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길 위의 변수들을 뛰어넘은 완벽한 하루
밀라노에 랜딩 후 스마트폰을 켜니 단톡방에 카톡이 와있었습니다.
대장님은 밀라노를 향해 가고 있겠지?
우리는 간단히 요기하고 보딩 대기 중.
대장님의 돌로미티 원정을 응원하며 남은 공동 경비를 백팩 앞주머니에 넣어뒀어.
1차 귀국팀의 애심이야.
이태리의 맛난 음식, 향긋한 커피 즐기면서 느긋하고 무탈한 여행되길 바라 ~♡~
우리 셋이 요정이 되어 늘 함께 할게.
잠시 안녕~
눈물이 핑 돌았지요.
그렇게 친구들이 서울을 향해 비행하고 있을 동안,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단잠을 잤습니다.
잠에서 깨니 새벽 5시, 제일 먼저 한 일은 일기 예보 확인.
돌로미티에 오기 전부터 염려되는 건 딱 한 가지, 바로 날씨였습니다.
산악 지방이다 보니 6월 초까지는 매일 비가 내린다는 정보를 접했으니까요.
비를 좋아하지만 여행 내내 비가 내리면 아무래도 사진 찍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불편합니다.
그날 역시 하루 종일 우산과 구름 그림입니다.
어디를 먼저 가야 할까?
작은 마을, 호수, 야생화가 피어있는 고산의 평원, 초원에 서 있는 작은 예배당...
가보고 싶은 곳의 리스트가 무척 많습니다.
돌로미티에는 140여 개의 곤돌라, 리프트, 케이블카, 푸니쿨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
물론 트래킹이나 하이킹을 하는 사람도 제법 많습니다.
반려견이나 아기를 둘러메고 다니는 사람들도 꽤 많이 볼 수 있었어요.
그게 어려운 사람들은 여러 가지 탈 것들을 이용하면 편리합니다.
돌로미티 슈퍼 썸머 패스를 구입하면 그 모든 것들을 무제한 탑승할 수 있지요.
그곳에 머무르는 기간, 그러니까 개인의 니즈에 따라 구입하면 됩니다.
예를 들자면 가장 인기 있는 곳, '알페 디 시우시'를 1회 왕복할 수 있는 티켓은 성인 기준 40.8유로,
세체다는 무려 52유로예요.
반면 하루 동안 여러 곳을 이용할 수 있는 1 day 패스는 65유로입니다.
3 out of 4는 패스를 개시한 후 나흘 동안 3일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고요.(140유로)
5 out of 7 은 패스를 개시한 후 7일 이내에 5일 동안 무제한 사용할 수 있습니다.(180유로)
그런데 각각의 개장, 폐장 시간이 조금씩 다릅니다.
보통 아침 8시 30분이나 9시에 시작해서 오후 4시 30분 ~ 6시에 끝나지요.
그러므로 하루에 두 곳은 갈 수 있어도 세 곳은 무리입니다.
오르티세이 시내에는 알페 디 시우시와 세체다로 오르는 곤돌라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가까운 거리라 하루에 두 곳을 다녀오는 게 가능합니다.
여행자들이 보통 돌로미티에 머무는 기간은 보통 3박 4일 정도.
7박 8일 예정인 나는 그래도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가고 싶은 곳이 정말 많았어요.
여행을 떠나기 전 생각은 5 out of 7 패스를 살 요량이었습니다.
하지만 날씨를 지켜보고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알프스 산맥의 일부인 북부 이탈리아의 돌로미티 산맥(The Dolomite)은 높이가 3,000m 이상인 봉우리가 18개, 총면적은 서울시의 약 26배로 무척 넓습니다.
게다가 구불거리는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므로 녹록지 않지요.
물론 올라가서 사진만 찍고 후다닥 내려오는 방법을 쓰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만요.
흔히 알프스산맥 하면 보통 스위스나 오스트리아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영유하고 있는 알프스의 면적은 무려 27.2%.
알프스의 면적을 가장 많이 차지한 오스트리아(약 28.7%)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반면 스위스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14%.
그런데 알프스 하면 바로 스위스를 떠올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위스라는 나라 전체 면적의 60%가 알프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전체 알프스 중 4,000m가 넘는 봉우리는 모두 82개인데 그중 48개가 스위스에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알프스=스위스'로 인식되는 거죠.
돌로미테는 스위스의 융프라우(2001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에 이어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돌로미테', 또는 '돌로마이트'라고 불리는 이 이름은 사람 이름이며 동시에 암석 이름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광물학자 데오다 그라테 드 돌로미외(Déodat Gratet de Dolomieu)가 이 산맥의 독특한 암석을 탐사하고 이 산맥을 이루는 주성분이 백운석이라는 것을 밝혀냈지요.
그래서 이 산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돌로미티"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암석의 한 종류인 백운암(白雲岩)은, 주로 백운석(dolomite)으로 구성된 퇴적 탄산염암을 말합니다.
날은 밝았는데 해는 보이지 않습니다.
구름의 형체는 보이지 않고 하늘이 온통 회색빛, 공기가 아주 차가웠지요.
비가 내려도 괜찮은 곳이 좋겠다 싶은 곳부터 가야겠다 싶습니다.
뜨거운 둥굴레차를 한 잔 마시고 숙소를 나섰습니다.
비옷이랑 우산도 챙기고 혹시 몰라 경량패딩도 넣었지요.
시계를 보니 6시 23분입니다.
그곳이 어디든 빨리 가보고 싶으니까요.
***
먼저 자동차 이야기 좀 해야겠습니다.
가르다 호수 옆 마을에서 하루를 지낸 아침, 안드로이드 오토 연결시도를 했습니다.
짐작대로 스마트폰의 충전잭, 그러니까 C to C 포트가 맞더군요.
드디어 구글맵이 차량 디스플레이 화면에 연결되었습니다.
다행이다 싶었지요.
안드로이드 오토를 사용하려면 차량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스마트폰이 모두 안드로이드 오토를 지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서 다 지원이 되는 게 아니라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제 목적지를 입력하고 출발합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이탈리아의 능선은 평화롭고 고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얼마가지 않아서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지요.
"300m 앞에서 좌회전입니다."
하는 내비게이션의 비명에 의해서 말이죠.
그건 안내 음성이 아니라 헤비메탈 보컬의 샤우팅이었습니다.
당황한 나는 스마트폰의 시스템 음량, 미디어 음량 등 모든 음량을 줄여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구글의 마이크를 누른 후, 볼륨 줄여달라고 음성 명령도 해봤습니다.
이번엔 디스플레이어에 떠있는 음량 버튼을 터치해 봤지요.
아뿔싸!
내비게이션의 지도가 사라지고 아예 다른 창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이것저것 터치를 해봐도 사라진 지도는 돌아오지 않았지요.
지도가 사라지니 갑자기 장님이 돼버린 꼴입니다.
그야말로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하는 존재론적 질문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40km/h로 달리는 S자 커브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식은땀이 났습니다.
다시 앱을 켜보려고 누르니 이탈리아 라디오 방송에서 아나운서가 샤우팅을 하고, 그 사이 도로는 또다시 U턴으로 접히는 중입니다.
누군가는 거의 비명을 지를 지경에 이르렀지만 침착하게 운전을 이어갔지요.
마침내 차 한 대를 겨우 세울 수 있는 구세주 같은 작은 갓길이 나타났습니다.
비상등을 켜고 잠시 정차한 후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켜고 안드로이드 오토를 연결했습니다.
여전히 고막을 찢을 정도로 음량이 컸지만 그래도 참고 가보기도 했어요.
숙소에 도착한 후 다시 해결해 볼 요량입니다.
그리고 오늘입니다.
문제는 자동차가 주행해야 내비게이션이 작동을 하니 멈춰있는 상태에서는 음량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일단 출발했습니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S커브와 U턴급의 급커브 구간에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록 페스티벌급의 안내 음성은 정신을 빼놓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는 소리에 무척 민감합니다.
그것은 음악을 전공한 후천적인 이유도 있지만 천성적으로 시끄러운 걸 싫어하지요.
'그래도 안 들리고 안 보이는 것보다 낫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심호흡을 하며 멘털을 잡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브레사노네(Bressanone, 독일어로 브릭센 Brixen)에 주차를 하고 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돌로미티 부근 지역은 어딜 가나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함께 사용합니다.
때때로 라딘어를 함께 표기하는 곳도 있어요.
지명도, 식당 메뉴도, 버스 표지판도, 심지어 곤돌라 이름도 각각 다른 언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알페 디 시우시 (Alpe di Siusi)는 이탈리아 이름이고,
독일어로는 자이저 알름(Seiser Alm),
라딘어로는 몽 슉(Mont Sëuc), 이렇게 완전히 다릅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였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게 되었고, 독일어 사용은 여전히 유지되어 현재까지 이탈리아어와 독일어가 공존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이태리어보다 독일어가 더 많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나는 분명 이탈리아에 있는데 주변에서는 독일어가 들리니까요.
아침 7시, 따뜻한 커피가 필요합니다.
마침 그 시각에 문을 연 카페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다소 무거운 뜻의 이름, '까르마(Carma)'
그곳 사람들도 역시 독일어를 쓰더군요.
크루아상과 오믈렛,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파리의 유명 베이커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바삭하고 고소했지요.
보들보들한 오믈렛, 센스 있게 뜨거운 물까지 갖다 주어 따뜻한 커피도 충분히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냥 그곳에 아침 식사를 하러 온 것이라 해도 만족할 수준이었지요.
비가 잦아드는가 싶어 거리로 나갔습니다.
비 내리는 브레사노네는 숨죽인 엽서 같습니다.
15세기에 지어진 화이트 타워는 비에 젖은 회색 하늘 아래 더욱 뚜렷하게 떠 있었고 고딕 양식의 대성당은 촉촉한 공기 속에서 금빛 제단을 숨기고 있습니다.
창밖 쇼윈도에 걸린 예쁜 도자기와 섬세한 수공예품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도시의 속삭임이었지요.
누구나 한 번쯤은 비 내리는 유럽의 골목길을 걷는 상상을 할 겁니다.
그 상상을 그대로 실현해 줄 도시. 딱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거리를 걷는 동안 점차 빗줄기가 가늘어집니다.
다시 차에 올랐습니다.
'산타 막달레나로 가보자'
비는 그쳤지만, 마을과 오들레 산군에는 여전히 하얀 구름이 낮게 걸려 있었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숨결처럼, 초록의 능선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는 그 모습은 눈을 떼기 어려웠지요.
산타 막달레나 교회로 오르는 트레일에서 나는 여러 번 멈춰 섰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 걸음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올라갈 때 잠깐 뒤돌아본 풍경은, 내려올 때 마주한 풍경과 사뭇 다릅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으니까요.
올라가는 길에 언뜻언뜻 오들레 산군의 모습이 보였지만 내려올 때는 구름 장막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습니다.
18세기, 한 광산주가 의뢰해 세웠다는 라누이 교회.
구리로 만든 양파 모양의 돔 꼭대기에는 작은 별 하나가 조용히 매달려 있었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 위에, 교회는 마치 잘 차려입은 도련님처럼 단정하고 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 자태는 아름답다는 말로는 감히 부족합니다.
바람조차도 경건하게 속삭이는 풍경이었지요.
그곳에는 나와 DSLR을 든 젊은 커플, 오직 세 사람만이 있었습니다.
주차 머신 앞에서 잠깐 대화를 나누었기에 내가 혼자 왔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여자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넸습니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나는 웃으며 고맙다고 했고 서슴없이 카메라를 건넸습니다.
보통은 스마트폰을 건네지만 그녀와 남자 모두 본격적인 장비를 갖춘 모습이었기에 자연스레 신뢰가 생겼거든요.
그녀는 내 앞모습을 몇 장 찍은 뒤 말했습니다.
"이번엔 몸을 살짝 돌려 교회 쪽을 바라보세요."
"그다음, 뒤돌아서 천천히 걸어볼까요?"
그녀의 말투엔 전문가다운 디렉팅이 들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흐름을 이끌었지요.
촬영이 끝나고 사진을 보기도 전에 나는 웃으며 물었습니다.
"혹시, 사진작가세요?"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네, 맞아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가 찍은 사진을 보니 그 순간의 바람과 빛,
그리고 나의 미묘한 긴장감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지요.
"정말 맘에 들어요, 고마워요."
남자는 삼각대를 설치했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교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긴 초원을 가로지르며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그날의 풍경보다도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는 순간도 몇 장 남겨두었죠.
돌아온 두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제가 몇 장 찍었는데, 이메일 주시면 보내드릴게요."
그녀는 너무나 기쁘게 웃었고 그렇게 작은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로레나.
국영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엔 아직 가본 적 없지만 조만간 꼭 가보고 싶다고 했지요.
약속대로 나는 사진을 보냈고 그녀는 어서 빨리 프린트해서 집에 걸어두고 싶다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서로 내일의 일정을 이야기하며 왓츠앱으로 문자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들이 트레치메에 간다고 하더군요.
나도 가고 싶었지만 이번엔 못 갈 것 같다고 했어요.
다음 날, 로레나는 그곳에서 찍은 사진과 영상을 보내주었습니다.
화면 너머로 바람이 불고, 그녀의 시선이 담긴 산이 펼쳐졌습니다.
우연히 만난 풍경 속에서 뜻밖의 사람이 말을 걸어옵니다.
어쩌면 인연은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보다도,
그친 후 머물다 가는 구름처럼 조용히,
그러나 깊게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로레나와 헤어져 주차장으로 가는데 그곳이 어디쯤인지 모르지만 반대 편 하늘이 파랗게 드러나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워낙 이른 아침에 나왔으니 그때가 11시가 조금 넘었더군요.
숙소로 돌아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입니다.
게다가 비도 그쳤으니까요.
볼차노로 가봐야겠습니다.
이탈리아에 오니 고민거리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ZTL',
"Zona Traffico Limitato"의 약자로, 차량 통행이 제한된 구역을 의미합니다.
주로 역사적인 도시 중심부나 환경 보호가 필요한 지역에 설정되며, 허가받지 않은 차량의 출입이 제한되지요.
위반 시에는 큰 벌금이 부과되니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올드 타운에 가까우면서 ZTL을 거치지 않는 주차장을 찾아 출발했습니다.
돌로미티는 어딜 가나 산을 넘기 마련입니다.
직선 도로가 거의 없지요.
당연히 1차선 도로입니다.
차만 다니면 또 낫습니다.
MTB 라이더들이 수시로 앞길을 막거나 맞은편 커브에서 나타나서 움찔움찔하게 만들죠.
게다가 무리 지어 다니는 모터 사이클 동호회원들이 굉음을 내며 아찔하게 추월을 하면 가슴이 벌렁벌렁합니다.
그래도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여행에서는 어느 정도의 기세가 필요하니까요.
내 차선을 지키며 안전 운전을 해나갔습니다.
산길은 보통 외길이라서 내비게이션의 안내 음성이 자주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헤비메탈급의 샤우팅 같은 안내음을 자주 들어야 하는 구간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이제 내비의 큰 음량에 경련성 반사작용을 보이기 시작했지요.
음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못 찾는다면 차라리 안드로이드 오토를 포기하고 그냥 스마트폰으로 구글 맵을 사용하는 편이 낫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습니다.
그 순간 문득 핸들의 왼쪽에 +와 – 버튼이 보였습니다.
'맞아, 이게 있었지?'
그런데 문제는 내 차와는 달리, +와 – 버튼이 위아래 두 개였지요.
우선 아랫줄의 –를 몇 번 눌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지요.
그 사나웠던 내비게이션 음성이 갑자기 순한 양처럼 조곤조곤해졌으니까요.
'바로 이거였어?'
비로소 나는 헤비메탈의 콘서트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또 무슨 일일까요?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별안간 주행속도를 나타내는 대시보드의 중앙에 빨간 자동차 싸인이 나타나면서 삑삑 경고음을 울립니다.
불과 2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었지요.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지고 주행속도 숫자가 나타난 겁니다.
그 빨간 자동차의 형태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크기에, 모양도 입체적이어서 정말 놀랐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모양이 사라진 후 대시보드를 살펴봤지만 어떤 경고등이 켜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가령 브레이크 오일이라든가, 배터리, 안전벨트, 문 열림, 연료 부족 등등 모든 경고등은 정상적인 상태였지요.
그렇다고 주행 중인 내 앞에 다른 자동차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충돌 예방 경고도 아니지요.
게다가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도로도 아닌데 말이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단 맞은편 바위 아래의 공간에 정차를 했습니다.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켜봤죠.
역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건 또 뭐지?'
자동차가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나랑 궁합이 안 맞는 듯했지요.
하지만 산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일단 경고등이 지속적으로 켜진 게 아니니 문제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볼차노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 입구에서 자연스럽게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를 따라 내려가니 이미 만차, 게다가 출차를 기다리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아갈 뿐입니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몇 바퀴를 돌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다른 주차장을 검색해보려고 했지만 인터넷 연결이 안 되더군요.
일단 밖으로 나갈 요량으로 출구 쪽으로 향하다 보니 2층 입구가 보였지요.
뭔지 모르지만 일단 올라갔습니다.
빈자리가 꽤 많더군요.
감사했지요.
볼차노(Bolzno, 독일어는 보첸 Bozen)는 작지만 우아함이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햇살이 건물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골목마다 은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요.
광장의 중심엔 커다란 동상이 서있습니다.
누군가 살펴보니 독일의 음유시인인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입니다.
그렇게 그곳이 발터광장인 이유를 알았습니다.
광장에는 카페, 꽃으로 만든 탑,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알프스 햇살을 품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살짝 덥기까지 합니다.
광장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아케이드에 상점들이 줄지어 있는 '비아 데이 모르티치(Via dei Portici)'가 나옵니다.
여기저기 세련된 감성들이 뚝뚝 묻어납니다.
고딕 아치 아래로는 패션 숍과 서점, 초콜릿 상점들이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만든 미학처럼 느껴졌지요.
점심 식사를 하려고 들어간 레스토랑의 이름은 '37'
멋진 옥상 테라스로 통해 들어오는 빛이 아름다웠습니다.
직원의 추천으로 '라비올리 알 라구'를 주문했는데 여태껏 먹어본 라비올리 중 최고의 맛이었습니다.
쫀득한 파스타 안에 들어있는 고기(라구 소스)는 부드러우면서 고소했지요.
게다가 간도 세지 않고 적당했습니다.
꽤 많은 양임에도 접시를 싹싹 비웠지요.
'이곳의 이름 37은 무슨 뜻인가요?
'아~ 그거요? 별 다른 뜻이 아니라 여기 주소가 로스민 거리 37번지거든요.'
하며 멋쩍게 웃었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단순한 게 근사할 때도 있지요.
내비게이션의 목소리가 줄어들으니 비로소 풍경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주차 타워에서 헤매던 기억도, 갑자기 빨간 자동차 그림이 나타나 삑삑거리던 순간도 여행의 한 장면이고 소중한 기억입니다.
숙소로 돌아와 주차를 하고 슈퍼 마켓으로 향했습니다.
치즈, 버터, 달걀, 채소, 과일, 올리브, 피클, 냅킨, 봉골레, 홍합, 하리보 등 신나게 담았습니다.
그중 가장 반가웠던 건 밸런타인 파이니스트가 13유로 밖에 안 한다는 사실이었죠.
장바구니 두 개를 어깨에 메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드디어 위스키를 마실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초록빛 아스파라거스가 프린트된 냅킨 위에 수저를 세팅하고,
오목한 흰 접시엔 루콜라, 체리토마토, 모차렐라 치즈가 얹힌 샐러드를 담습니다.
싱그러운 채소의 결이 살아 있고, 토마토의 붉은색은 한 점의 붓질처럼 선명합니다.
황금빛 위스키를 담은 곡선의 글라스가 더해지니 단출한 저녁 식사가 근사해지는 매직!
노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노라 존스의 목소리가 흘렀습니다.
"Don't Know Why"
음악이 흐르고 배경에 머무는 음표들이 공간을 부드럽게 감쌉니다.
그리고 AI는 이미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 제니퍼 원스의 "Famous Blue Raincoat"로 이어졌지요.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는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