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따라 마드리드에서 톨레도까지

19. 마드리드(프라도 미술관), 톨레도

by 전나무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심장입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처럼 화려하지도, 세비야처럼 관능적이지도 않습니다.

오래된 책장을 넘기듯 마드리드의 시간을 따라 걷다 보면 스페인의 예술과 철학, 열정과 고독이 그 결을 드러냅니다.


열흘 전 말라가로 갈 때 거쳤던 마드리드 아토차역에 다시 왔습니다.

도시의 중심을 관통하는 그란비아는 고요했고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가을 햇살 아래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안달루시아의 빛과 그림자, 바다와 언덕을 지나 북쪽의 이 도시에 닿으니 마음도 어딘가 다다른 듯했습니다.

한 달간의 스페인 여행도 나흘밖에 안 남았네요.

말라가에서 렌터카를 반납했으니 오늘부터는 뚜벅이 여행자입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수없이 많은 소도시들을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가끔 이곳처럼 큰 도시에 도착하면 갓 상경한 촌부처럼 정신이 흐릿합니다.

하지만 마드리드는 오직 프라도 미술관이 목표이고 나머지 날들은 역시나 근처 소도시들을 다닐 생각이니 괜찮습니다.


마드리드 아토차역


프라도 미술관의 "프라도(prado)"는 스페인어로 '초원' 또는 '목초지'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왕실이 처음 수집한 회화와 조각품을 관리하고 전시할 왕립 미술관으로 사용되던 시절, 이사벨라 2세 여왕이 붙인 이름이지요.

프라도 미술관은 처음부터 미술관이 아니었습니다.

18세기 후반, 카를로스 3세가 과학과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며 세운 자연사 박물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실의 그림들이 숨을 쉬고 싶어 했는지 결국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지요.

결정적으로 방향을 튼 것은 그의 손자 페르디난도 7세와 예술을 사랑했던 왕비 마리아 이사벨의 선택이었습니다.


시간의 어두운 빛을 간직한 궁전, 프라도는 단순히 스페인의 대표 미술관이라 부르기엔 무언가 더 깊고, 조용히 불타는 듯한 곳입니다.

미술관을 천천히 걷다 보면 마치 그림 속을 산책하는 듯 화폭 하나하나에서 그 시대의 숨결이 묻어납니다.

왕의 초상, 신의 형상, 고통의 신음, 사색의 고요함. 프라도는 그런 시간의 조각들을 조용히 간직한 채, 보는 이에게 단 한 장면이라도 마음에 머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엔 스페인이 지나온 역사적 상처와 기개가 고스란히 걸려 있습니다.

빛의 화가 벨라스케스는 권력의 초상을 그리되 인간의 고독을 묻어두었고, 어둠의 화가 고야는 침묵 속에 분노를, 절망 속에 예언을 새겨 넣었습니다.

전시실을 조용히 걸으며 시대를 뛰어넘은 거장들의 눈과 마주칩니다.

작품 앞에 서면, 감상이 아니라 응시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단지 그림이 아니라 살아남은 기억이니까요.


이곳의 아쉬움은 사진 촬영이 전면 금지된다는 점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과 미술관들 대부분은 프레시를 사용하지 않으면 사진 찍기를 허용하는데 말이지요.

프라도 미술관이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이유가 아트 포스터나 도록 같은 것을 많이 판매하려는 상술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글도 있더군요.

실제로 사진 촬영을 금지하면 기프트 숍 매출이 늘어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게 진실인지 모르겠습니다.




프라도 미술관 로비


프라도 미술관에서 주목할 화가는 단연코 고야와 벨라스케스입니다.

'우리가 이곳의 주인공이야' 하듯 건물의 정면 계단 아래엔 벨라스케스가, 반대편엔 프란시스코 고야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들 모두 어딘가 먼 시간을 응시하는 듯합니다.

프라도는 그들의 무덤이자 무대이지요.

두 화가의 화풍은 완전히 다른데요.

벨라스케스는 겉으로는 왕을 섬기되 붓으로는 인간의 품격을 그렸고, 고야는 세상의 광기와 고통을 온몸으로 견디며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그림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꿰뚫는 눈을 가진 말 없는 연설가들이었던 셈이지요.




벨라스케스
고야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ázquez, 1599–1660)는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였습니다.

사실주의적 표현력과 빛의 묘사에 뛰어났으며 인물의 존엄성과 심리까지 포착해 냈죠.

그는 초상화를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로 끌어올렸습니다.

후기에는 회화의 본질, 화가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그림 속에 담기도 했습니다.



벨라스케스 초상화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왕의 사적인 공간에도 출입할 수 있었고, 왕은 그를 '친구이자 충실한 하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회화보다 더 높이 가기 위해 궁정에서 고위 관직(왕궁 시종장)까지 올라갔는데, 화가의 지위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곧 정치적 수완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루브르의 얼굴이 모나리자라면 프라도의 얼굴은 시녀들(Las Meninas)입니다.

이 그림에는 벨라스케스 본인이 등장하는데 당시로선 파격적인 구도였지요.

신하가 자신을 왕비와 공주보다 더 크게 그린 건 대단한 배짱입니다.

그림 속에서 그는 붓을 들고 왕과 왕비를 바라보는데, 이는 '화가로서 나는 왕과 동등하게 세계를 바라본다'는 선언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림의 중심에 선 마르가리타 공주보다도, 왼편에서 붓을 들고 바라보는 벨라스케스의 존재가 더 크고 단단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궁정화가였지만 그저 왕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림 안에 화가 자신이 들어와 있다는 건, 그의 시대엔 작은 반란이었지요.

거울 속에 비친 펠리페 4세 부부의 잔상, 천진한 공주의 눈빛, 옆에 선 시녀들과 난쟁이, 개, 하나하나가 움직일 듯 생생합니다.

그림 속 세계와 밖의 세계가 섞이는 마법. 나는 잠시, 그 세계의 공기 속에 머물렀습니다.

마르가리타 공주는 근친혼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슬픈 눈망울을 지닌 그녀의 얼굴 앞에서 스페인 궁정의 찬란함과 그 이면의 그림자가 동시에 보였습니다.


시녀들


그가 로마에 갔을 때 그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교황이 싫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오늘날엔 인류 초상화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하는데요.

그 눈빛은 사람을 꿰뚫는 듯합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


작고 구부러진 몸을 한 난쟁이 프란시스코는 어린 왕자들의 장난감이 아닌 화가의 붓 아래에서 진정한 인물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눈엔 슬픔과 체념이 서려있지만 무엇보다 존엄이 있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그를 낮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린 게 느껴졌지요.

그의 삶이 얼마나 가혹했든 간에 그림 속의 그는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앉아있는 궁정 광대의 초상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Goya, 1746–1828)는 스페인 낭만주의의 선구자이며, 격동의 역사 속에서 민중과 권력을 모두 그린 화가입니다.

궁정화가로 시작했지만, 이후 귀머거리와 질병, 전쟁을 겪으며 어두운 내면을 작품에 투영한 작품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1808년 5월 3일〉, 〈사투르누스가 자식을 잡아먹다〉, 〈벌거벗은 마하〉등 그가 말년에 그린 이른바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은 인간의 광기와 공포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들입니다.

그는 권력의 허상을 찢고,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모순을 가감 없이 드러낸 예언자 같은 화가였습니다.

두 사람은 시대도 다르고 화풍도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화면 속에 진실을 꿰뚫는 눈을 가졌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조용히, 고야는 격정적으로, 그러나 둘 다 거짓을 그리지 않았다는 게 중요한 대목입니다.



프란시스 고야의 초상


고야의 두 작품 〈옷을 입은 마하와 〈옷을 벗은 마하는 스페인 미술사 최초의 누드화 중 하나로, 왕립 재판소에 불려 가는 사태를 낳습니다.

모델이 누군지에 대한 설이 많은데, 당대 귀족 여인이나 심지어 국왕의 정부라는 설까지도 나옵니다.

그는 ‘예술의 자유’를 위해 위험을 무릅쓴 셈이죠.


마하는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뜻입니다.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에서 나타나는 여인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이름이나 신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존재합니다.

일부는 고야의 연인 또는 궁정에서 활동하던 여인일 것으로 추측하고, 다른 이들은 당시 스페인 왕실의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옷 벗은 마하"는 당시 사회적으로 매우 파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18세기 스페인의 사회적, 도덕적 분위기에서 여성을 누드로 그린 그림은 매우 충격적이었고, 특히 귀족 사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왕실과 정부의 통제 하에 있던 미술은 종종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기준을 따랐기 때문에, 이러한 그림이 공개되었을 때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불경하거나 부도덕하다고 생각했죠.



옷 벗은 마하
옷 입은 마하


고야는 40대 중반에 심각한 병으로 청력을 잃고, 완전히 귀머거리가 됩니다.

이후 점점 어두운 세계에 빠져들며 '검은 그림들'을 그리게 되죠.

그의 캔버스가 아닌 저택의 벽에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피에 젖은 인간, 광기 어린 눈빛, 먹는 자와 먹히는 자 등 말 그대로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를 시각화한 것이었지요.

그것은 회화라기보다는, 비명이었고 묵시록이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초기 작품은 밝고, 즐겁고, 사교적이었습니다.

그는 스페인 궁정을 위해 일상의 즐거움을 담은 태피스트리를 디자인하고 , 런던 국립미술관에 전시될 개성 넘치는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다 청각 장애가 찾아오자, 이 행복한 모차르트는 퉁명스러운 베토벤으로 변한 것이죠.


검은 그림들의 방으로 들어서자 선입견이겠지만 공간 전체가 무겁게 가라앉은 느낌이었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이교도 신이 자기 아들의 머리 없는 시체를 먹고 있습니다.

수도복 차림의 인간형 숫염소가 숨 막히는 마녀들의 무리에게 사탄적인 설교를 읊조립니다.

절박하게 표정이 풍부한 작은 개가 어둡고 공허한 공간 아래 진흙탕에 목까지 잠겨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듯합니다.


그의 소름 돋을 정도로 황량한 검은 그림들은 고야가 청각 장애를 겪으면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미 70대의 나이에 접어든 화가 고야가 말년에 마드리드 외곽에 위치한 자택에 칩거하면서 두 개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했던 열네 점의 그림이 그것입니다.

오래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어둡고 섬뜩한 그림들이 벽면 가득 걸려 있습니다.



검은 그림들의 방
검은 그림 연작, 마녀들의 안식일
수프를 먹는 두 노인
운명의 여신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배경이 텅 비어 있는 화면 안에 가득 찬 것은 소리 없는 비명이었지요.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렸지요.


'자식을 잡아먹는 신 사투르누스'.


마치 방금 목격한 장면 같이 생생했습니다.

입 속으로 들어가는 팔, 형체를 잃은 어깨, 이미 반쯤 사라진 몸.

사투르누스는 눈을 부릅뜬 채 미친 듯이 무언가를 먹으려 합니다.

먹는 게 아니라 지우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육체를 넘어서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맹렬한 입.

‘왜 자식을 먹는가’라는 신화의 서사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보다 먼저 다가온 건 그 광기가 너무나 현대적이라는 사실이었지요.

고야는 신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의 사투르누스, 혹은 우리 안의 사투르누스를 그린 것이 아닐까?

불안에 먹히고, 권력에 삼켜지고, 공포에 사라지는 어떤 세계 같은 것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몇 발짝 떨어져 그 그림을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피투성이의 시체보다도 무서운 것은, 그것을 집어삼키는 쾌감이 서린 입과 눈이었습니다.

나는 그 눈에서 인간의 끝을 본 듯했습니다.


이 작품은 고야가 만년을 보내던 귀머거리의 집의 벽에 직접 그린 것입니다.

폭력과 절망이 얼마나 고요하게 그러나 극렬하게 삶을 집어삼키는가를 보여주는 그림이죠.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자기 자식을 움켜쥐고 살을 물어뜯는 괴물 같은 존재.

늙은 신의 두려움과 광기, 시간의 야만이 도포처럼 느껴졌습니다.


너무 날것의 공포라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치는 것 자체가 버겁고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눈을 뗄 수도, 붙들 수도 없는 그 감정, 그건 말 그대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본 듯한 경험이니까요.

미술관에서 그런 강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은 흔치 않지요.

고개를 돌리게 만든 그 장면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때 느꼈던 거부감, 혹은 두려움은 어쩌면 그림이 우리에게 깊이 도달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겁니다.



자식을 잡아먹는 신' 사투르누스


'자식을 잡아먹는 신 사투르누스'는 시각적으로 눈에 치명타를 입는 느낌라면 고야의 '개', 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히지요.

이 그림은 어둡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에서 솟아오른 개의 머리가 텅 빈 공간을 응시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의 머리만이 유일하게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마치 광활하고 텅 빈 공간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그림은 죽음과 미지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널리 해석되며 고야의 가장 신비로운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종종 죽음의 필연성과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개가 위를 바라보는 모습은 갈망이나 간청을 암시합니다.

검은 그림의 방에서 가장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그림이지요.




고야는 1819년에 구입한 마드리드 외곽의 농가 벽에 직접 그렸습니다.

당시 고야는 73세로 고령이었고 생애의 절반을 그림으로 그렸던 스페인의 왕실과는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무렵 그는 수십 년간 심각한 청각 장애를 앓았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고야는 어두운 유화로 얼굴을 녹이는 듯한 환상을 그려 석고에 투사했습니다.

복도, 계단, 그리고 생활공간을 끔찍한 벽화로 뒤덮어 자신만의 사색을 했습니다.

1828년 고야가 사망한 지 거의 반세기 후, 프레데릭 에밀 데를랑제 남작이 이 집을 매입했고 복원가 살바도르 마르티네스 쿠벨스가 그림을 캔버스에 옮겨 담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고야는 1808년, 프랑스의 스페인 점령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주둔 병력 증강을 구실로 스페인 왕위를 찬탈하고 동생 조제프에게 권력을 넘겨주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왕족을 몰아내려는 시도는 광범위한 반란을 촉발했습니다.

이 민중 봉기는 1808년 5월 2일에서 3일 사이에 발생했으며, 조아생 뮈라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그중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말을 찌르고, 쓰러지고, 칼을 겨누는 민중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습니다.

고야는 그 혼돈 속에서 인간을 개별이 아닌 폭발하는 분노로 그립니다.

말이 벌떡 일어나고 칼은 붉고 눈은 번득입니다.

그날 마드리드에서는 실제로 나폴레옹 군에 대항해 민중들이 일어났고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죽음의 숫자가 아닌 분노의 온도를 기억하게 합니다.



1808년 5월 2일


하얀 셔츠를 입고 팔을 벌린 채 총칼 앞에 선 남자, 그의 눈빛은 어떤 경전보다 많은 말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항복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습니다.

그저 두 눈을 뜬 채 죽음을 마주하지요.

하얀 셔츠는 눈부시게 밝고 그의 발아래는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 뒤로 줄줄이 대기한 사람들은 절망에 고개를 묻습니다.


이 그림은 시간을 정지시키고 찰나를 영원의 언어로 옮깁니다.

비통함이 아니라 고요한 신념이 느껴집니다.

이 남자의 눈빛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용기가 보입니다.

고야의 1808년 5월 2일은 마멜루크의 돌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도스 데 마요 봉기 당시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근처 알 칼라 거리를 배경으로 하였고 두 그림 모두 1814년, 2개월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1808년 5월 3일


적장이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의 그림은 카라바조와 함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그림으로 유명하고 또 많이 봐왔습니다.

그림은 직접적이고 물리적이며 여성의 분노와 저항이 칼끝에 실려 있지요.

그녀 자신의 상처와 생존의 기억이 유디트의 팔과 표정에 담겨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드라마를,

아르테미시아는 고통과 해방을,

렘브란트는 인간 내면의 정적을 보여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카라바조의 유디트는 마치 자신이 저지른 일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요.

한편 아르테미시아는 유디트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남성을 제압하는 강한 여성의 표정을 그리고 있어 카라바조의 유디트의 표정과는 대조적입니다.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아르테미아 젠틸리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그러나 렘브란트의 '홀로페르네스의 연회에 참석한 유디트'는 달랐습니다.

칼도, 피도, 베어진 목이 담긴 은쟁반도 보이지 않았지요.

어찌 보면 한 귀부인이 하녀에게 뭔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그림 제목에 홀로페르네스와 유디트라는 이름이 들어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대목이었지요.

어느 점잖은 귀족 부인의 초상화라고 해도 믿었을 겁니다.


렘브란트의 유디트는 그 어떤 격정도 없이 마치 자신의 운명을 수행하는 사람처럼 담담하고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지요.

그 시선은 마치 우리를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전히 수긍한 자의 고요한 결의를 담고 있어서 오히려 더 섬뜩합니다.

카라바조는 피와 움직임과 절정의 순간을 극적으로 그렸다면 렘브란트는 그 직후나 직전의 심리적인 정적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유디트는 무섭다기보다는 무언가 무너진 뒤의 공허나 인간적인 복잡함이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하지요.


유디트의 왼손 옆에 있는 무언가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입니다.

다만 그것이 검게 가려진 배경과 옷 그늘 속에 묻혀 있어 처음엔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요.

렘브란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잔인하게 묘사하지 않고, 그림자 속에 거의 숨기듯이 배치하여 공포보다 침묵과 무게를 강조합니다.

종이는 명확한 문서라기보다는 장면의 연극적 장치 혹은 홀로페르네스의 텐트 내부를 상징하는 소품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소녀가 내미는 그릇은 전통적인 유디트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담기 위한 용기입니다.

렘브란트는 이 소녀를 조수처럼, 혹은 유디트의 결단을 묵묵히 도와주는 인물로 그렸지요.

그녀는 겁에 질리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그릇을 내미는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일종의 의식처럼 필요한 절차를 수행하는 사람처럼요.

이 장면에서 렘브란트가 정말 탁월한 점은, 피 한 방울 없이도 살인을 둘러싼 무거운 공기와 결단의 무서움을 극도로 섬세하게 전달했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렘브란트 회화의 깊이이고, 그 무서움입니다.

조용한 시선, 어둠에 잠긴 표정, 그리고 아주 작게 암시되는 단서들만으로 우리는 이미 벌어진 참혹한 일을 머릿속에서 더 생생하고 끔찍하게 재구성하게 됩니다.

화가는 이 여성을 그릴 때 아마도 자신의 아내 사스키아를 모델로 삼지 않았나 추측한다고 하는데요.

내가 모르던 렘브란트의 새로운 장르의 작품을 보게 되어 느낌이 새로웠습니다.



렘브란트, 홀로페르네스의 연회에 참석한 유디트


스페인 화가 중 대중에게 이름이 썩 많이 알려진 사람은 아닌 엘 그레코(1541~1614)는 톨레도에 가면 반드시 보게 되는 화가인데요.

스페인에서 활동했지만 그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이 그림은 스페인 회화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초상화입니다.

이 인물은 마치 맹세를 하거나 진심을 고백하는 듯한 자세로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검은 복장에 하얀 칼라를 갖춘 엄숙한 모습으로 그려졌지요.

이 작품은 엘 그레코 특유의 긴장감과 신비로움을 담고 있어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 정체성과 명예, 신념에 대한 묘사로 읽히기도 합니다.


모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엘 그레코 자신이거나, 혹은 후원자 또는 기사단원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아마도 그 모호함이 이 그림의 미학이 아닐까도 합니다.


뾰족한 턱과 살짝 떠 있는 눈, 거기에 과장된 손, 바로 엘 그레코 회화의 핵심이자 이 초상화를 독특하게 만드는 요소들입니다.

그림을 보며 남자의 손이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화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그렸을 테지요.

손의 크기는 상징입니다.

지나치게 크고 단호한 형태로 그려진 이 손은 단순히 육체적인 손이 아니라 결의와 맹세, 혹은 말하지 않는 진심을 담고 있는 손처럼 말이죠.

마치 입보다 손이 말하는 사람 같습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한 사람, 혹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깊은 사유에 잠긴 사람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 그림입니다.



엘 그레코, 가슴에 손을 얹은 기사


다음 날, 기차를 타고 톨레도로 향했습니다.

기차가 도착할 무렵 멀리 언덕 위로 중세의 시간이 서려 있는 듯한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치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도시, 톨레도는 삼면을 따뜻한 색의 강이 감싸고 돌을 얹은 세월이 골목마다 조용히 쌓여 있습니다.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한 도시에 공존했던 흔적이 건축과 벽화에 층층이 남아 있지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갑자기 탁 트인 광장 너머로 톨레도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고딕의 뼈대를 바탕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가 덧입혀진 거대한 시간의 집으로 들어서면 숨이 멎을 듯합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 하늘로 치솟는 첨탑과 천장, 황금빛 제단과 조각, 어두운 회랑 속에서 조용히 빛나는 성상들에서 꼭 신앙심이 아니라도 경외심이 이는 공간이지요.



톨레도 역
톨레도 역 내부



침묵이 가장 깊은 말이 되는 톨레도 대성당은 스페인의 역사와 믿음이 집약된 장소입니다.

한때 이베리아 반도의 종교적 심장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는 거룩한 장소였으니까요.

나는 한참을 대성당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행의 끝 무렵, 무탈하게 보냈던 시간에 대해 잠시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톨레도 대성당
파이프 오르간


대성당의 성물실에는 엘 그레코의 "그리스도의 옷 벗김"이 걸려있습니다.

고요하고 붉은 배경 속 예수는 십자가에 오르기 직전의 순간입니다.

그는 침묵하고 있지만 주변은 혼란스럽습니다.

군인들은 그의 옷을 벗기려 하고 밧줄을 조이고 어떤 이들은 조롱의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그 가운데 예수는 오직 눈빛 하나로 모든 모욕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 색채는 강렬하고 인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중앙의 예수는 고요하고 환합니다.

그의 붉은 옷은 피가 아니라 사랑의 징표처럼 느껴지고 고개 숙인 자세는 패배가 아닌 내려놓음의 자세입니다.

엘 그레코는 이 장면을 통해 신의 고통보다 인간의 폭력과 무지를 강조합니다.

고통을 그리되,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모든 것을 감싸는 묵묵한 용서를 말없이 전합니다.



엘 그레코의 "그리스도의 옷 벗김


20221126_115842.jpg 톨레도 대성당 카라바조, 성세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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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 토메 성당에 가면 엘 그레코의 걸작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그림은 단지 백작의 매장을 그린 게 아니라 이승과 저승, 인간과 신성, 육체와 영혼이 한순간에 겹쳐지는 신비의 문을 그린 겁니다.


그림은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는데요.

아래쪽에는 검은 복장의 사제들과 귀족들이 백작의 시신을 묻고 있습니다.

백작은 갑옷을 입고 차분한 얼굴로 누워 있지요.

그의 시신을 묻는 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스테파노입니다.

신들이 마지막을 돌보는 장면에서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존엄의식임을 느꼈습니다.


그림의 윗부분을 보면 찬란한 색채의 천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구름은 물결치고 천사와 성인들이 백작의 영혼을 맞이합니다.

중앙에 떠오르는 영혼은 투명한 빛으로 변하고 바로 그 위에는 그리스도가 손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엘 그레코는 종교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마지막까지 얼마나 품위 있을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슬픔은 절제되고 하늘은 열려 있으며 모든 이가 백작의 죽음을 기억할 만한 찬란한 사건으로 바라봅니다.




산토 토메 성당 입구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마드리드와 톨레도, 이 두 도시는 내게 단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닌 그림을 통해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도시로 남았습니다.


돌계단 한쪽에 한 노인이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뭔지 모를 지적인 고요와 기품이 있습니다.

러프까지 두른 중세 복장을 한 채 작은 책상 앞에 앉아, 깃펜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지요.

아마도 이름이나 시구, 짧은 문장을 양피지에 멋스럽게 써주는 사람이 아닐까 추측했습니다.

그의 손끝에서 이어지는 글씨는 아마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끈일지도 모릅니다.


잉크병 곁에 쌓인 종이, 붓들과 함께 놓인 동전이 놓여있는 조그만 접시, 그리고 그 너머엔 오후의 빛이 흐르고 있었지요.

누군가의 이름을 써주는 걸까, 아니면 오래전 연인의 편지를 따라 쓰고 있는 걸까.

말없이 앉아 붓 끝을 움직이는 그의 손길은 마치 세상의 소음을 지우듯 조용했습니다.



글씨 써주는 노인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글씨 하나 받아올 걸 그랬습니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이름 하나, 혹은 짧은 문장이 톨레도에서의 기억을 더 선명하게 붙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남겨진 건 한 장의 사진뿐입니다.

사진 제목은 '톨레도의 이름 없는 노인의 오후'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길, 그림들은 내 머릿속에서 여전히 말을 걸었습니다.

어떤 것은 침묵으로, 어떤 것은 시선으로, 또 어떤 것은 마음 한가운데를 무겁게 두드렸지요.

마드리드와 톨레도는 색과 빛, 침묵과 절규, 인간과 신 사이를 건너는 하나의 기도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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