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나무 Jun 25. 2024

이스트리아 진주, 로비니

5. 로비니(Rovinj)







여행 중 자동차를 이용하는 데는 장단점이 있다.

대중교통이 흔치 않은 곳들을 언제든 편히 다닐 수 있지만 가장 불편한 것은 주차이다.

주차장은 대부분 주차 어플이나 구글맵스로 찾는다.

어쨌거나 가고자 하는 주요 장소와 가까이 주차하는 게 중요하다.

건물로 된 주차장인지 노상이면 몇 대나 주차할 수 있는지, 주차 요금은 얼마인지, 가능하면 후기까지 알아본 후 미리 정하고 출발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결정이 나쁘지 않았을 때 일종의 성취감 같은 게 있다.

대부분 크게 어긋나지 않고 만족한 편이다.

로비니 역시 그랬다.

한적한 고급 주택가 주변에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노상 주차장은 주차폭도 넓고 꽤 쾌적했다.

게다가 조금 이른 시간이어선지 빈 주차 공간이 많았다.

내가 주차 머신의 정산을 마쳤을 때 자매들의 차도 도착하여 나란히 세울 수 있었다.



로비니 역시 피란처럼 바다에 면한  작은 마을로 구시가지에서부터 성 유페미아 교회까지 매력적인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해안가에는 낭만적인 카페와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고 연안 섬이나 림 피오르를 돌아보는 보트, 돌고래 투어 보트들을 홍보하는 파라솔들이 항구의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고 있었다.

메인광장 (Trg Marsala Tita)에는 인상적인 시계탑이 있고 피란보다 훨씬 많은 여행자들로 활기 있는 분위기이다.








구시가 초입에 발비 아치(Balbi Arch)가 있는데 한쪽에는 투르크인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베네치아인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로비니 역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빨래 널어놓은 모습을 즐겨 찍는다.

집 외부에 빨래를 걸어놓는 모습은 이탈리아, 크로아티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크로아티아의 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테라물라(Tiramola)라는 빨랫줄은 ‘테라(당기다)’와 ‘물라(놓다)’의 합성어이다.

그러니까 집과 집 사이, 또는 골목길에 빨랫줄을 매어놓고 줄을 잡아당겨 널고 걷는 형태이다.

예전의 크로아티아에서는 집의 발코니가 넓을수록 세금을 많이 물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많은 주민들은 골목을 두고 마주한 집과의 사이에 이렇게 빨랫줄을 연결해서 빨래를 널게 되었단다.

빨래의 컬러도 특징이 있다.

화이트가 많은 집이 있는가 하면, 핑크나 노랑 계열이 많은 집도 있다.

빤닥빤닥한 햇빛과 늘 불어오는 해풍에 춤추듯 말라가는 빨래들에는 삶의 정겨움이 들어있다.





발비 아치



구도심의 언덕에 위치한 성 유페미아 성당(Crkva svete Eufemije)으로 오르자면 그라시아 거리(Ul. Grisia)를 지나게 되는데 화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로비니의 예술인 거리라 할 수 있는 이곳에는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거나 기념품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모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정부가 이 마을의 화가들에게 싼 가격으로 건물을 임대해 주고 예술 활동에 전념하도록 배려한 덕분에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라시아 거리를 따라 쭉 올라가니 로비니 반도의 중심에 우뚝 솟아있는 성 유페미아 성당이 보였다.

이스트라 반도에서 가장 큰 바로크 양식 건물이다. 

로비니 구시가지의 상징으로 도시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당은 15세기의 고딕양식의 조각을 비롯해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제작된 유화 작품들을 가지고 있다. 


성 유페미아 성당의 종탑 역시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종탑과 비슷하다.

종탑 위에는 성 유페미아의 입상이 서 있는데 풍향계처럼 360도 돌아간다고 한다.

유페미아 입상이 로비니 마을을 향하면 비가 오고 바다를 향해 있으면 날씨가 맑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진짜 그 말이 맞을까 싶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데 유페미아는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믿거나 말거나 하는 설이라 해도 왠지 씁쓸했다. 




성 유페미아 성당




풍향계처럼 돌아가는 종탑 위의 성 유페미아 



타워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높이 60m, 그 보다 더 높은 곳도 여러 번 올라갔으니 문제없다고 쉽게 생각했다.

해안선이 오롯이 보이는 로비니의 아름다운 전망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1인당 4유로인 티켓을 구입하여 종탑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보통의 타워가 돌계단인데 비해 그곳은 나무 계단이다.

게다가 계단폭은 내 발의 반 정도만 걸쳐질 정도로 좁은 데다가 경사도 심하고 자칫 잘못하면 발이 빠질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무서운데'


그래도 용기를 내어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약 15개쯤 올라갔을까? 

갑자기 극심한 공포가 몰려왔다.

어찌어찌 올라간다 해도 내려오는 건 더 큰일일 테지?

끝까지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중간쯤에서 오도 가도 못할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포기할 거면 일찌감치 하자 싶어 몸을 돌려 내려오는데 다리가 덜덜 떨렸다.

좁은 계단 사이로 내 발이 쑥 빠질 것만 같았다.


자매들은 씩씩하게 오르고 나는 겨우 내려와 성당 밖으로 나오니 와 심호흡을 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여행 전, 로비니를 검색할 때 어디선가 보았던 문구가 기억났다.


'계단은 심약한 분들은 위험하니, 들어가기 전 이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타워 나무 계단
로비니 전경 (출처 : google)




작은 해안 마을 로비니에 그토록 크고 인상적인 교회가 세워진 이유를 이해하려면 성 유페미아가 누구였으며 왜 그녀가 도시의 수호신이 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성 유페미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 순교한 성인으로, 290년 소아시아 칼케돈(Chacedon)의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15살이 되었을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기독교를 배신하지 않았고 결국 죽음을 맞았다.


그녀는 고문, 투옥, 타격, 바퀴의 고통, 불, 돌의 찌그러진 무게, 짐승들의 이빨, 막대로 괴롭히고, 날카로운 톱의 절단, 불타는 냄비 등의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지 않았고 원형 경기장에 있는 짐승들에게 다시 던져졌을 때 사자는 그녀의 발을 핥았다.     


그녀가 죽은 뒤 칼케돈 사람들은 그 유해를 잘 수습하여 페르시아 군이 쳐들어왔을 때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당으로 유골을 옮겼다. 그러나 800년에 성상파괴운동이 극심해지자 기독교도들은 유페미아의 유골함을 치우라는 압박을 받았다.

이때 바다로 던져진 성 유페미아의 석관이 바닷물에 떠서 로비니 해안까지 왔다고 한다. 


어느 날 이른 아침 교회의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무슨 일일가 싶어 모두 바다로 모여들었다. 바다에 대리석 석관이 마치 배처럼 가볍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경외감을 느낀 로비니 주민들은 말과 소 마차를 이용해 석관을 마을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허사였다. 신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니다.


그때 성자는 한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칼케돈의 유페미아이다. 나는 예수님과 피로 약혼했다. 네가 이 석관을 꺼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소년은 그가 키우고 있던 송아지를 이용하여 석관을 마을 언덕 꼭대기에 있는 교회까지 끌어올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마침내 석관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소녀의 몸이 들어있었다. 그녀 옆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힌 양피지 두루마리가 있었다. Hoc est corpus Euphemiae Sancte!(이것은 순교자 성 유페미아의 시신입니다.)

지금도 로비니에서는 매년 9월 16일(유페미아가 죽은 날)을 성 유페미아의 날로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그날 주민들은 사우어 크라우트를 곁들인 양고기와 이스트리아의 전통적인 디저트인 프리툴레를 나눠 먹으며 기념한다고 한다.




성 유페미아
유페미아의 발을 핥고 있는 사자
석관을 옮기는 소년과 소
유페미아의 석관




바다가 보이는 좁은 골목 틈으로 보이는 옷가게에는 해변에서 잘 어울릴법한 원피스와 자잘한 꽃무늬 테이블보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곳의 여주인은 여행자들을 위해 이 포토존의 장식을 매일 바꾼다고 한다.

사진을 찍고 나면 테이블 위에 놓인 쇼핑백에 소액의 기부금을 던지면 된단다.


바위에 올려놓은 몇 개의 쿠션과 방석, 그리고 비비드한 컬러로 색칠한 나무 의자와 테이블, 건너편에 보이는 섬과 하늘, 누구나 행복한 표정,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꿈처럼 흘러간다.


내가 원래 숙소로 정하고 싶었던 곳이 바로 로비니였다.

하지만 구시가지에는 주차장 및, 방의 개수를 비롯하여 내가 원하는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곳이 없었다.

풀라로 예약한 후에도 몇 번이나 거듭해서 검색을 하곤 했지만 결과는 같았었다.

과연 로비니에 와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다.

또한 아름답긴 하지만 5박 할 정도의 숙소로는 여행자들이 너무 많아 번잡스럽고 소란스러워 적절치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쉬움이 있을 때 더 빛날 수 있다.

로비니는 그런 곳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르티니의 고향, 피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