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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24. 2024

타르티니의 고향, 피란

4. 피란(Piran)






특별할 게 없던 트리에스테에서의 3박은 빠르게 지났다.

오늘은 크로아티아의 풀라로 이동하는 날이다.

내가 이용할 자동차를 렌트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틀 전, 자매들의 자동차를 렌트할 때 너무 오래 기다렸던 것을 감안하여 아침 일찍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벌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으나 진행은 빠른 편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예약 상태를  확인한 직원이 하는 말,


'당신은 자동차를 9시 30분부터 빌리는 것으로 예약했군요. 그런데 아직 시간이 안되어서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그 시간에 맞춰서 다시 오세요.'


그때 시각이 오전 9시

내 뒤에는 3~4팀의 예약자들이 줄을 서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 30분에 해당하는 금액을 더 내면 안될까요?'   

직원이 말했다.

'이미 예약된 서류를 내가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여러 나라에서 여러 번 렌트를 했고 그때마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빠르게 포기하고  맨  뒷 열로 가서 다시 줄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줄을 서서 기다린 다음 차 키를 받은 시각은 9시 50분,

아침부터 진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A sisters는 이미 오래전 그들의 숙소를 출발할 상황이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자매들과 미리 약속한 대형 슈퍼 마켓 Discount로 가니 이미 장을 보고 있었다.

그곳은 트리에스테를 벗어나 30분쯤 걸리는 외곽이다.

생수 등 식재료와 필요한 생필품을 넉넉하게 사서 차에 싣고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그전에 나는 비넷(vignette) 스티커를 구입해야 한다.

비넷은 자동차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등 국경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스티커로 온라인이나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구입할 수 있다.

마트를 출발하여 얼마 안 가서 비넷을 구입할 수 있었다.

A sis는 전 날, 블레드 호수에 갈 때  이미 비넷을 샀으므로 나만 사면 되었다.




국경 통과에 필요한 비넷 스티커




풀라 숙소의 체크인이 오후 4시 이므로 중간에 피란에 들러 구경을 하고 점심도 먹기로 하였다.

피란은 아주 작은 마을이라 올드 타운 안에는 주차장이 없다.

미리 검색한 유로 주차장 지하에 주차를 하고 나왔지만 한참 전에 도착했으리라 생각했던 A sis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주차하고 밖으로 나왔어, 어디 있니?'

메시지를 보내고 뜨거운 햇살을 피해 근처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지만 답장이 없었다.

메시지를 확인하니 자매들 3명이 모두 읽음으로 확인되었으나 누구도 답을 하지 않는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잠깐 불안한 마음이 스쳤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우리가 착각해서 곧장 풀라로 가고 있었어. 지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 마시고 있는데 어떡하지? 여기서 다시 피란으로 돌아가려면 45분쯤 걸리는데 우리는 그냥 풀라로 갈까?'


이미 풀라의 호스트에게 4시쯤 도착할 거라고 얘기를 해놨고 그때 시간이 12시도 안 된 터라 곧장 간다고 해도 체크인이 불가할 터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오는 게 좋겠어. 점심 먹을 레스토랑 물색해 놓고 기다릴 테니 조심해서 천천히 와.'

'알았어.'


그리고 잠시 후 1시 도착 예정이라는 메시지가 왔다.

그 사이 나는 B와 피란의 성벽에 올랐다.

피란이 베니스 공화국의 일부였을 때, 터키의 침략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된 성벽이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시절에 대부분이 파괴되고 지금은 200m 정도의 짧은 성벽만 남아있다.

주황색 지붕들이 삼각형의 해안선을 따라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슬로베니아의 대부분은 아드리아 해까지 뻗어 있는 작은 땅을 제외하고는 내륙으로 둘러싸여 있다.

슬로베니아 이스트리아라고 불리는 이 짧고 아름다운 해안선에는 코페르(Koper), 이졸라(Izola), 그리고 피란(Piran)이라는 세 개의 작은 해안 마을이 있다.

그중 피란은 오래전에 방송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 소개되어 더 알려진 곳이다.


1283년부터 1797년까지 500년 동안 피란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였다.

1797년 이후 피란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의 통치를 오가다가 1954년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되었으나 1991년부터 슬로베니아에 속하게 된 곳이다.




피란 성벽
성벽에서 내려다보이는 피란




좁은 돌길을 따라 내려오니 곧장 타르티니 광장(Tartini Square)에 다다랐다.

광장의 이름은 이곳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주세페 타르티니(Guiseppe Tartini)의 이름을 딴 것이다.


주세페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1692년 4월 8일 ~ 1770년 2월 26일)는 비발디와 같은 시대의 작곡가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이다.

타르티니는 새로운 바이올린 주법의 연구에 심혈을 다하고 있을 때였다. 꿈에 악마가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잠에서 깬 후 기억을 더듬어 그 곡을 악보에 기록했는데 바로 그것이 '악마의 트릴'이다. 그 호칭은 3악장 말미에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기 매우 어려운 트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꿈속에서 악마에게 배웠다는 이유로 작곡가 자신이 붙인 제목이다.


파스텔톤의 건물들과 흰색의 대리석 같은 바닥, 낮게 가라앉은 구름과 바다, 그리고 광장 뒤로 우뚝 솟아 있는 성 조지 성당의 종탑은 보수 중이라 아름다운 경관에 옥에 티였다.




타르티니 광장의 타르티니(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있다)


한적한 타르티니 광장
앙증맞은 집 모양 장식의 주소 타일
피란 해변
옛날 등대
노부부의 망중한




내가 선택한 곳은 해산물 레스토랑 <Pavel 2>


'우리는 5명인데 3명은 잠시 후에 올 거예요.'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 자리로 안내받아 메뉴를 살피는데 A sis들이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자매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미리 음식을 주문했다.

버터에 볶은 홍합은 짭조름하지만 감칠맛이 있었고 해산물 스파게티 등 모든 메뉴의 식재료가 신선하고 맛있었다.

살짝 구름이 낀 한가한 해안선은 운치를 더하고 독특한 모양의 오래된 등대는 빨강과 초록빛으로 마을을 빛나게 만들었다.


'언니, 여기 너무 예뻐, 돌아오길 잘했다.'


그리고 A sis들의 밝고 환한 웃음소리가 악마의 트릴을 비웃듯 광장을 타고 퍼져나갔다.




Pavel 2
피란 호텔
성벽에서 바라본 타르티니 광장



피란에서 늦게 합류한 자매들은 미처 못 간 성벽을 오르기로 하고 나는 먼저 풀라로 출발했다.

나의 숙소는 셀프 체크인이지만 자매들의 숙소는 호스트가 맞이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선 나의 숙소를 찾아 체크인한  후 자매들의 숙소로 가서 호스트를 만날 요량이다.

내가 모든 숙소를 예약했기 때문이다.

첫 숙소 트리에스테는 자정이 넘어 도착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숙소 열쇠를 찾아 문을 열어주고 난 후 나의 숙소 체크인을 했었다.

에어비앤비를 처음 이용하는 자매들은 모든 게 생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풀라의 숙소 주변에 도착했고 자동차가 출입하는 철문은 찾았지만 도무지 숙소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급한 대로 자동차를 장애인 주차구역에 잠시 주차하고 입구를 찾아 나섰다.

드디어 차량이 드나드는 커다란 철문 옆에 있는 작은 쪽문을 발견했다.

호스트가 알려준 곳에서 자동차 출입문 리모컨과 숙소의 열쇠를 찾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내가 주차해 놓은 바로 건너편에 경찰차가 막 정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허겁지겁 자동차 시동을 걸어 이동하는데 그 사이에 자매들은 이미 풀라 숙소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내가 입구를 찾아 헤매는 동안 그들이 벌써 온 것이다.

일방통행 도로에서 차를 겨우 돌렸다.


'언니! 호스트를 만났는데 우리 여권 사진을 찍어가야 된다는 수상한 얘기를 하는데 그게 맞아?'

'응, 맞아, 호스트는 관할 관공서에 여행자 등록 신고를 해야 되거든. 트리에스테에서는 셀프 체크인이라 내가 사진으로 보냈었지.'

'아~ 그렇구나. 알았어.'

'내가 사정이 있어서 늦어져서 미안해. 잊지 말고 호스트에게 선물 챙겨 드리는 게 좋겠어.'


한사코 여권을 내놓지 않는 자매들의 행동이 이상하게 여겨졌던 건 호스트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자매들이 나와의 통화를 끝내고 여권과 선물을 건네니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더란다.


캐리어와 마트에서 사 온 생수며 식품들을 옮기고 나서야 발코니로 나가보았다.

내가 그 집을 선택한 이유는 한 가지,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푸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발코니 뷰 때문이다.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아침 일찍 렌터카 사무실에서부터 풀라에 도착하기까지 참 여러 일이 있었다.

힘들었지만 발코니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마법처럼 모든 게 잊혔다.


다음 날, 자매들의 숙소 호스트에게 이만저만했던 내 사정을 메시지로 전달하여 알려주었다.

호스트는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고 하며 고마워했다.

이제  진정한 이스트리아를 즐길 일만 남았다.


접시에 수북이 올려놓은 루꼴라, 하얀 모차렐라 치즈와 올리브, 반으로 자른 체리 토마토와 청포도 위에 소금 후추를 살짝 뿌린 후 올리브유를 듬뿍 뿌렸다.  

그리고 마트에서 집어온 잭 다니엘의 병뚜껑을 열었다.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영화 맨 온 파이어를 본 후 즐기게 된 테네시 위스키로 향이 좀 강한 특징이 있다.

에어비앤비 숙소에 글랜캐런 글라스가 있을 리 없지만 유럽은 어디든 와인잔은 거의 갖추고 있다. 

커다란 와인 잔에 위스키를 따르자 잭 다니엘은 나를 위해 행복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꼴꼴꼴꼴꼴...




풀라 숙소 발코니에서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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