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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23. 2024

커피와 지젤,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

3. 트리에스테(Trieste)







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작품 중 'valse Triste'라는 관현악곡이 있다.

'슬픈 왈츠'라는 뜻이고 한동안 즐겨 듣던 음악이다.

트리에스테(Trieste)라는 지명을 처음 보았을 음악이 생각났다.



'valse Triste' 출처 : Youtube



뭔가 슬픈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이름, 트리에스테는 여행의 징검다리 같은 의미랄까?

이스트리아 반도의 몇몇 소도시들을 돌아보기 위해 거쳐가는 도시로 삼은 곳이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나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보다는 시간적인 효율성으로 볼 때 접근성이 나아서였다.


그러니까 트리에스테는 어떤 목적보다는 이번 여행의 편의성을 위해 선택된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반전이 있었다.

주세페 베르디 극장이 있고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갔을 때 작가 박물관에서 만났던 제임스 조이스가 살았었고 그와 카프카가 단골로 다녔다는 카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도시가 궁금해졌다.

게다가 그 지역 사람들은 안 그래도 커피를 좋아하는 이태리 사람들보다 두 배의 커피를 마신다는 거다.

일리(Iliy) 커피 1호점이 있고 역사적인 카페도 여럿 있다는 사실이 숨은 진주 같았다.  



일리 커피




푸른 물감을 한 방울 더한듯한 청보라색의 외벽과 하얀 창틀을 가진 숙소는 분명 비엔나풍이다.

모퉁이 집이라 삼 면의 각각 다른 풍경을 선사했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그게 어디든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 아침 산책을 나가곤 한다.

영롱한 새소리, 키가 큰 나무들, 바다 내음이 살짝 섞인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렌터카를 픽업할 시간은 아직 멀었지만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여긴 유럽이야 하는 듯 어김없이 작은 성당이 보이고 누군가의 창틀 앞엔 용도를 알 수 없는 책 무더기가 놓여 있다.

상점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거리는 청소를 하는 사람들 외에 오가는 이가 거의 없이 한산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플로리스트 아리아나는 묻지도 않은 그곳의 정보들을 알려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작은 캐리어를 끌며 지나가던 한 중년의 남자가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졌다.

아리아나는 남자를 불러 세워놓고는 군대 조교처럼 나무랐다.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비슷하다.

그녀의 오지랖 넘치는 푸념을 듣다가 인사를 나누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에 도착했다.








트리에스테는 1382년에서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국의 주요 항구였다.

비엔나, 부다페스트, 프라하에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4 도시였으며 문학과 음악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였다.     

합스부르크의 영향을 입어 바다 위의 작은 비엔나로 불리듯 건축물은 물론이요, 도시의 분위기가 여태컷 보아왔던 이탈리아와는 좀 달랐다.

일반적으로 유니타 광장(Piazza Unità)이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광장은 바다가 열린 면을 제외한 3면이 시청과 궁전, 해군 사령부 등의 건물로 둘러 쌓여 있다.

시청 앞에는 4대륙을 나타내는 분수가 있고, 분수 오른쪽에는 카를 6세의 동상이 있다.

바다 쪽으로 수선화 모양의 깃대가 두 개 서 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군인들을 위한 것으로 엄숙한 깃발 게양과 하강이 거행된다고 한다.




트리에스테 시청
4대륙 분수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의 마르코 광장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했다지만 트리에스테의 이탈리아 광장(Piazza Unità d'Italia)은 그에 뒤지지 않는 매력이 있다.

왜냐하면 시청이 바라보는 정면에 아드리아 바다가 영화관 스크린처럼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 좋은 기온, 적당한 바람이 좋다.

광장 한쪽의 돌 벤치에 앉았다.

그곳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가끔은 바다 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릴없는 그 시간이 편안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 그 공간에 들어가 있음이 좋다.

여행은 별 게 아니다.

낯섦을 즐기는 것 또한 즐거움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해변 도로를 따라 1km쯤 걷다 보니 지난밤 기차에서 내렸던 첸트랄레 역이 보였다.

렌터카 사무실은 기차역 옆에 있는 버스 터미널 건물 1층에 있다.

버스에서 하차한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문 옆에 작은 사무실이 있었는데 의외로 차를 빌리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었다.

 

사무실 안의 여행자들은 예약 없이 차를 빌리러 왔는지 거의 40분이 넘도록 나올 기미가 없다.

게다가 옆의 바에서 소꿉놀이 같이 작은 잔의 에스프레소를 사다가 홀짝홀짝 마시기까지 한다.

내 앞에 줄을 서 있던 아저씨 마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때 노매드 스타일의 한 여성이 지도를 들고 내게 오더니 뜬금없이 베니스로 갈 거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니 주변 남자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며 지도를 들이밀고 현 위치에서 어떤 길로 이동해야 하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여인이었다.

스마트 폰도 있고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지도에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네 명의 여행자가 떠나고 내 앞의 아저씨 두 분은 비교적 빨리 렌트 업무를 마쳤다.

드디어 내 차례다.

그런 게 있다.

자세히 들으면 영어인데 무심코 들으면 이탈리아어 같고 인도어 같고 스페인어 같은...

나라마다 독특한 억양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싶다.

업무를 보는 50대 여성의 말도 그랬다.

아무튼 소통에 문제는 없었고 서류 작업을 마친 후 차가 주차되어 있는 4층으로 올라갔다.

자동차를 받기까지 거의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맙소사'


지난해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 주차장의 악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거니와 이태리 자동차들은 거의 소형이기도 한 이유겠지만 4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 경사로가 무척 좁았다.

그때처럼 9인승 밴이 아닌 7인승 suv라는 게 유일한 위로고 희망이었다.

게다가 자동차는 정면, 후면, 측면의 경보음 옵션이 없다.

SH는 과감하고 침착하게 그곳을 벗어났다.


해안도로를  타고 미라마레 성(Miramare)으로 달렸다.

미라마레는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저 멀리 청록색 바다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새하얀 성이 보였다.

미라마레 성은 막시밀리안이 지은 곳이다.

막시밀리안은 라컨 궁전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 샤를로테를 만나 첫눈에 반해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고 아내를 위해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정원사 등을 동원해 바다가 보이는 곳에 최고의 성을 지었다.

그 후 성주들이 여럿 바뀌었는데 그때마다 성주들이 끔찍하게 사망하는 일이 잇따랐다고 한다.

전설 같은 스토리와는 상관없이 바다로 이어지는 정원과 아름다운 화이트 성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호스트가 알려준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예약을 했느냐고 물었다.


'예약은 안 했는데 주차할 수 없나요?'

'가능해요. 언제까지 주차할 건가요?'

'내일 아침 9시요.'

'18유로입니다.'


분명 무료 주차장이 있는 숙소였고 호스트가 알려준 곳이라 의아했지만 일단 주차료를 내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주차료에 대한 문의를 하려고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호스트 가브리엘레에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용인즉

'주차할 때 가브리엘레의 이름으로 예약했다고 말하면 된다.'

나는 옷도 바꿔입지 않은 채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 출차할 때에는 다른 직원이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기에 아침까지 기다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에게 가브리엘레의 말을 전하니 흔쾌히 주차료 18유로를 내주었다.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괜한 돈을 쓸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그날 저녁은 발레 '지젤'을 보러 가는 날이다.

베르디 극장에 가기 전, 광장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 후 발레를 보기로 했다.

한때 내부의 방을 장식했던 대형 거울로 인해 거울의 카페(caffe degli specchi)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가 단골이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블랙과 화이트의 원피스에 은은한 스카프로 멋을 낸 세 자매가 나타났다.


우리가 선택은 그곳의 시그니처라는 "Capo in B"

매년 이 지역의 바리스타들은 카포 인 비의 완벽한 서비스를 시연하기 위해 경쟁하는 챔피언십이 있을 정도란다.

카포(Capo)는 카푸치노의 줄임말이고, B는 비키에레(Bicchiere,이탈리아식 작은 술잔)의 줄임말이다.

쉽게 말해 작은 잔에 담긴 카푸치노와 그보다 더 작은 유리잔에 핫 초코가 들어있다.

그 두 가지를 기호에 맛게 섞어 마시면 되는데 예상보다 맛있다.




caffe degli specchi
Capo in B




베르디는 이탈리아 왕국의 오페라 작곡가지만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 오페라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오페라의 거인이라고 불린다.

베르디 극장은 1801년 완공되었고 1300석이다.

극장의 이름은 처음에 '산 피에트로 극장'으로 출발하여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1901년, 밀라노로부터 위대한 베르디 선생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트리에스테시는 베르디가 운명하기 며칠 전, 극장 이름을 테아트로 베르디로 변경하였다.

그렇게 트리에스테의 테아트로 베르디(베르디극장)는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소프라노 조수미가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주인공 '질다'역으로 세계 무대에서 데뷔한 곳이다 (1986년)



베르디 극장
트리에스테의 주세페 베르디




베르디 극장 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한 신사가 말을 건넸다.


'일본인인가요? 아니면 중국인?'

'한국에서 왔어요.'

'Wow even better.'


그는 한국 에이전시와 일을 했던 적이 있다면서 무척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세련되고 익숙한 매너 가득한 몸짓으로 극장의 육중한 문을 정중하게 열어주었다.


지젤은 프랑스 작곡가 아돌프-찰스 아당(Adolphe-Charles Adam)의 2막 발레이다.

유명한 캐럴 송 'Oh holy night'가 아당의 작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2막의 처연함을 좋아한다.

지젤의 묘지가 있는 어두운 숲 속에서 윌리(억울하게 죽은 유령)들과 춤을 추며 사랑했던 남자를 용서하는 장면이다.

약 1300석의 베르디 극장은 공연장 내부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과 비슷하지만 극장 내부는 소박했다.

2막의 발레가 끝나고 마지막 무대 인사를 하러 나온 사람들 중에서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지젤 2막 장면 중 (출처 : 베르디 극장 홈피)
지젤 무대 인사 (출처 : 베르디 극장 홈피)




'아니 저 사람은 아까 만났던?'


직감적으로 그가 안무가이며 총감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라는 영화 대사 같이 문을 열어주었던 그가 그날의 발레 지젤의 안무가이며 총감독이었던 것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의 발레리노 호세 카를로스 마르티네즈(José Carlos Martínez)

스페인 국립 무용단의 예술 감독이다가 2022년 12월부터 파리오페라 발레단 무용감독으로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포스가 남다르다 했다.




José Carlos Martínez (출처 : Google)



이 여행은 원래 나와 B, 두 사람으로 계획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친구의 동생인 세 자매(A sisters)가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숙소도 두 곳, 렌터카도 두 대를 예약하여 모두 다섯 명이 함께 하였다.

계획된 일정은 다음 날,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였다.

하지만 아직 여독이 남아있는 나와 B는 트리에스테에서 여유 있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세 자매들은 블레드 호수로 향했다.




시립 박물관
트리에스테 델라 보르세 광장의 분수




트리에스테에서 나의 관심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

대체 그는 더블린에서 2000km도 넘게 먼 이곳에 왜 왔으며 얼마동안 살았을까?

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대 운하에서 바라보면 폰테 로소라는 다리가 있다.

그 다리에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모습의 제임스 조이스 동상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가 트리에스테에 도착한 지 100주년이 되던 2004년,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동상아래 현판에는

'내 영혼은 트리에스테에 있다.'라는 글이 쓰여있다.




트리에스테 대운하
제임스 조이스




그는 그의 초기 작품들인 실내악, 더블린 사람들, 초상화, 망명자들, 자코모 조이스를 이곳에서 썼다.

그가 트리에스테로 간 것은 베를리츠 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려던 목적이  있었으나 그가 도착했을 때 그 자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에 조이스는 이탈보 스베보(본명 에토레 시미츠 Ettore Schmitz, 이탈리아의 소설가)의 영어 가정교사로 일하며 그와 친분을 쌓았다.


조이스는 1904년 10월 트리에스테에 도착하여 거의 16년이 지난 1920년 7월 파리로 떠나 파리에서 우연찮게 율리시스를 출판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실비아는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운영자이다.

실비아의 가게는 작가들 사이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책을 내고 인세를 기다리고 있는 가난한 작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프랑스 프랑으로 대출도 해주었다.     

어느 날, 프랑스 시인이 주최한 디너파티에서 아일랜드 출신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실비아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가 율리시스(Ulysses)를 출판하려다 실패했다는 걸 알게 된 비치는 그의 출판을 도왔고 제임스는 1922년에  상당한 명성과 부를 얻게 되었다.


https://brunch.co.kr/@silviano/254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쓰기 전 이미 매독에 걸렸다.

그러므로 그는 생애 대부분 동안 시력이 안 좋아 고생했고 결국 거의 눈이 멀었다.

그는 파리에서 20년 동안 살다가 2차 대전 당시 나치를 피하여 취리히로 망명했고 1941년 사망하여 떠돌이 삶을 마쳤다.



제임스 조이스
이탈보 스베보(본명 에토레 시미츠 Ettore Schmitz,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리아 시인, 소설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제임스 조이스 박물관을 찾아갔다.

구글에는 임시 휴업 중이라고 안내되어 있었지만 그곳은 작은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 제임스 조이스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창문에 남아 있는 그의 사진을 찍은 후에 발걸음을 옮겼다.



 

제임스 조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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