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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000m, 구름길에 갇히다

7. 루마니아 트랜스파가라산

by 전나무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 청아한 10월의 어느 날, 오늘 달려갈 길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줄까?

기대 반, 걱정 반이지만 침착하게 차를 출발시켰습니다.

부쿠레슈티 시내를 벗어나 한 동안 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길이 이어졌지요.


첫 번째 목적지 비드라루 호수까지는 190km, 약 3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비드라루는 1965년 수력발전을 하기 위해 댐을 만들면서 생긴 인공 호수로 길이가 10.3km, 너비 2.3km나 된다고 해요.

작은 보트들이 몇 척 떠있는 호수는 파란 하늘을 온순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양호나 대청호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별다를 게 없었지만 '퓨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맑고 상쾌했습니다.


'유럽은 물도 사 먹어야 하는데 물값이 맥주보다도 더 비싸데'


라는 말을 듣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이 물을 사 먹은 게 꽤 오래되었지요.


이탈리아 꼬모 호수 주변에는 현지의 신선한 공기를 담은 캔이 관광 상품으로 팔리고 있죠.

탄소 배출로 인한 기후 변화와 환경오염은 머지않아 산소를 사 먹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곳의 공기도 병 속에 담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숨을 자꾸만 깊게 들이마시며 호수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호수의 물과 파란 하늘은 평화롭다는 말이 어울릴 겁니다.

그런데 나는 '평화'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어감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뜻에 있어 차이는 있지만 '적요하다'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호수에 하릴없는 작은 배들이 교교히 떠있고 가끔 물새들이 날아갑니다.

자연에 가까이 가면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건 왜일까요.

전에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럽다는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본격적인 헤어핀 도로가 이어집니다.

한 여름에는 정체가 이어질 정도로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도로는 비교적 한적했어요.

가끔씩 바이크를 탄 무리들이 굉음을 내지르며 달리는 바람에 긴장이 되었지만 생각보다 어려움 없이 발레아 호수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트랜스 파가라산 하이웨이의 구불구불한 산길




구불구불한 도로의 사진을 찍으려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안개 같은 구름이 쳐들어오듯 산을 휘감습니다.

순식간에 도로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지요.

조금만 늦게 올라왔어도 큰 고생 했겠다 싶습니다.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에 올라갔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지요.

순식간에 시야를 가렸던 것처럼 거짓말처럼 구름이 사라질 수도 있을 거라며 한 동안을 그 자리에서 기다렸지만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바로 앞에 주차된 자동차들 마저 하나둘 지워지더니 한 치 앞을 볼 수 없어 당황스럽더군요.

그동안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상가들이 있을법한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트레이닝 셋업 위에 패딩 조끼를 입고 다시 왁싱 재킷까지 껴입은 터라 미셰린 타이어 광고 캐릭터처럼 빵빵합니다.

비니를 쓰고 머플러를 감았는데도 형태 없는 공기는 용케도 비집고 들어와 몹시 추웠어요.




트랜스 파가라산 하이웨이








이미 비수기에 들어간 호수 주변에 있는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호수 주변은 구름 한 점 없이 말간 게 신기하더군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은 셰프가 없어서 식사가 안되고 음료만 가능하다고 해요.

아쉬운 대로 길거리 가판대에서 핫도그와 굴뚝빵을 사서 레스토랑의 발코니 좌석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였습니다.

꽤 넓은 공간이었는데 손님이 많지 않았어요.

어느새 유리창 너머에는 구름과 호수가 숨바꼭질하듯 보이다말다를 계속했습니다.






레스토랑 유리창으로 내다 보이는 발레아 호수




발레아 호수는 트랜스파가라산 고갯길의 2,034m 높이에 위치한 빙하 호수로 카르파티아 산맥의 풍경과 어울려 그야말로 거대한 포스트 카드를 펼쳐놓은 듯합니다.

크기가 그다지 크진 않지만 호숫가에 있는 샬레(높은 산에 나무로 만든 산장)와 주변 산들이 호수에 퐁당 빠져 반영된 모습이 완벽한 데칼코마니였어요.


어른들을 위한 동요를 흥얼거려 봅니다.


산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
나비같이 훨훨 날아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구름모자 벗겨 오지
이 놈하고 물벼락 내리시네
천둥처럼 고함을 치시네
너무 놀라 뒤로 자빠졌네
하하하하 웃으시네
웃음소리에 고개 들어보니
구름모자 어디로 갔나요
바람결에 날려 갔나요
뒤춤에 감추셨나요
산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
나비같이 훨훨 날아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공연히 혼줄 만났네












구름이 걷히는 듯하여 호숫가로 다가가 사진을 찍습니다.

LJ는 그런 내 모습을 찍어 보여줍니다.

아주 등판이 넙데데한 게 카메라 대신 엽총이 더 어울릴법한 사냥꾼의 뒷모습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 웃을 일인가? 싶을 정도로 눈물을 찔끔거리며 한참을 웃었지요.

여행은 때때로 우리를 순수하게 만들어줍니다.

별 것도 아닌데 자꾸 웃음이 나는 건 어린아이처럼 생각이 단순해지는 거죠.

자연 앞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어느새 호수는 말간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완전히 맑아졌으니 이제 시비우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웬 걸, 주차장과 도로는 여전히 구름에 갇혀있습니다.

갈 길이 먼데 한 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었지요.

슬로비디오처럼 모노톤의 구름길로 들어섭니다.

꿈길을 헤매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습니다.

구불구불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길은 있습니다.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막막하고 번개를 맞은 듯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큰 일에 맞닥트릴 때가 있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다시 빛을 맞이하게 되니까요.

날씨와 인생은 닮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무사히 시비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다가구 주택으로 넓은 정원과 함께 2대의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마당이 있습니다.

차가 드나들 만큼 커다란 나무 대문을 열고 닫는 방법부터 익혀야 했지요.

호스트 부부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인데요.

숙소를 관리하는 아내가 그날 딸을 출산을 했다더군요.

축하의 말과 선물을 전했습니다.


시비우의 올드 타운에 위치해서 언제든 걸어서 오갈 수 있어 좋고, 고급스럽거나 화려한 가구는 없지만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지는 집이었어요.

직접 만든 듯한 종이꽃 장식은 그녀가 알뜰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살림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디테일한 주방 살림이 나무랄 데 없이 잘 갖춰져 있어 흡족했습니다.

더구나 5박의 여유 있는 일정이니 한적한 스몰 빌리지들을 찾아다닐까 해요.


몇 년 전 루마니아 여행을 했던 친구 R은 시비우 광장이 참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곳에 가면 큰 소리로 본인의 이름을 외쳐달라고 했지요.

과연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에서 친구가 부탁한 미션을 수행할 배짱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내일은 시비우의 눈들을 찾아가 볼 요량입니다.

그리고 친구의 이름을 크게 불러봐야겠습니다.




시비우 숙소 앞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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