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빌바오(Bilbao)
기차 여행은 낭만이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빌바오로 향하는 6시간 30분 동안 창밖의 풍경은 화면을 스크롤하듯 지나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햇살이 반짝이는 들판, 그리고 가끔씩 지나치는 간이역마다 한 편의 시입니다.
책 몇 장 읽다가 식당칸에서 커피를 사 갖고 와서 간식을 먹는 여유도 즐깁니다.
음악을 듣거나,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죠.
기차는 이동의 의미를 떠나 즐거운 여정을 담아내는 하나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보통 도시를 이동하면 오후 시간은 숙소에서 보내지요.
빌바오의 주인공은 뭐니 뭐니 해도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Bilbao)'입니다.
숙소는 미술관에서 300m 남짓 가깝기에 몇 발자국만 걸으면 만나겠지만 내일이면 보게 될 테니 서두르지 않습니다.
소중한 것은 아껴두고 싶은 법이니까요.
현대 미술의 거대한 성전, 구겐하임 미술관은 쇠퇴하던 공업도시 빌바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입니다.
건축물의 외관은 바람에 휘날리는 금속 조각처럼, 물결치는 티타늄 배처럼 네르비온강 옆에 우뚝 솟아있습니다.
미술관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조각 작품입니다.
햇빛이 비치면 은은하게 빛나고, 흐린 날엔 잔잔한 물결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뉴욕과 베네치아, 아부다비에도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지만, 빌바오가 최고입니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빌바오시 재건 문화 산업의 일환으로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Owen Gehry)가 설계했고, 1억 달러를 투자하여 1997년에 개관했다.
3만 장이 넘는 티타늄 강판을 사용해 물고기 형상을 패러디한 50m 높이의 거대한 미술관 외관은 '미술품보다 더 유명한 미술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멋지다.
예전에 도시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항구가 있던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미술관은 새롭게 닻을 내린 희망을 배를 상징한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구겐하임 미술관
이 환상적인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프랭크 게리(Frank Gehry,1929 ~ )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캐나다의 건축가입니다.
그는 건물이 네모 반듯한 걸 거부합니다.
직선 대신 곡선과 비틀린 구조를 사용해서 파격적인 형태를 만들어내지요.
"구겐하임 효과(Guggenheim Effect)"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미술관은 빌바오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2003년에 개관한 로스앤젤레스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Walt Disney Concert Hall)과 2014년, 파리 볼로뉴 숲의 한가운데에 개관한 루이뷔통 박물관(Fondation Louis Vuitton) 역시 그의 작품입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 다녀와서 1년 후인 2023년 11월 파리의 루이뷔통 박물관에 갔었는데요.
건물의 외관을 보자마자 그곳도 프랭크 게리의 작품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콘서트홀이기도 합니다.
2009년 클래식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뉴스가 있었지요.
베네수엘라의 빈민가 출신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당시 28세)이 LA필의 상임지휘자를 맡게 된 것입니다.
그랬던 그는 2025-2026년 시즌을 끝으로 LA필을 떠납니다.
장장 18년 동안 LA필을 이끌어온 것이니 카라얀처럼 종신 지휘자가 아니고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긴 세월 동안 상임을 맡은 겁니다.
나는 두다멜의 연주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그가 지휘하는 LA필의 연주를 듣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가 퇴임하는 2026년 상반기까지 미국 여행은 예정에 없으니 아쉬움이 크지요.
구겐하임 미술관의 뿌리는 솔로몬 R.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에서 시작합니다.
철강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그는 나이가 들면서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요.
역시 돈 버는 촉이 남다르다고나 할까요?
그는 현대 미술에 투자하며 뉴욕에 첫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웠습니다.
그의 조카인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역시 대단한 인물이지요.
그녀는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에 관심을 갖고 수많은 작품을 수집했습니다.
오늘날 구겐하임 미술관에 피카소, 달리, 잭슨 폴록, 앤디 워홀 같은 전설적인 화가들의 작품이 가득한 건 모두 페기의 안목 덕분입니다.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솔로몬과 페기의 정신을 이어받아 1997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현대 미술의 아이콘 같은 공간이 되어 세계적인 걸작들을 소개하며 미술관 안팎을 채우고 있습니다.
미술관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되는 건 강아지 조각, 제프 쿤스(Jeff Koons)의 퍼피(Puppy)입니다.
거대한 강아지가 꽃으로 만든 옷을 입고 앉아 있는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꽃의 종류와 컬러도 바뀌므로 마치 강아지가 새 옷을 갈아입는 듯한 느낌을 주지요.
역시나 예약은 첫 타임, 벌써 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 뒤에 섰습니다.
1층 로비에서 맨 먼저 보인 건 비처럼 내리는 LED글씨 기둥이었는데요.
제니 홀저(Jenny Holzer,1950~ , 미국)가 만든 '빌바오를 위한 설치 작품((Installation for Bilbao)'입니다.
그녀는 1977년에 첫 번째 시리즈인 '뻔한 말(Truisms)을 시작했어요.
그녀가 재학 중이던 뉴욕의 휘트니 독립 연구 프로그램의 독서 목록을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자유는 사치지 필수가 아니다', '남성은 더 이상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등 한 줄짜리 글을 수백 개 만들었습니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난간에도 그녀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데요.
빌바오의 LED기둥에는 이런 글들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습니다.
I run from you
I say your name
I say your word
I smell you on my skin
I sleep beside you
방문객이 우르르 몰려들어 1층은 벌써 북적입니다.
우리는 아직은 한가할 3층부터 올라가서 내려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눈이 환해지면서 마음이 명랑해집니다.
빨간색, 파란색, 주황색, 연두색, 보라색, 회색의 맑고 생생한 톤의 색깔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요.
우리의 노림수는 적중했고 그곳엔 오로지 우리밖에 없었습니다.
주황과 파랑, 주황과 연두 등 이곳저곳 위치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벽화 #831(Wall Drawing #831, 기하학적 형태)라는 제목의 그 작품은 솔 르윗(Sol LeWitt 1928~2008, 미국)이 아크릴 페인트로 만든 것입니다.
불규칙하게 잘린 기하학적인 형태는 갤러리의 구부러진 벽과 함께 어울려 조화로웠지요.
'이건 뭐지?', '작가의 의도가 뭘까?' 하는 어떠한 궁금증도 없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색의 향연이었습니다.
현대 미술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산업 혁명의 사회적, 정치적, 기술적 변화에 대한 대응이었지요.
간단하게 말해 현대 미술은 전통적인 스타일과 기법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각과 예술의 재료와 기능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탐구하는 것이죠.
좀 더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개인적인 감정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현대 미술의 시작을 예로 든다면 놀랍게도 반 고흐의 해바라기,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 워홀의 캠벨 수프 캔, 모네의 일출 등이 해당합니다.
나는 여전히 현대 미술이 어렵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며 느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으니까요.
하지만 작가들은 분명한 의도를 갖고 만들었을 테니 그걸 알고 보면 훨씬 흥미롭겠지요.
꾸준히 보다 보면 뭔가 하나씩 알게 되리라 생각하며 그때 본 작품 사진을 보며 열심히 찾아봅니다.
언제나 그렇듯 지금부터 꽤 긴 글이 이어질 거라 짐작합니다.
빌바오 구겐하임에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소개할 테니까요.
만일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천천히 즐겨보시길 바랍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거대한 크기로 부풀려진 풍선 꽃다발, 튤립입니다.
화려한 색깔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아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 미국)의 튤립(Tulips)이 전시실 중앙에 떡 하니 놓여 있어요.
높이 2m, 너비 5m의 거대한 크기로 투명한 컬러 코팅이 된 고 크롬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습니다.
룸의 한가운데 설치되어 있는 튤립은 보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사뭇 다른 것도 흥미롭습니다.
제프 쿤스는 1993년 "축하(Celebration)" 시리즈의 일부로 "풍선 강아지(Balloon Dogs)"를 발표했습니다.
이 장난기 어린 조각품은 현재 현대 미술에서 가장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가 되었지요.
2013년, 그의 풍선 강아지, Balloon Dog(Orange)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5,840만 달러에 낙찰되어 작가의 세계 경매 기록은 물론 당시 살아있는 예술가가 경매에서 판매한 가장 비싼 작품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튤립 역시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시리즈에 속합니다.
그는 네오 팝을(Neo-Pop)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네오 팝 아트는 새로운 팝아트(new pop이라고도 함)라는 의미로 198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팝아트적인 경향을 지칭하는데요.
팝 아트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대중적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쿤스는 이렇게 말했지요.
'내 재료는 싸구려지만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작품이다.'
풍선 같고 가벼워 보이는 이 작품들은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늘 궁금했습니다.
이것의 실제 재료는 스테인리스 스틸인데요.
보기에는 거대한 풍선처럼 가벼워 보이지만 실재 무게는 수백 킬로그램 정도로 무겁답니다.
우선 제작할 모양, 즉 강아지나 튤립의 모양을 본떠 디자인한 후, 정밀한 금속 공정으로 형태를 만들고, 표면을 거울처럼 반짝이는 고광택으로 연마합니다.
그런 후 다양한 색상(오렌지, 파랑, 분홍, 노랑, 초록 등)으로 고광택 컬러 코팅으로 마감합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들은 마치 유리나 풍선처럼 가볍고 말랑해 보이도록 시각적 착시를 유도하므로 반사되는 표면을 통해 주변 공간과 관람자의 모습이 왜곡되어 담기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쿤스는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물건(풍선, 꽃 등)을 귀하게 만들고, 그 반짝이는 표면을 통해 소비문화, 욕망, 순수성, 어린 시절의 기억 등을 동시에 환기합니다.
또한 스테인리스 스틸이라는 무겁고 영속적인 재료를 사용해, 순간의 가벼움을 영원한 조각으로 고정시키는 역설도 담겨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작품처럼 보이지만, 작품에 담긴 상징과 조형적 기술은 아주 정교하고 깊은 것입니다.
제프 쿤스는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긍정하게 하고 싶다."
반짝이는 벌룬 독 앞에서 우리는 잠시 웃고, 거대한 튤립 다발 앞에서는 색의 향연에 눈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그 표면에 비친 낯선 나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예술은 장난에서 철학으로 전환됩니다.
고광택 스테인리스 스틸이라는 차갑고 무거운 물질 속에 담긴 풍선과 꽃. 유치함을 사랑으로 감싸 안고, 대중성과 고급성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드는 그 작품들은, 마치 거울처럼 우리 안의 욕망, 상처, 기쁨, 자의식을 고요히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프 쿤스는 키치의 힘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고, 어린 시절의 감정과 어른의 자각을 동시에 꺼내 보입니다.
예술이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보는 이를 흔들고, 비추고, 조용히 안아주는 것.
오늘, 빌바오의 한 전시실에서 나는 반짝이는 금속 꽃다발 너머로, 나 자신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습니다.
튤립 뒤로 메릴린 먼로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 역시 작가가 누군지 짐작이 가는 작품이죠.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 미국)입니다.
150개의 다채로운 마릴린(One Hundred and Fifty Multicolored Marilyns, 1979)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아크릴과 실크스크린으로 만들었어요.
1963년, 앤디 워홀은 미적 창작 과정에서의 이탈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신문, 홍보 사진, 광고에서 발견한 인쇄 이미지를 소재로 사용했고, 기계적 복제 기술인 실크스크린을 매체로 채택했습니다.
유명인사에서 식품 라벨에 이르기까지 미술 영역의 밖에 있는 주제를 사용했지요.
10m가 넘는 대형 스크린에는 150개의 다채로운 마릴린이 박혀 있습니다.
먼로는 유명인 소재 중 한 명인데 그녀가 사망한 1962년, 워홀의 작품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Shot Sage Blue Marilyn 1964)은 워홀의 역대 가장 비싼 작품으로, 2022년에 1억 9,500만 달러(2853억 원)에 판매되었습니다.
이는 역대 가장 비싼 20세기 미술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메릴린 먼로의 1953년 영화 나이아가라의 홍보 사진을 기반으로 만들었는데 세이지 배경에 분홍색 얼굴, 파란색 아이섀도, 붉은 입술을 한 먼로가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이 그림은 다양한 색상의 여배우 초상화가 등장하는 워홀의 "샷 마릴린" 시리즈의 일부로 2022년 5월 뉴욕 크리스티에서 판매되었고 수익금은 아동 자선 단체를 지원하는 재단에 전달되었습니다.
뜬금없이 대리석 의자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의자 위엔 이런 글씨가 쓰여있습니다.
'Man don't project you anymore(남자는 보호하지 않는다)'
이것은 1층에서 봤던 LED 글씨의 작가인 제니 홀저의 생존 시리즈입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문구를 새긴 대리석 의자 작품도 많습니다.
그야말로 낙서 수준의 그림 아홉 점이 벽에 주르르 걸려 있습니다.
연필로 숫자를 써넣었거나 어린아이가 붓으로 마구 문지른 듯한 무형의 붓질들이 대부분인데 그나마 그 아홉 개의 작품들이 질서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흰색과 빨강,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회색과 검은색 등 9개의 그림에 공통적인 컬러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대략 난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 같은 생각을 할 겁니다.
'이건 나도 그릴 수 있겠는걸?'
작가는 대중들에게서 이런 종류의 말을 많이 들었나 봅니다.
이렇게 말했거든요.
내가 긋는 선은 어린애 같지만 유치하지는 않습니다.
당신 그림 실력이 모나리자를 따라 그릴 수 있을지 몰라도 내 그림을 흉내 내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왜냐고요? 내 그림은 느끼지 않으면 선을 그을 수없으니까요. - 사이 트웜블리 (Cy Twombly)
이 작품은 사이 트웜블리 (Cy Twombly, 1928-2011 미국)의 작품 '로마 황제 코모두스에 대한 9개의 담론(Nine Discourses on Commodus)'입니다.
제목을 알고 나니 더 황당했지요.
'이 장난 같은 그림 제목이 로마 황제의 담론이라고?'
1950년대 중반, 미국 육군에서 암호학자로 일하던 사이 트웜블리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추상 표현주의를 뒤집는 낙서 같은 긁힘, 열광적인 선의 시그니처를 개발했습니다.
미국을 떠나 로마로 이주한 후, 이탈리아의 역사, 고대 신화, 고전 문학에 대해 심취하였지요.
1963년에 제작된 이 그림 연작은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 코모두스의 잔인함, 광기, 그리고 살해 사건등을 바탕으로 합니다.
두 개의 소용돌이가 각 작품의 중심 초점을 잡고 있으며, 고요하고 구름 같은 구조물에서 피를 흘리는 상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위기를 보이는데 마지막 패널에서 불타는 신격화로 절정에 이르게 되지요.
그림의 혼돈과 불안정의 본질적인 미학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게 제어된 뼈대가 구성을 지배합니다.
회색 배경은 피 묻은 페인트 소용돌이와 응고된 임파스토의 딱지를 상쇄하는 음의 역할을 하고 그림의 중앙을 따라 흐르는 선은 구성을 세분화하는 안내 표시 역할을 합니다.
숫자와 그림의 골격을 형성하는 격자, 그래프들은 기하학적 축을 표현합니다.
피를 뿌려놓듯이 타깃 원점이 형성된 이 광폭한 그림은, 폭력과 그 결과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이 그림은 미국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되던 해에 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의 암살과 죽음에서 영감을 얻어 아홉 개의 연작 시리즈로 제작되었습니다.
미국의 현대 미술 아티스트 중 앤디 워홀만큼이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1960-1988, 미국)가 있습니다.
그는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8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는데요.
1970년대 후반, 뉴욕의 바스키아 그라피티는 문화적인 요소와 암호 같은 에피그램 때문에 지하철에 아무렇게나 그려진 보통의 그라피티와는 차별화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작가의 문학, 언어, 역사,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담겨 있었으니까요.
1980년대 초, 그는 그라피티의 과거와 새로운 스튜디오 경험을 자연스럽게 섞어서 언어와 이미지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했습니다.
'내 이름은 바스키아야.'
하고 외치듯 그의 그림 역시 고유한 특징이 있으므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1982년작 '나폴리에서 온 남자 Man from Naples'(1982)는 장 미셸 바스키아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에 그려졌습니다.
그가 첫 개인전을 위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일명 '돼지고기 상인'이라 불리던 이탈리아의 악명 높은 미술상을 비판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 옆에는 '모세와 이집트인들(Moses and the Egyptians)'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불과 스무 살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바스키아는 매일매일 인종 차별과 위선에 맞서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종차별에 맞섰고, 이러한 입장을 표현한 것이지요.
이 작품은 아프리카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성경적 에피소드를 암시하여 '모세'라는 이름을 작품 속에 새겨 넣었습니다.
크리스티나 이글레시아스(Cristina Iglesias, 1956~ 스페인) 무제 (Alabaster Room).
어릴 때 만들었던 한지를 붙여 만들었던 행 글라이더를 생각나게 하는 얄팍한 한지 문 같은 세 조각이 삐딱하게 걸려있습니다.
1990년대에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스페인 조각가 중 한 명인 크리스티나 이글레시아스(Cristina Iglesias, 1956~ 스페인)는 물리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표현하는 대규모의 미니멀한 구조물을 만듭니다.
그녀의 작업의 특징은 콘크리트, 철 또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인상적인 형태와 복잡하게 에칭 된 표면(종종 풍부한 왁스와 녹청으로 작업됨) 및 유리, 설화석고, 태피스트리와 같은 호화로운 재료가 병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발생하는 형태와 공간에 관심을 가진 이글레시아스는 실제로 그녀만의 간결하고 조각적인 풍경을 만듭니다.
거칠게 다듬어졌지만 섬세하게 모델링 된 독립형 조각품은 넉넉한 비율이기는 하지만 거의 모두 인간의 규모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글레시아스는 자신의 작품을 "생각과 같은 작품, 사람이 보는 장소, 현실과 이미지 사이, 존재와 표현 사이, 다른 공간에 대해 말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작품 무제(일명 알라바스터 룸, Alabaster Room)는 철제 프레임으로 지탱되는 얇고 반투명한 흰색 알라바스터 시트로 구성된 세 개의 경사진 캐노피가 특징이며, 머리 높이 바로 위의 갤러리 벽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작품입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 미국)가 24시간 만에 완성했다는 이 작품은 그림의 크기가 바지선처럼 크다는 의미에서 '바지(barge, 짐을 싣는 큰 배)'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하는데요.
너비가 거의 10m에 달하는 단일 캔버스의 실크스크린입니다.
검은색, 흰색, 회색으로 이루어진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도시 환경(옥상의 급수탑), 우주 탐사 및 비행(위성, 로켓, 레이더 접시, 모기, 새), 교통수단(트럭),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비너스의 변기를 포함하여 많은 주제와 이미지를 통합하여 만들었습니다.
2022년은 빌바오 개관 25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지요.
미술 작품의 제목에는 시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너무 철학적이고 심오해서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요.
때로는 영화 제목 같기도 하고 소설의 한 대목을 보는 듯한 문학적 표현들이 관심을 끌기도 하는데요.
'공기는 얼마나 깊은가(How profound is the air)'라는 제목도 그랬습니다.
우툴두툴한 거친 돌에 네모 반듯한 구멍을 뚫어 놓은 이 작품은 에두아르도 칠리다(Eduardo Chillida, 1924-2002, 스페인)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조각품에서 거칠기와 광택의 대조에 관심을 가졌다는데 '공기는 얼마나 깊은가'라는 제목은 스페인 시인 호르헤 기옌((Jorge Guillén, 1893년 - 1984년)의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 하는군요.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공간과 빛이 고체의 물질을 관통한다는 이론이라고 합니다.
요제프 보위즈(Joseph Beuys 1921-1986 독일)의 연극적인 설치물 중 하나인 '눈부신 사슴을 품은 번개 (Lightning with Stag in Its Glare)'는 숲의 개간지와 같은 자연적 장소를 암시하는데, 사슴(나무다리 위에 놓인 다림판으로 표현됨), 원시 동물의 배설물(도구를 진흙 더미에 넣고 청동으로 형태를 주조하여 만듦), 염소(불쌍한 세 바퀴 수레), 강력한 번개(들보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무거운 삼각형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현대 미술의 설치 작품들은 대부분 큰 작품이 많습니다.
거의 벽 하나를 가득 채운 거대한 조각이 걸려있습니다.
이미 퇴색한 은색 바탕은 반짝임이 많이 스러진 상태라 오히려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은 나이지리아에서 활동하는 엘 아나추이(El Anatsui 1944~ 가나)의 '떠오르는 바다(Rising Sea)'입니다.
어느 날 그는 고물상에서 폐기된 술병의 알루미늄 뚜껑들을 무더기로 발견하였지요.
그것들을 가져다가 납작하게 펴고, 비틀고, 으깨고, 구리선으로 꿰매어 한 땀 한 땀 이어나갔습니다.
술병 뚜껑 알루미늄 조각으로 만든 최초의 작품이 2002년에 전시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병뚜껑을 봉인하는 스트랩, 우유 캔, 인쇄판과 같은 다른 재활용 재료를 이용하여 자신의 작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 작품은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폐기물로 인해 생기는 기후 변화에 따른 위험을 경고하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언뜻 보면 그냥 투명한 유리 보울 같은 유리 공이 바닥에 놓아져 있습니다.
풍선의 배꼽처럼 볼록하게 들어가 있는 유리공에는 신비한 흔적이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리볼 안에 발의 모양이 보이지요.
투명한 공압 챔버와 같은 유리 공에 갇혀있는 발은 날개 달린 걸음을 암시하며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에 투과될 필요성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페레스, 하비에르(Javier Pérez 1972 ~ 스페인) '레비타스(Levitas)'입니다.
어둡고 중립적인 배경으로 웃는 여성의 초상화 11점은 스마일(Smile) 시리즈입니다.
그나저나 이 작가, 알렉스 카츠 (Alex Katz,1927~ 미국)는 98세네요.
카츠는 초상화의 주제로 가장 가까운 집단, 즉 그의 아내나 친구들을 그리는데요.
가장 필수적인 사항 외의 모든 것을 제거한 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단순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즉 동일한 프레임 장치, 인물 기반 처리 및 제스처(예를 들어 미소)를 반복함으로써 이 일련의 작업에서 특정 주제가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묘사에 대한 회화적 실험에 초점을 맞추는 작가입니다.
그러니까 이 스마일 연작 속의 대상들은 모두 웃고 있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니 맘에 드는 그림이 꽤 있더군요.
알렉스 카츠, 기억해 둬야겠습니다.
이번 그림에는 염소 머리 같은 게 보입니다.
줄리안 슈나벨 (Julian Schnabel, 1951~ 미국)의 '스페인(Spain)'이라는 이 작품은 깨진 도자기 조각을 본도(퍼티와 같은 폴리에스터 수지)에 붙이고 그 위에 오일 페인팅을 하여 거친 이미지를 느슨하게 만든 그림입니다.
깨진 접시와 컵은 들쭉날쭉 표면에서 튀어나와 그림의 평면을 방해합니다.
소용돌이치는 색상은 종종 전설적인 인물을 묘사하는데 일부는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을 떠올리지만, 스페인의 엘 그레코와 멕시코의 문화적 유물 등 다양한 출처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해요.
몸통 없는 머리는 작가의 작품에서 자주 사용하는 이미지인데 이 작품은 투우장 옆에 있는 바라데로로 보입니다.
버라데로는 투우사가 황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장벽입니다.
언뜻 보면 주둥이 같이도 보이는 이 머리는 염소가 아닌 황소와 투우사를 연상시키는 장치라고 해요.
이번 그림은 진짜 염소입니다.
미겔 바르셀로(Miquel Barcelo, 1957~ 스페인) '수컷과 암컷 염소(Mals andafamale goats)'
바르셀로는 그림에 특이한 재료들을 이용했는데요.
해초, 화산재, 음식(예를 들어 밀가루나 쌀) 및 골판지 상자와 담배꽁초를 포함한 다양한 폐기물들입니다.
그럼으로써 거칠고 다양한 질감이 느껴졌습니다.
엔초 쿠치(Enzo Cucchi, 1949~ )는 이탈리아 트랜스방가르디아 운동의 주요 대표자 중 한 명입니다.
이 그룹은 새로운 것을 선택해야 할 의무가 사라진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는데요.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경제의 생산적 리듬이 둔화되고, 모든 이념들이 일련의 위기에 휩싸인 시기였습니다.
여기에는 예술의 위기도 포함되었지요.
예술가는 본성상 폐허의 풍경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쿠치는 믿었습니다.
창조적 힘은 무에서 무언가를 발명할 수 없지만 이전에 서로 상충되었던 요소를 인간적으로 조립할 수 있으니까요.
거기서 착안한 작품 '서양 예금(Occidental Deposit)'역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블랙 위주의 컬러가 주는 어둠과 무게감이 당시 시대를 반연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미겔 바르셀로(Miquel Barceló 1957~ 스페인) '대홍수(El Diluvio)'
홍수는 비에 대한 찬사를 담은 세 작품인데 그중 하나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비슷한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추상임에도 불구하고 빈번한 폭풍에 시달리는 강의 흐름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체 그림에서 땅은 회색 톤으로, 구름은 파란색, 강의 흐름과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광선은 흰색으로, 그리고 수줍고 멀리 있는 태양은 노란색-황토색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중앙 전경에서 간신히 그어진 수평선까지 굽이쳐 흐르는 강의 대각선과 떨어지는 빗방울의 역동성은 작품에 속도감을 더합니다.
그는 항상 자연환경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경험에서 영감을 찾았고 그 결과, 겉보기에 간단하고 직관적이면서도 약간 복잡한 이 작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비를 즐겨 그린 작가, 미겔 바르셀로입니다.
그날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안셀름 키퍼 (Anselm Kiefer 1945~ 독일)의 작품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투가 일어나기 불과 몇 달 전 독일에서 태어난 키퍼는 현대 전쟁의 결과와 조국 분단을 목격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또한 분열된 국가의 재건과 쇄신을 위한 투쟁도 경험했지요.
그런 키퍼는 독일 신화와 역사의 얽힌 패턴과 그것들이 파시즘의 부상에 기여한 방식을 조사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미적 금기를 위반하고 승화된 아이콘을 부활시킴으로써 이러한 문제에 맞섰습니다.
'두 강의 땅(the land of the two rivers)'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으로 구분된 땅을 말하는데요.
이 강은 인류 최초의 문명 발원지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키퍼의 그림은 이 땅과 문명, 그리고 문자 문화의 확립을 암시하는데요.
이 제목은 문명과 시대를 초월하는 지속적인 흔적을 남기는 문자 자체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과 같은 이름의 조각품도 있는데, 그것은 문자와 역사의 지속적인 본질을 전달하는 여러 권의 납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도 안젤름 키퍼입니다.
키퍼는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에서 브룬힐데와 릴리스에 이르기까지 실제적이고 신화적인 여성들을 묘사했습니다.
작품의 제목 '베레니체(Berenice)'는 기원전 3세기의 전설적인 키레네(현재의 리비아)의 공주를 말하는데요.
공주는 남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기 위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 비너스에게 바쳤습니다.
그 후 사원에서 사라진 머리카락은 밤하늘의 새로운 별자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조각품에서 키퍼는 납으로 만든 비행기의 일부 잔해를 통해 신화를 암시하고 날개와 동체에서 흘러나오는 인간 머리카락은 비행기에서 뿜어 나오는 독성이 강한 검은 연기를 암시합니다.
섬뜩 오싹합니다.
누군가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있습니다.
아마도 죽은 것만 같습니다.
키퍼는 작가 자신을 별의 거대한 맨틀 아래 말라붙은 갈라진 땅에 누워 있는 외로운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오래된 지식과 연결하고 천국을 찾는 이유에서 연속성을 찾으려는 것"이 예술가라고 말합니다.
안젤름 키퍼의 이 작품은 '유명한 밤의 명렬(The Renowned Orders of the Night 1997)'입니다.
'오직 바람과 시간 소리로만 (only with wind, Time, and Sound)'이라는 이 작품은 안젤름 키퍼가 피라미드 모양을 포맷한 작품입니다.
그는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찍은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서 만들게 된 작품인데요.
피라미드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잇는 장소로 여겨졌던 고대 이집트 세계와 마찬가지로 키퍼는 이러한 기념물을 하늘과 땅 사이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피라미드 위의 비문에 나타나는 이 작품의 제목 '오직 바람과 시간 소리로만 (only with wind, Time, and Sound)'은 20세기 오스트리아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시 <망명>에서 따왔습니다.
어린 시절에 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바흐만과 마찬가지로 키퍼는 역사의 파괴적인 순환을 숙고하기 위해 먼 옛날의 전쟁을 작품의 많은 부분에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에서 묘하게 냉랭한 기류가 느껴집니다.
'두 사람은 무슨 사이일까?, 어떤 상황인 거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두 사람이 따로 앉아있습니다.
때로 사람의 형상을 한 조각을 볼 때면 섬뜩할 때가 있는데요.
이 작품의 경우 우선 피부와 옷이 같은 색으로 만들어진 두 인물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압도적입니다.
실물 사이즈로 무심하게 앉아있는 두 사람에게서 영혼 같은 게 느껴진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후안 무뇨스 (Juan Muñoz, 1953-2001, 스페인) '그림자와 입(Shadow and Mouth)'
제목을 봐도 아무것도 연상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작가는 그것을 일부러 노렸는지도 모르지만요.
후안 무뇨스는 잊히지 않는 인간 형상의 수수께끼 같은 조각품으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설치물은 감상적인 인물로 채워진 무대 세트 같은데요.
음모와 절망, 고립에 대한 이야기들을 암시합니다.
불안한 특성에서 유머러스한 것까지 인간 상태의 감정적 범위를 지속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무뇨스가 미장센을 실현하는 수단은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했는데요.
전시장 내부에 추가된 작은 건축적 요소에서 벽을 자르거나 가짜 바닥을 추가하여 공간을 재구성하고 변형하는 대규모 설치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48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기 전까지 관객을 육체적, 정서적으로 사로잡는 작품을 꾸준히 만들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시간이 멈춘 드라마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림자와 입은 전개되는 서사, 혹은 무언가(논쟁, 대립, 또는 비난?)가 일어난 직후의 순간을 암시합니다.
앉아 있는 인물들은 서로 마주 보지 않으므로 관객과의 교류를 거부하고, 그들만의 독립적인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고립과 불확실성의 상태는 현대 생활에서 경험하는 모호성과 복잡성에 대한 강력한 은유입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됩니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요리조리 살펴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투명 아크릴 조각들이 파편처럼 수없이 늘어놓아져 있습니다.
크기와 높이, 모양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요.
하지만 설명을 읽어보고 작품을 보니 알 것 같습니다.
투명한 조각들은 남성과 여성 구두의 뒤축이었습니다.
후안 루이스 모라사(Juan Luis Moraza 1969~ 스페인)의 설치 작품인 '엑스터시, 지위, 동상(Ecstasy, Status, Statue)'
그것들은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데요.
거꾸로 놓여있거나 격자 모양으로 바닥에 직접 놓여 있어 미니멀한 조각 전시를 연상시킵니다.
프로이트 이론에 의하면 구두는 전형적인 페티시 대상입니다.
남자아이가 어머니의 성적 차이를 인지하고 상징적 대체물을 선택한 것에 충격을 받아 발생한 대체된 욕망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모라사의 설치는 엄격한 성적 차이 개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이힐과 로우힐이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차별화된 영역의 마커 역할을 한다면, 여기서 힐의 높이의 큰 다양성과 점진적 변화는 두 영역 사이의 중간 영역을 암시합니다.
이 작품은 또한 자크 라캉의 욕망을 잔여물, 공허함, 극도의 연약함 또는 균열, 즉 주체를 언어로 나누는 것, 또는 이 특정 사례처럼 뒤집힌 세상으로 보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조각과 관련된 종류의 시각성에 도전합니다.
바닥에 가까운 힐은 가까이서 편안하게 관찰할 수 없고, 작품의 완전한 시야는 더 높은 위치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제목부터 거창합니다.
'십삼만 년 전의 마지막 트렌드'라니요.
그 억겁의 시간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요.
무채색의 이 그림은 갤러리의 벽을 연속적으로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따라 걷다 보면 그림 속의 장면을 걸어 다니는 착각에 들게 합니다.
우선 묘비와 구덩이에 동그랗게 웅크린 시체와 나무를 보아하니 묘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요.
섬뜩하지만 무채색의 간결하고 깔끔한 이미지가 자꾸만 시선이 가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죽음과 관련이 있으며, 나무로 덮인 묘비와 매장지를 볼 수 있는 묘지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는데요.
스페인의 젊은 작가 아비게일 라즈코즈 (Abigail Lazkoz, 1972~ 스페인)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130,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되고 죽은 자를 묻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한 찬사라고 하는데요.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은 그림입니다.
크리스천 볼탄스키(Christian Boltanski 1944-2021, 프랑스)는 1986년 오래된 사진, 옷, 기타 개인 소지품으로 만든 불안한 설치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삶의 유물이자 흔적이라는 것이죠.
작은 극장이나 교회를 연상시키는 깜빡이는 불빛과 그림자가 있는 공간은 조용한 경이로움과 상실과 부재에 대한 가슴 아픈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인간을 위해(For Humans )'에서 작가 크리스천 볼탄스키 (Christian Boltanski 1944-2021, 프랑스)는 아카이브와 대중 매체에서 1,000명 이상의 익명의 사진을 골라내서 만들었습니다.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대한 철판이 물결 모양, 또는 소용돌이를 그리며 서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사이즈인지는 주변을 걸어 다니는 사람과 비교하면 쉽게 짐작이 됩니다.
그것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8-2024 미국)의 작품 '시간의 문제(The Matter of Time)'입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 영구 전시된 대규모 설치 작품이지요.
이 작품은 높이 4미터가 넘는 철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무게는 900톤에서 1,000톤에 달합니다.
작품의 규모와 무게로 인해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 작품은 빌바오 구겐하임의 영구 전시품입니다.
세라는 공간과 관람자의 관계를 탐구하며, 관람자가 작품 사이를 걸으며 공간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도록 의도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관람자로 하여금 열린 공간에서의 자유로움과 닫힌 공간에서의 고립감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거대한 강철 숲 사이로 들어갔지요.
고흐의 풍경화나 베르메이르의 실내 장면이 우리를 조용한 감상 속으로 초대한다면, 이곳의 작품들은 몸을 움직여 공간을 거닐며, 재료의 질감과 구조를 직접 체험하게 만들었습니다.
높고 긴 철판 골목으로 들어가면 마치 미로 속을 걷는 듯한 기분입니다.
거대한 강철 벽이 점점 좁아지거나 휘어질 때,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면서 긴장과 해방을 반복합니다.
즉 "보는 예술"이 아니라 "경험하는 예술"인 거죠.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강철의 색이 변하는 걸 고려해서 만들어졌는데요.
그러니까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마치 금속으로 이루어진 미로 같았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간이 달라졌지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하는 조각입니다.
내부에 서면 소리가 묘하게 울렸지요.
속삭이듯 메아리치는 소리는 과거에서 온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철판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요.
막혀있는 미술관 내부 공기가 살짝 질릴 때쯤이면 자연스럽게 건물 밖으로 나가보는 것도 좋습니다.
빌바오의 구겐하임은 야외에도 미술품들이 많으니까요.
미술관 옆 강물 위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그것 역시 작품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는데요.
후지코 나카야(Fujiko Nakaya 1933~ 일본)의 안개 분수(Fog Sculpture #08025)로 물을 미세한 입자로 분사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예술 작품이라고 합니다.
사진을 찍으니 마치 꿈속에 있는 듯한 효과가 있었어요.
거대한 청동 거미는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 프랑스)의 마망(Maman)입니다.
거미의 긴 다리 사이에 서있으면 보호받는 느낌과 위협받는 느낌이 교차합니다.
바람에 흔들릴 것 같이 얇고 긴 다리는 굳건히 땅을 딛고 있지요.
거미는 단순히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작가가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작품으로, 거미줄을 짜듯 어머니가 가정을 지탱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마망의 높이는 무려 9미터!
조명이 비치는 밤에 보니 공포스러울 정도로 큰 작품입니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1954~ ) 키 큰 나무와 눈(Tall Tree and the Eye, 2009)은 3개의 축을 중심으로 고정된 73개의 반사 구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불안정성과 덧없음을 상기시키는 의미라고 합니다.
마지막 전시실을 보러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검은색의 불규칙한 모양의 돌들이 둥글게 깔려 있습니다.
영국 작가 리처드 롱(Richard Long 1945~ )의 슬레이트 서클 (Slate Circle)인데요.
이 또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서클(2000)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채석장인 콘월의 델라볼에서 채석한 돌로 만들었습니다.
콘월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돌 주변을 걸어봅니다.
일본 사찰에서는 종종 나무에 매달려 있는 종이 조각을 볼 수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수백 송이의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신도들이 소원을 적은 종이들을 매달아 놓은 것입니다.
전시실 한쪽에 올리브 나무에 흰 종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언뜻 보면 전시실의 인테리어를 위한 오브제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존 레논의 아내라는 타이틀이 더 친숙한 오노 요코(Ono Yoko,1933~ 일본)의 빌바오를 위한 소원 나무(Wishing Tree for Bilbao)입니다.
요코 오노는 개념 예술가입니다.
빌바오 소원 나무는 관람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자라는 것이죠.
소원을 적은 종이를 아무도 매달지 않고 무관심한다면 나무는 자라지 않거니와 죽게 될 겁니다.
소원 종이를 적어 거는 행위는 나무를 살아있게 하지요.
오노 요코의 이 소원 나무는 그곳 말고도 세계 여러 나라에 많다고 합니다.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는 문자 그대로는 '가난한 예술'이라는 뜻으로 이탈리아의 미술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가 1960년대 후반에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예술과 엘리트 사이의 연계를 공격하고 그 대신 거리 예술과 일상적 소재를 사용하는 급진적인 예술 운동을 지칭하지요.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 1936~2017, 그리스) 역시 주목할만한 아르테 포베라였습니다.
그는 매립지나 산업용 컨테이너에서 찾을 수 있는 폐기물을 소재로 사용합니다.
예전에는 예술과 전혀 관련이 없던 석탄, 삼베 또는 강철 보와 같은 소재를 선택한 것은 돌파구이자 주변 세계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쿠넬리스는 재료의 무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요.
무제(untitled)는 20개의 강철 패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패널에 매달린 삼베 자루에는 석탄이 채워져 있습니다.
무게가 어마어마하기에 작품을 안전하게 설치하려면 강화된 벽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비에르 살라베리아(Salaberria, Xabier 1969~ 스페인) ATMOTW 2013
A.T.M.O.T.W. 는 예술가들이 미술, 디자인, 건축이 만나는 공간에서 작품을 만드는 프로젝트입니다.
하비에르 살라베리아(Salaberria, Xabier 1969~ 스페인)가 만든 설치 작품 ATMOTW는 2013년 전시회를 위해 특별히 고안되었습니다.
ATMOTW라는 제목은 '세상의 모든 물질'을 의미하며, 박물관의 건축을 하위 맥락으로 삼아 작품의 백과사전적 야망을 배신하는 의도의 진술입니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동그란 구멍을 통해 보이는 전시실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찍는 재미가 쏠쏠하였지요.
불이 담긴 깡통과 연통 같은 게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 '아씨에르 놈드 게르 (Asier Nom de guerre)'는 프랑스의 전투 이름입니다.
아시에르 멘디자발(Asier Mendizabal 1973~ 스페인)이 빌바오 구겐하임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작품으로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마솥처럼 끊임없이 타는 연료로 채워진 콘크리트 블록 위에 서 있는 금속 용기와 연기를 배출하는 데 필요한 수직 환기 파이프입니다.
오브제는 단순하지만 현대의 사회적 불안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역시나 작가의 심중을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치즈 그라인더, 깔때기, 국자 등 주방 집기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품의 제목은 '집(Home)'
30년 이상 영국 팔레스타인 예술가 모나 하툼(Mona Hatoum 1952~ 팔레스타인)은 퍼포먼스, 영상, 조각품, 설치물을 제작해 왔습니다.
그녀는 베이루트에서 태어나 1975년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자 런던으로 망명한 팔레스타인인으로서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지만, 그녀의 정확하고 몰입적인 작품은 주관성과 정체성에 대한 더 광범위한 서사를 표현합니다.
이 작품은 불안, 고립, 갈등 등 집이 유발하는 감정 중 일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네요.
보트 모양의 구조물에 비닐조각을 마치 리본처럼 한 땀 한 땀 묶어 놓은 이 작품은 오소코르(Jaosokor),
1980년대 후반, 수자나 솔라노(Susana Solano 1946~ 스페인)는 그녀의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스페인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조각품은 형식적으로 간소하지만 풍부한 연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녀의 구조물 중 많은 부분이 미니멀리즘의 단순한 기하학이나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프로세스에 초점을 맞춘 반면, 다양한 은유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 중 최초이자 가장 강력한 작품 중 하나인 오소코르는 투명하고 무색의 플라스틱 스트립으로 덮인 카누 모양의 철제 뼈대를 규칙적인 간격으로 매듭지었습니다.
오소코르는 뉴기니 섬의 서쪽 인도네시아 지역인 이리안자야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작가는 그곳에 머물면서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는데요.
큐레이터 테레사 블랜치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인류의 시대를 통한 불안한 여행을 불러일으키며 토착민에 대한 학대에 대한 비난과 동시에 역사가 초래한 거대한 실존적 균열에 직면한 인간의 인내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찬사라고 했습니다.
그저 비닐조각을 묶어놓은 보트 모양의 작품에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처음 시도하는 것이 현대 미술의 큰 특징이고 끊임없이 새롭게 탄생하는 예술작품들이 놀랍습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 여기까지 읽어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구겐하임에 전시된 설치미술들이었습니다.
그 외 미국의 마크 로스코의 '무제'를 비롯한 회화 작품들은 작가의 이름과 제목만 소개합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 전시된 설치작품들은 규모 면에서나 주제 면에서 관람자의 경험을 예술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단순히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관람자가 직접 걸어 들어가고 지나가며 바라보는 과정 속에서 작품의 의미가 완성되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작품 자체가 거대하고 물리적으로 강렬해서 관람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존재감을 자각하거나 상실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제프 쿤스의 작품처럼 낯익은 사물을 거대하게 만들거나, 고급 재료 또는 폐기물을 이용하여 소비와 예술, 대중문화의 경계를 질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 구겐하임의 설치작품들은 전통적인 감상의 틀을 깨고 관람자가 몸으로 느끼고 반응하며 작품의 일부가 되도록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철판 사이를 걸으며, 때로는 나 자신이 작품 속으로 흘러들어 간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익숙한 사물이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 마음속에선 수많은 질문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예술작품들은 단순히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만들고,
시간을 휘게 하고,
인간의 감각을 깨우는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작가들의 손끝에서 태어난 작품들은 단지 조형물이 아닌 세계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이자 우리 삶을 반추하게 하는 커다란 거울이었지요.
'보다'가 아니라 '살펴보았고',
'지나치다'가 아니라 '머물렀으며',
'이해하다'가 아니라 '느꼈습니다'.
예술이란 결국 우리 안에 조용히 자리 잡고 말로 다 하지 못할 무언가를 오래도록 반짝이게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주도 두모악의 김영갑 갤러리, 오래전 그곳을 다녀왔는데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게 있습니다.
미술관 벽 쪽 가장자리 바닥에 자잘한 현무암들을 죽 깔아놓았는데 그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왔지요.
'인디언 로드'였습니다.
바람을 닮은 인디언 플루트 소리가 구멍이 숭숭 뚤린 현무암 사이에서 새어나오듯 절묘하게 어울렸지요.
구겐하임 미술관의 작품을 보는 동안 그곳 역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는 동안 음악을 찾아 들었지요.
막스 리히터(Max Richter)의 'On the Nature of Daylight'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의 연주가 적절했습니다.
시간과 기억, 그리고 감정의 흐름을 잘 나타내는 선율이 미술관의 여운과 잘 어울렸지요.
저녁나절, 트램을 타고 올드 타운으로 향했습니다.
돌바닥이 깔린 좁은 골목, 오래된 건물들, 바스크 전통 가옥이 늘어선 구시가는 시간의 결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저기 붉은 불빛 아래 하몽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는데 낮에 본 염소가 떠오르는 건 뭔지요.
작은 성당에 들어갔다 나오니 옅은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빌바오 구시가의 가로등에서 미겔 바르셀로의 그림 같은 빗방울이 보았다면 비약이 너무 심한 걸까요?
촉촉하게 젖어든 돌바닥이 가로등의 불빛을 머금고 있어 은은합니다.
낮에 들었던 피아노 음들이 작은 물방울처럼 가슴 한쪽에 조용히 떨어졌습니다.
하루 동안 마주했던 철과 빛, 고요한 예술의 울림, 그리고 이 도시의 묵직한 속살이 그 선율 속에 녹아들었었지요.
흔들린 거리의 사진이 수채화 느낌이어서 만족합니다.
오른쪽 상단에 빗자락 몇 개도 보이니 더더욱 맘에 드네요.
숙소로 돌아가려고 트램을 타고 빌바오 미술관에서 내렸습니다.
비와 불빛 사이로 거대한 마망이 보였지요.
낮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이럴 때 비 좀 맞으면 어떻습니까?
그냥 그 곁을 느리게 걸었습니다.
길 위에 내려앉은 시간과, 그 시간 속의 나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