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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15. 2024

난생처음 컴플레인

20. 바리 (Bari)






새벽에 우다다다 하는 요란한 소리에 잠을 깼다.

문을 열어보니 얼음 알갱이들이 뜨거운 팬 위에서 통통 튀는 콩처럼 거세게 떨어지고 있었다.

우박을 본 일이 흔치는 않지만 그렇게 큰 건 처음이다.

우박은 순식간에 눈처럼 쌓였고 그늘진 곳은 다음 날까지 녹지 않았다.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프레스코화는 지금껏 숱하게 보아왔던 중 단연 최고이다.

그곳 역시 1년 전에 갔었지만 촬영을 금하기 때문에 당연히 남아있는 사진이 없다.

그리움을 떨치려면 다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아씨시로 향했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하부 성당을 본 후 성 프란체스코의 무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사람들은 침묵했고 마음이 숙연하다.


하부 성당에서 밖으로 나가면 성물 보급소가 있는데 규모가 아주 크다.

가격도 무척 저렴하고 아름다운 성물이 많다.

라틴어가 새겨진 은반지 하나를 구입하고 상부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조토가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그린 28면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거의 한 시간을 그곳에 앉아있었다.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비발디 작곡)라는 곡이 있다.

이 세상에 고통 없는 참 평화는 없다는 노랫말이 들어있는 칸타타인데 들을 때마다 평화를 느끼게 된다.

그 음악을 들을 때처럼 성당에 앉아있었을 뿐인데 마음이 편안하다.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2023년 브런치

https://brunch.co.kr/@silviano/236



성당 정면에 포도나무를 프레임처럼 키워놓은 레스토랑의 테라스가 있다.

물론 실내에는 좌석이 많지만 성당이 바라보이는 그 좌석은 테이블이 딱 하나뿐이다.

1년 전, 그 자리에 앉아있던 부부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비어있다.


'우리 저기서 커피 마셔요.'


커피는 조연이고 목적은 사진이다.

못다 푼 한을 풀듯 사진을 찍었다.




BB (동의 후 사진 게재)






아씨시의 평원이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le terrazze di properzio)은 뷰 못지않게 음식도 훌륭했다.(구글 평점 4.7)

치즈 살라미 플래터, 슬라이스 스테이크, 생선 튀김 등이 재료 본연의 맛을 잃지 않게 요리하여 담백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었다.

A자매들의 큰 언니, 그러니까 내 친구 J가 도네이션 한 금일봉으로 근사한 식사를 했고 비숫한 뷰를 가진 모토분을 이야기했다.

그곳에 간지 20여 일이 지났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








 







다음 날, 마침내 토스카나에서의 12박이 끝난다.

피렌체로 돌아가 자동차를 반납하고 바리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

문제는 주차장에 차를 반납한 후 사무실로 돌아가 렌트 업무를 마쳐야 하는 번거로움이다.(주차장과 사무실의 거리가 2km쯤 떨어져 있음)


이럴 때 호스트 찬스가 필요하다.

스테파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반납하고 사무실에는 들리지 않아도 되는지 물어봐달라고 말이다.

다행히 그래도 된다라는 답을 받았다.  


숙소가 있는 카안차노 테르메에서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까지는 구글맵스 상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는 늘 다르기 마련이다.

그 시간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우선 캐리어를 기차역에 내려놓고 차를 반납할 주차장까지 가야 한다.

거리는 2.6km, 역시 구글맵스는 6분이 소요된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6분은 어림 턱도 없는 소리다.

차를 반납하고 역까지 걸어가는 데 약 20분.

구글의 이론으로는 이 모든 일정이 2시간이면 된다.


나의 생각은 달랐다.

적어도 3시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기에 6시에 숙소를 출발하기로 했다.


9시 43분 출발하는 기차를 타려면 차를 반납하고 늦어도 9시 30분까지는 역에 도착해야 한다.

바리까지는 6시간이 소요되는데 그 기차를 놓치면 그날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루에 운행하는 기차가 몇 편 밖에 없는 데다가 환승 없이 가는 기차는 그게 유일하다.

게다가 그날 그 기차티켓은 솔드 아웃이었다.


고속도로를 문제없이 빠져나와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길에 다다랐다.

예상대로 러시 아워라 더 복잡하다.

일방통행의 좁은 길로 접어든 차는 거북이걸음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비게이션은 빨간 불이 떡 하니 켜있는 ztl구역으로 진입하라고 한다.

그곳은 작년에 내가 묵었던 숙소 부근이라 어디쯤인지 아는 익숙한 길이다.

통행 제한 구역으로 들어가면 큰 벌금을 물어야 하므로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미켈란젤로의 언덕 방향이니 왼쪽으로 갔다.

내비게이션은 새로운 경로를 탐색했고 그렇게 돌아 돌아 어찌어찌해서 기차역에 도착했다.

당연히 많이 지체되었고 마음이 급하다.


B와 캐리어를 내려놓고 자동차를 반납할 주소를 입력한 후 지체 없이 출발했다.

600m를 가는데 10분이 넘게 걸렸다.

목적지를 1.5km쯤 남겨둔 위치에서 길의 모양이 애매하다.

내비게이션의 남자는 상냥한 목소리로 '살짝 우회전입니다.'라고 안내하는데 그 살짝이라는 기준을 선택하기에 모호한 두 갈래 길이다.


그중 한쪽을 선택하여 들어서자 내비게이션은 띠링띠링 소리를 내며 경로가 잘못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이럴 때 설상가상이라고 하던가?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무려 3.5km로 늘어났다.

그때가 8시 40분,

'주차장까지 9시까지만 도착하면 돼' 스스로를 다독이며 침착하게 운전을 했다.


슬로비디오처럼 느릿하게 한참을 돌고 돌아 문제의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 또 한 번 길을 잘못 들었다간 진짜 큰 일이다.

아까 갔던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신중하게 들어섰다.

그렇게 가까스로 주차장에 도착한 게 9시 2분,

차량 상태와 주유 게이지 확인을 끝낸 직원이 가도 된다는 말을 할 때까지의 그 짧은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13일 동안 1600km를 달리며 나의 발이 되어준 자동차 <GJ 099VS>

꼬불꼬불 산길은 기본이고 툭하면 나타나는 오프 로드, 열 곳이 넘는 지역을 아침이나 저녁이나 묵묵하게 달려준 'KUGA'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드라이버를 만나 하루에도 열 번, 스무 번을 멈춰도 비상등을 깜빡이며 충견처럼 기다려준 'KUGA'

첫날부터 키의 배터리를 교체하라고 하는 데도 끝까지 서지 않고 잘 참아준 'KUGA'

자동차 덕에 어디든 언제든 갈 수 있었기에 여행은 더 풍요롭고 편했다.

'고마워 KUGA'

  

'가도 됩니다.'


이제 역까지 가기만 하면 된다.

마치 미션을 수행하는 요원 같다.

피렌체에서는 택시도 버스도 아닌 걷는 게 가장 빠르다.

거의 뛰다시피 역으로 향했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애를 태웠는지 땀이 비 오듯 한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급한 대로 화장실부터 찾았다.


그나저나 자매들은 잘 찾아오고 있는지 궁금하던 차에 메시지가 왔다.

차는 반납했고 그곳 직원이 역까지 태워다 준다고 해서 차를 타고 오는 중이란다.


'차 타고 오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릴 텐데.'


그리고 얼마 후 자매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타고 오다가 길이 하도 막혀서 중간에 내려서 걸어왔단다.

그렇게 아슬아슬하지만 무사히 바리 행 기차에 올랐다.


또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캐리어를 보관하는 칸에 빈틈이 없다.

그때 한 남자가 선반 위에 올려줄까 물었다.

너무 커서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하자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면서 번쩍 들어 올려 선반에 올렸다.

20kg이 넘는 무게를 가볍게 말이다.

멋지고 존경스러웠다.

누비 손지갑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차오 토스카나~ '


피렌체를 출발한 기차가 제일 먼저 정차한 곳은 '로마 티부르티나 역'

1년 전,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그곳에서 잘못 내렸던 기억이 나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한 아주머니가 기차 통로 건너편 좌석으로 들어왔다.

키가 작고 마른 몸매에 주름살이 많다.

크고 작은 캐리어 2개, 손잡이를 끈으로 묶은 보스턴백, 어깨에 맨 가방 등 짐이 많다.

민소매 줄무늬 원피스는 허벅지까지 트였고 네크라인은 쭈글쭈글한 목과 가슴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있다.

손목엔 알록달록한 팔찌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뾰족구두를 신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눈에 띄는 스타일이고 범상치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켓 검사를 하는 승무원이 다가왔다.

승무원이 티켓을 보여달라고 말하자 그녀는 원피스의 가슴 쪽으로 거침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놀랍게도 거기서 접힌 종이 티켓을 꺼냈다.


승무원이 기차를 잘못 탔으니 다음 역에서 내려서 바꿔 타라고 했다.

이태리어를 알아들은 건 아니다.

그녀가 건넨 티켓에 트랜 이탈리아(tranitalia, 국영 기차) 마크가 새겨져 있는 게 보였을 뿐이다.

우리가 탑승한 기차는 이탈로(Italo, 민영 기차)로 회사가 다르기 때문에 그녀가 기차를 잘못 탔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트랜이탈리아 티켓
이탈로 티켓




그리고 20~30분 후, 다음 역에 도착했으나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그 좌석의 티켓을 가진 승객이 자리를 찾아왔지만 그녀는 안하무인으로 큰 소리를 내며 비켜주지 않았다.

짐도 많은데 기차를 바꿔 타기 번거로우니 목적지까지 갈 요량으로 보였다.

좌석의 주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다른 빈자리에 앉았다.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이국에서 만난 여인의 굴곡진 삶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로마를 지나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곳들을 지난다.

안내 방송에 나오는 승무원을 따라 조용히 따라서 소리를 내본다.

길이와 억양이 중요하다.

베네벤토 같은 경우 베네는 빠르게 소리 내고 벤은 길고 높게 소리 낸다.

Caserta, Benevento, Foggia, Barletta, Trani, Bisceglie, Molfetta







오후 4시 40분, 6시간 만에 이태리 지도의 장화 뒷굽쯤에 위치하는 바리에 도착했다.

그곳 풀리아 지방의 여행은 주로 기차를 이용할 계획이라 중앙역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숙소까지는 각각 400m, 600m

각각의 집을 찾아 출발했다.

그곳 역시 밀라노에서처럼 열쇠 대신 비키 어플을 이용해 문을 따고 들어갔다.

1층이지만 엘리베이터가 있어 편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숙소는 사진에서 보던 것과 다르지 않게 깔끔하고 편리한 구조이다.

변기커버에는 호텔처럼 청소를 마쳤음을 알려주듯 띠지가 둘러져 있다.

그러나 변기 뚜껑을 연 순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반전이 펼쳐졌다.


'Oh my God'


거기서 끝이 아니다.

주방 집기를 살펴보려고 수납장을 열어보니 냄비와 컵, 접시들의 세척 상태가 이만저만 더러운 게 아니다.

키친타월은 물론 심지어 주방 세제도, 세탁 세제도 없다.

7박을 해야 하는데 화장지는 달랑 2 롤뿐이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숙소를 사용했지만 최악의 컨디션이다.

숙소 선택을 잘못했다는 생각에 먼저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냥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컷의 상세 사진과 시정해야 할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호스트 피나(PINA)에게 답장이 왔다.

본인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니 방문해도 되냐고 묻는다.

지금 바로 오라는 말에 그녀는 현재 알베로벨로에 있기 때문에 7시가 넘어야 가능하단다.


아쉬운 대로 그릇들을 씻고 저녁 식사를 하는 중 그녀가 숙소로 찾아왔다.

피나는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수수한 아주머니 같은 인상이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비닐봉지 3개와 화장지 한 팩이 들려 있었고 뛰어왔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실과 주방 등을 차례대로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청소하는 사람이 청소를 마쳤다는 연락을 받아서 잘 끝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이럴 줄 몰랐고 정말 미안하다며 본인이 청소하고 식기를 닦도록 해달라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으니 걱정 마라고 했더니 피나는 너무 창피하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무겁게 들고 온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주방 세제, 세탁용 세제와 화장지는 내가 요구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한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커피, 소금, 올리브유, 티, 설탕, 모차렐라 치즈, 부라타 치즈, 방울토마토, 빵, 전통 과자, 캔디 등...








호텔도 그렇지만 에어비앤비 역시 평점과 리뷰가 무척 중요하다.

쉽게 말해 슈퍼 게스트 격인 내가 숙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후기에 써놓는다면 그 타격은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피나가 평점이나 리뷰를 부탁하는 말을 하지 않았던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준비해 갔던 선물을 그녀에게 건넸다.

피나는 그 상황에 선물까지 주는 내게 감동을 했는지 허그를 하며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알베로벨로의 한 B&B에서 셰프로 일을 한다는 그녀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모레는 기온이 32도까지 올라갈 거라며 에어컨을 아끼지 말고 사용하여 시원하게 지내라고 말했다.

그렇게 불쾌했던 숙소의 커디션은 진심 어린 사과와 이해로 해피 엔딩을 맞았다.

그녀가 돌아간 후 내가 준 선물을 콘솔 위에 놓고 간 게 보였다.

잠시 후 메시지가 왔다.


'선물을 놓고 왔어요, ㅜ.ㅜ'

'걱정 말아요, 여기 잘 놔둘게요.'


에어비앤비는 호스트가 직접 관리하고 청소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그러므로 호스트가 그때마다 방문해서 체크하지 않으면 숙소의 컨디션이 어떤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오이를 썰 수 없을 정도로 칼이 잘 안 들거나 수세미가 낡을 대로 낡아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인 경우도 있다.

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대로 놔둘 리가 없다는 거다.

그런 경우 체크 아웃한 후 호스트만 볼 수 있는 후기에 상세 내용을 남겨준다.

그들이 숙소 운영을 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의미이다.


풀리아 지역에서의 첫 일정은 일명 버섯집이라고 알려진 알베로벨로이다.

트랜 이탈리아는 기차 접근이 어려운 곳은 버스도 운행한다.

기차에서 스마트폰으로 버스 티켓을 예매했는데 바리에서 1시간 거리다.


집 나서면 고생이라고 아슬아슬하고 고단한 하루였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보상이 있기에 떠나고 또 떠난다.

이곳 풀리아에서는 어떤 아름다운 풍경들이 나를 기쁘게 만들어줄까?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바리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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