 종탑에서 쏟아져 내리던 한 줄기 태양이 서서히 구름에 가려지며 어두워졌다. 신부님께 마지막이 될 고해를 했다. 머리에 두건이 씌워지고 병사들이 총을 겨누어 발사하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형장에 나타한 특사가 사형을 감형하여 시베리아 유형을 명한다는 황제의 특명을 전한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네. 영원한 암흑과 고독에 둘려 싸여 살아가야 할지라도 지금 죽는 것보단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죄와 벌 중>


  발목에 차가운 족쇄가 채워지고 기차에 태워져 끌려간 곳은 시베리아의 옴스크, 수용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리에 묶인 쇠사슬을 질질 끌며 온갖 험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추위에 얼어 터진 손발은 피가 나고 곪기를 반복하여 거북이 등껍질처럼 변해갔다. 죄 값은 혹독했다. 딱딱한 빵 한 조각, 식은 수프 몇 숟가락이 그나마 생명을 이어가는 양식이었다. 고작 몇 시간이나마 삐걱거리는 침상에 몸을 뉘일 수 있음이 최대의 행복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른바 정치범이었다. 그러나 수용소에는 다양한 흉악범, 살인범들이 넘쳐났다. 도스토옙스키는 수많은 범죄자들을 만나면서 러시아 민중들의 실체와 인간의 행태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갔다. 자신과 같은 신세에 처한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갔다. 수용소 안에서는 읽거나 쓰는 행위가 일체 허락되지 않았지만 상상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인자로 만들어나갔다. 도스토옙스키는 관찰력이 뛰어났다. 일상에서의 사소한 행동들을 날카롭고 깊이 있게 분석했다. 그것은 훗날 그의 글에서 탁월한 심리 묘사로 되살아났다. 


시베리아 옴스크 유형장

  

  출소 후 1860년, 그는 옴스크 수용소에서부터 품고 있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딱 들어맞는 인물을 우연히 발견했다.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친형인 미하일이 창간한 월간지 <브레미아>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다. <브레미아>는 일반인이 참여하는 500쪽에 달하는 두툼한 잡지였다. 기삿거리를 찾아 법정을 뒤지고 다니다가 아주 이례적인 사건의 범인을  접하게 되었다. ‘피에르 프랑수아 라스네르’, 그는 여느 범죄자와 확연히 달랐다. 재기 넘치고 박식하며 자의식이 강한 살인마였다. 라스네르가 한 남자와 시비가 붙어 주먹을 휘두르다가 상대 남자가 죽었다. 그런데 라스네르는 이상하게도 죄책감 대신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그 후 라스네르는 수차례에 걸쳐 강도행각을 벌였고, 매번 누군가를 살해함으로써 자신을 승화시켰다. 그때마다 교도소에 갇히곤 했지만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자신의 죄를 탓하는 데 허비하지 않았다. 그에게 감옥은 단지 문학과 정치와 종교에 관해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비상한 범죄자 라스네르에 매료된 도스토옙스키는 그를 모델로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를 탄생시켰다. 소설과 현실의 두 범죄자는 모두 살인을 돈 버는 수단으로 삼았고,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실상 라스네르는 라스콜리니코프만큼 돈에 쪼들리는 형편은 아니었다. 적어도 가난한 자의 비애에 관해서라면, 감방에 갇힌 프랑스의 살인마 라스네르보다 도스토옙스키가 훨씬 더 전문가였다.


  1866년 1월, <죄와 벌>의 1부가 <러스키 베스트니크(러시아 통보)>에 12개월 동안 연재되는 동안 정기구독자가 500명이나 늘어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렇듯 문예지를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은 <죄와 벌>은 이듬해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잘 팔릴 소설이 필요했다. 당시 인기 있는 소설은 돈이나 치정, 살인을 정점으로 하는 폭력이 주를 이루는 통속적인 내용이었다. 그런 걸 쓰자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는 매일 신문을 빠짐없이 읽으며 소설을 구상했다. 

 

죄와 벌


  톨스토이(1828년–1910년) 역시 누가 뭐래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톨스토이가 귀족답게 강남의 금수저들 이야기를 그렸다면 도스토옙스키는 극도로 가난한 흙수저 들을 그렸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고작 한 여인의 불륜이 커다란 사건으로 대두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경우는 궁핍하고 불안한 등장인물들이 저지르는 살인, 자살, 강간 등 도발적인 범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대조적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출간할 즈음(1866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탈고했으나 안타깝게도 출판이 거절되었다. 그 후 2년 동안 수정과 추가 작업을 거친 <전쟁과 평화>는 출간에 성공했다. 그런데 당시 두 작가의 원고료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톨스토이가 원고 한 장당 500 코페이카(1 루블=100 코페이카)를 받았던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50 코페이카 밖에 안 되는 비교도 안 되는 적은 고료를 받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을 쓰고 여러 편의 작품을 통해 명성을 얻은 뒤 마지막 작품이 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조차 300 코페이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의 빚은 늘어만 갔다. 그러자 본업인 소설과 더불어 도박이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흥미진진한 부업은 설상가상으로 빚을 산더미로 만들어갔다. 그에게 글은 곧 돈이고 자유였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을 저질렀던 유일한 이유가 돈이었고, 소냐가 창녀가 된 이유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돈이 중심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끊임없이 빚쟁이들에게 시달렸다. 그럴수록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선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집필은 거의 노동에 가까웠다,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독일의 비스바덴, 스위스 등 유럽 여러 나라로 떠나보기도 했지만 빚쟁이들에게서만 벗어났을 뿐 도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전쟁과 평화


  당시의 중인 계급에겐 신분 상승이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절대적으로 자식 교육에 몰입했던 것도 잡인 계급들의 특징이었다. 도스토옙스키 역시 귀족이 아닌 신분에 대해 커다란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19세기는 특히 엄격한 신분 사회였으므로 작가로 등단한 이후에도 자괴감은 평생 계속되었다. 이 부분 역시 톨스토이와 대조적이다. 톨스토이는 백작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크기의 영지를 갖고 있었다. 평생 놀고먹어도 남을 경제력을 물려받은 것이다. 동시대의 투르게네프(1818~1883, 러시아) 역시 귀족 출신으로 굉장한 부자였다. 그가 20대에 받은 용돈이 1년에 6천 루블. 도스토옙스키가 말년에 쓴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큰 아들 드미트리가 죽네 사네 하던 상속 액수가 3천 루블이다. 같은 시대에 차이코프스키가 음악원 교수를 그만두고 작곡만 하는 조건으로 한 부인에게 13년간 연금 같은 돈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철도를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던 철도 왕의 미망인인 폰 메크 부인이다. 부인이 차이코프스키에게 매년 보냈던 돈이 1년에 6천 루블이었다. 물론 그 금액은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받는 돈보다 훨씬 큰 액수였다. 이쯤 되면 20대의 투르게네프가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반 투르게네프


  톨스토이는 백작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지만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특히 세 살 때 어머니를 잃은 상처가 그의 인생에 큰 그림자로 남았다. 톨스토이는 34세에 겨우 18세밖에 안 되는 소피아 베르스와 결혼했다. 소피아는 궁정 의사로 있던 친구의 딸이다. 친구였던 두 사람이 하루아침에 장인 사위 관계가 된 것이다. 톨스토이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 전후 러시아 사회의 총체적인 모습을 장대한 스케일로 엮은 <전쟁과 평화>에 착수했다. 


레오 톨스토이


  당시 러시아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두 계급은 사용하는 언어조차 달랐다. 대다수 민중이 러시아어를 쓴 반면에, 귀족들은 일상에서 프랑스어를 썼다. 이와 같은 계급적 특성이 도스토옙스키로 하여금 가난을 화두로 두게 만든 것이다. 그는 문학이 직업이 아니던 시절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썼으나 문학을 성스러운 경지로 올려놓은 작가이다. 알려진 대로 그는 간질을 앓았는데, 그 정도가 심각해서 며칠 씩 앓아누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19세기 러시아의 출판 시장은 무척 작았다. 문맹률이 높았던 이유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초판 2천 부가 매진되는데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반응이었다. 문맹률은 물론이요, 오늘날처럼 대중들이 독서를 하는 시절이 아니라는 면에서 비춰볼 때 그 판매량은 거의 기적이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1821년-1881년)는 톨스토이(1828년-1910년) 보다 일곱 살 위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렸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라 불렸던 프리드리히 헨델이 같은 해, 같은 나라(1685년 독일)에서 태어난 동갑내기 음악가지만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도스토옙스키는 후배 작가인 톨스토이에게 항상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당대의 비평가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높게 평가한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나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후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라고 말하고 일기에는 “완전무결한 예술작품”이라고 썼다. 톨스토이 역시 도스토옙스키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도스토옙스키는 그 자신이 병들어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병들어있다고 믿는 정신병자라고 평가했다. 


  차이코프스키(1840-1893) 역시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의 대표 예술가이다. 1876년 12월, 톨스토이가 모스크바 음악원을 방문했다. 당시 음악원 교수로 있었던 차이코프스키는 톨스토이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음악회를 열었다. 프로그램엔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4중주 1번 D장조 작품 11이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들었다.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에 이르자 톨스토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차이코프스키가 일기에 쓴 내용이다. 얼마 후 차이코프스키는 톨스토이가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나를 감동시킨 것에 대해서 당신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듣기만 해서 미안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날은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나의 문학상의 노고에 대해서, 그날의 훌륭한 연주보다 더 아름다운 보답은 없습니다.”


  82세를 살았던 톨스토이는 그 무렵 <전쟁과 평화>에 이어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 중인 48세였고, 53세로 세상을 뜬 차이코프스키는 발레음악 <백조의 호수>와 <슬라브 행진곡>을 작곡했던 36세였다. 이후 러시아 정부로부터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로 작곡을 의뢰받아 만든 곡이 <1812년 서곡>이다. 1812년은 러시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해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에서는 <1812년 서곡>을 연주하는 일이 거의 없다.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4중주 1번 D장조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


  한 노인이 열차를 타고 가다가 폐렴이 심해져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역인 아스타포브의 역장 관사로 급히 옮겨졌다. 의사가 간단한 진찰을 마치고 진찰 기록부를 쓰면서 이름과 직업을 묻자 노인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냥 12번 열차 승객이라고 적으시오. 우리는 모두 세상에 온 승객들 아닙니까. 다만 어떤 이는 지금 막 자신의 기차에 오른 반면, 나 같은 사람은 내리는 일만 남았을 뿐입니다.” 


  바로 그날(1910년 11월 20일), 노인은 인생의 기차에서 내렸다. 82세라는 적잖은 나이에 아내와 다툰 후 집을 나와 열흘 만에 간이역의 관사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그가 톨스토이라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톨스토이 부부


  어느 날 갑자기, 톨스토이는 전 재산을 환원하고 농민으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톨스토이에게 있어선 고뇌를 거듭한 후 내린 결단이었지만 이제껏 귀족으로 살아온 아내 소피아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톨스토이와 재산을 움켜쥐려는 소피아의 이기심이 부부 갈등의 원인이었다. 그동안 많은 걸 참아왔던 소피아는 결국 폭발했고 가출한 톨스토이는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톨스토이의 유해는 기차에 실려와 모스크바에서 꽤 떨어진 그의 영지 야스나야 폴라냐에 묻혔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의 무덤은 예상외로 작고 초라하다. 대리석이 아닌 투박한 돌 위에 이름과 생몰 일자가 새겨 있을 뿐이다. 무덤을 만들 때 농노 등 다른 사람의 수고를 빌려서는 안 된다는 유언에 따랐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장례식
톨스토이 묘지


  평생 도박으로 인한 빛과 생활고에 시달렸던 도스토옙스키에게 운명처럼 나타난 여인이 있었다. 안나 그리고리 예브나이다. 그녀는 <도박사>를 쓸 당시 만난 속기사였다. 빚을 갚기 위해 빠른 기한 내에 글을 써야 했던 그는 속기사를 고용했고 소설은 26일 만에 완성되었다. 똑똑한 안나는 작가의 구술을 속기한 후 원고를 정서하여 작가의 책상에 올려놓으면 원고를 수정하는 식이었다. 45세의 도스토옙스키는 20세의 속기사인 안나와 결혼했다. 


  “나의 모든 미래는 그대에게 달려 있소. 그대는 나의 희망이자 행복이며 축복이오.” 


  안나는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 중에서 그를 가장 잘 이해하고 많은 도움을 준 여인이었다. 안나 또한 그를 신처럼 대했다. 남편을 사랑한 만큼 끊임없이 존중하고 헌신하여 그가 평생 빠져나올 수 없던 도박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 인생 최대의 선물이었다. 뇌전증인 간질을 알았던 도스토옙스키는 누구보다 예민한 성격이어서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는 새벽이나 한밤중에 글을 쓰는 습관이 있었고 그런 남편을 보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가 가족의 행복을 알기 시작한 것은 50세를 훨씬 넘어서였다. 그는 언제나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고 식사를 했고 음식이 묻을까 걱정하였다. 그는 차를 좋아했으나 까다로운 성품 때문에 늘 스스로 만들어 마시곤 했다. 또한 그의 방이 늘 똑같은 상태로 유지되길 바랐기에 안나는 수시로 가구나 책상 위의 서류, 신문, 책의 위치를 점검해야만 했다. 만일 하나라도 제자리에 없거나 비뚤어져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내기 때문이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안나가 구상한 도스토옙스키의 단행본 출간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 덕에 경제 사정도  좋아져 점차 빚을 갚아 나갈 수 있었다, 비교적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1877년,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멀지 않은 스타라야 루사라는 소도시에 별장을 마련했다. 평생 월세를 면치 못하며 스무 번 이상 이사를 다니던 그가 본인 명의로 구입한 최초의 집이다. 여름이면 그곳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스타라야 루사의 페레리티차 강변에 남아있는 초록 집 역시 현재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곳에는 작가가 죽을 때까지 악착같이 읽었다는 성경과 신문, 색 유리창, 모자와 장갑, 그랜드 피아노, 남편의 원고를 넣고 편집자를 만나러 다녔을 안나의 서류가방 등이 남아있다. 안나는 필사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근황을 빠짐없이 일기에 써놓기도 했다. 생활에 안정을 찾은 도스토옙스키는 그곳에서 <미성년>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차례로 발표하여 러시아의 국민 작가로 칭송받게 되었다.   


스타라야 루사의 도스토옙스키 하우스
스타라야 루사의 거실에 있는 안나의 책상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았다. 세 살 된 막내아들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1878년 가을, 스타라야 루사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 도스토옙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쿠즈네치니 거리 5번지의 반 지하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인 1881년 1월 26일, 집으로 찾아온 여동생과 재산 상속문제로 말다툼을 하던 중 갑자기 각혈을 시작하여 1월 28일 저녁 8시 38분 폐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죽는 순간까지도 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인간의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돈으로부터 많은 불화가 생긴다. 어느 누구든 돈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게 삶이다.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집 역시 현재 박물관이 되어 공개되고 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유리관 속에 그가 쓰고 다니던 모자가 보였다. 유난히 옷차림에 신경을 썼던 그는 언제나 최고의 셔츠, 정장, 모자를 갖춰 쓰고 다녔다. 비록 빚에 허덕였지만 품위를 지키고 싶어 했던 자존감, 그리고 작가의 태생인 계급에 대한 거부 심리가 아니었을까 한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시계는 1월 28일 8시 38분에 멈춰 있다. 그가 사망한 시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사망 시각에 멈춘 시계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든 그의 장례식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가 죽은 후 러시아 황실은 유족들에게 매년 2천 루블 연금을 하사하게 했다. 그러나 양아들과 친족들의 상속 싸움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이에 러시아 황실은 그의 연금 및 재산 상속권을 전적으로 아내와 자녀들에게만 인정함을 명했다. 안나는 그 후 38년을 더 살았다. 모스크바의 국립 러시아 도서관(구 레닌 도서관) 앞에 커다란 동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레닌일 거라 추측하는 그 사람은 도스토옙스키다. 그에 대한 러시아 사람들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레닌 도서관 앞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햇살조차 차가운 도시, 공기에 색이 있다면 청색과 회색 그 중간쯤 될 것 같은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주일간 묵었던 방은 서향이다. 오후가 되면 사금파리 같은 햇살이 방안 깊숙이 들어와 종교처럼 이글거렸다. 분명 한 밤중이어야 할 밤 10시, 보랏빛이 감도는 푸르스름한 구름이 초저녁 얼굴로 짙푸른 잎사귀 사이에서 뒹굴뒹굴했다. 그 속에 빠진 내 눈은 압생트라도 한 잔 걸친 듯 황홀했고 그 사소함이 행복했다. 저무는 햇살은 마지막까지 여운처럼 머물다 녹듯이 사라지고 쪽물을 들인 듯 깊고 푸른 어둠이 내렸다. 때로는 보고 있어도 실감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붉은색과 먹색이 뒤범벅된 백야가 그랬다. 밤을 도둑맞았다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낮을 선사받았다 생각하면 하루가 선물이다.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몇 시간째 노을이 번졌다. 붉은 기운을 담은 하늘이 푸른빛으로, 그다음엔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구름 뒤 어디쯤에 해가 있는 것 같았다. 오후 11시쯤 설핏 기울 듯했던 해는 지평선을 따라 수평으로 이동했다. 해가 막 떠오를 무렵의 창백한 보랏빛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커튼을 열고 내다본 텅 빈 도시의 밤은 초현실주의 그림 같았다. 누구나 맛보는 익숙하고 지루한 일상과는 전혀 다른 낯선 풍경이다. 바다처럼 펼쳐진 자작나무와 전나무, 가문비나무의 숲이 또 그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들은 기나 긴 청춘이었다. 




  내가 도스토옙스키나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에서 페이소스를 느끼는 건 동질감이 아닐까 싶다. 그들의 삶이 녹록지 않고 특별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사는 게 그렇다. 누구에게나 슬픈 영역은 있다. 아픔 한 두 자락 걸치지 않은 사람 없다. 슬픔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우리 모두는 슬픔과 아픔을 갖고 있다. 그걸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사는 모습이 누구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 모두는 슬픔을 앓는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랬고 톨스토이도 그랬다. 그러니 억울하지 말 것, 살아가며 때때로 마음 한 자락 비워두거나 열어놓으면 될 일이다. ‘어리석고 허무한 세월의 농담(濃淡)’, 그것이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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