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비

18. 오르티세이

by 전나무




여행 중 좋은 순간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계획 없이 나선 곳에서 그저 '가만히 바라만 봐도 좋은 곳'을 만나게 되면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나는 이탈리아 북부의 지도 한쪽 귀퉁이에 접혀 있는 마을들을 펼쳐 본다.

낯선 곳, 덜 알려진 곳을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호숫가에 성 하나를 끼고 앉은 시칼리제르.

지도 가장자리에서 눈에 띈 바르돌리노.

종소리가 느리게 울리던 브레사노네.

그리고, 오후의 빛이 너무도 환하던 볼차노.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 길 위에서 나는 걷고, 바라보고, 가끔 멈춰 섰다.

돌담에 비친 햇살, 골목 끝의 정적, 혼자여서 더 가까이 풍경을 들을 수 있던 시간.

이 모든 것들이 지도 밖의 마을, 서두름 없는 풍경이다.




<산타 루치아>라는 이름의 B&B는 '미네르바 델 가르다'에 있다.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처럼 조용한 마을이다.

멀리 가르다 호수가 보이고 겹겹이 접힌 산의 능선, 포도밭과 올리브나무, 그리고 노란색과 주황빛 집들이 자잘한 그림자 속에서 낮은 숨을 쉬고 있다.

돌길은 혼자 걷기에 딱 좋을 만큼만 쓸쓸했고, 재스민꽃은 벽을 타고 흘러내리며 묵은 향기를 피우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 나를 흥분시켰던 돌 아치, 그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마치 오래된 시의 문장처럼, 부서진 곡선을 따라 이끼가 소곤대며 옛 시간을 살고 있다.

어쩌면 그 밤의 산책은 이 마을에 건네는 인사였을 거다.





다음날 새벽,

같은 길을 다시 걸었다.

그러나 어젯밤보다 한결 더 느린 속도로.

잠에서 깬 건, 지저귀는 새들과 습기를 머금은 공기와 빛이 흘러가는 소리였다.

멀리 보이던 교회 종탑 위로, 아침 해가 얇게 번지고 있다.

돌계단에 앉은 고양이 한 마리,

철제 창살에 걸린 낡은 커튼,

그리고 창가에 매달린 흰색 재스민 가지 하나,

더 바랄 게 없다.






바다처럼 펼쳐진 가르다 호수 옆의 작은 마을, 시르미오네에 들어가려면 물 위의 성벽을 지나쳐야 한다.

'시칼리제르 성(Scaliger Castle)'

700년 전, 베로나의 한 가문이 이 아름다운 반도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쌓은 성이다.

그 시절엔 무장한 병사들이 성문을 지켰을 테지만 지금은 느긋한 관광객들이 성 주위를 걷고 있다.









성문을 지나면 골목마다 노천카페의 웃음소리가 호수 쪽으로 번진다.

노란색 벽이 예쁜 카페의 파란 식탁보가 성에서 내려오는 시선과 만난다.

유람선 선착장에는 가르다 호수에 면한 반도를 돌아보는 작은 배들이 오가고 있다.

물 위에서 맞는 성의 풍경은 땅 위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거다.

이제 시르미오네를 떠나 가르다 호수의 남쪽으로 내려간다.







바르돌리노(Bardolino)

이곳의 가르다 호수에는 요트, 보트, 패들보트, 카약 등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게다가 호수 주변에는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보다 싶어 이탈리아, 6월 2일을 검색해 보니 이탈리아 공화국 기념일, 즉 국경일이었다.

게다가 어제가 일요일이었으니 말 그대로 황금연휴.

그제야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알았다.








올드타운의 돌길과 담벼락, 그리고 꽃으로 덮인 발코니.

아이스크림 가게와 카페, 기념품 가게가 활짝 열려 있다.

Biri라는 식당에서 바질 소스 새우 파스타와 탄산수를 주문했다.

건강한 미소에 싹싹한 웨이터가 말했다.

'와인은 어떠세요?'


그럴 만도 한 것이 그곳은 베네토 지방의 유명한 와인 생산지이기 때문이다.


'좋지요, 그런데 운전을 해야 하거든요.'

'아~, 그렇군요. 맛있게 드세요.'


파스타는 익숙한 평범한 재료인데 맛은 낯설 만큼 깊었다.

그곳의 오후는, 사람들로 시끄러웠지만 입 안의 풍미만은 조용하게 오래 머물렀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곳이 아무리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시끄러운 곳은 더 질색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찾아 작은 마을에 왔건만 연휴 인파에 기가 딸렸다.

예쁜 상점도, 작은 골목도 돌아다닐 의욕이 없다.

어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르돌리노를 떠나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던 평온한 시가지가 점점 희미해질 즈음, 산등성이 위로 투박한 돌벽의 고성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오래전 누군가의 이야기가 지금도 그 성곽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말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도로가 꼬불꼬불한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몸을 틀며 산길로 접어들었다.

굽이마다 시야가 열리고 녹음 짙은 능선이 계단처럼 쌓여 있다

그렇게 차가 오르티세이 쪽으로 방향을 틀 무렵 마치 무대 위에서 커튼이 열리듯, 돌로미티의 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낮은 운무 아래 칼날처럼 솟은 산의 윤곽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이제 진짜, 알프스로 들어가는구나.”


차창을 열었다.

먼 산의 눈 녹은 냄새와 풀 냄새를 머금은 차가운 공기가 훅 느껴졌다.

현재 기온 12도

어제 밀라노는 31도, 땀을 비 오듯 흘렸는데 말이다.

그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일주일 내내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신이 난다.

일상이 아닌,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어딘가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잎 사이로 붉은 지붕과 나무 발코니가 반짝였고,

그 배경에는 눈이 녹지 않은 돌로미티의 봉우리가 하늘 위에 무심한 얼굴로 떠 있었다.


지금부터가 진짜지”


아무 계획도, 일정도 없이 다만 이 풍경 속에 한동안 머물 수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오르티세이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건 한 여인이었다.

이름은 밀카.

구불구불 길게 늘어진 금발, 짧은 민소매 원피스, 그리고 심하게 짙은 화장.

눈을 어디 두어야 할지 어색할 정도로 낯선 비주얼에 조금 당황했다.

소피아 로렌을 연상케 하는 조금은 육감적이고, 조금은 세 보이는 첫인상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예쁘세요."

그녀는 그런 말을 듣게 된 오늘이 '럭키 데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 스스럼없는 여유가 있었다.

그 숙소의 호스트는 ‘데이비드’.

예약 확인서에도, 연락을 주고받던 메시지에도 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는 동안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의 존재는 오직 인터넷상에만 머물렀고, 현실의 열쇠와 리모컨, 따뜻한 인사는 모두 밀카의 몫이었다.

그녀는 아마 이 숙소의 호스트 데이비드의 어머니가 아닐까 짐작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다음 날 사실로 드러났다.


그녀는 지하주차장 리모컨과 내가 묵을 객실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지하에 있는 사우나 시설도 안내하면서, 마지막까지 화사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이 왠지 인상에 깊이 남았다.


그녀는 마치 이곳의 여왕처럼 보였다.

기온이 제법 낮은 아침에도, 비 오는 저녁에도 언제나 짧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당연히 굽이 높은 샌들만 신는다.

언제나 허리를 곧게 세우고 기품 있게 걸었다.

그것은 일종의 에티튜드였다.

숙소를 운영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루를 사는 사람'?

그 자신감이 나쁘지 않다.

밀카가 조금씩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숙소는 주방이 완비된 레지던스 호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넓고 깔끔하며 나무랄 데 없이 맘에 들었다.

대중소 크기별로 준비된 냄비 세트, 역시나 대중소 크기의 칼, 게다가 프라이팬은 테팔이다.

4구의 인덕션도 깔끔하고 화력도 좋다.

접시며 와인 잔까지 그릇들도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앞쪽 발코니로 나가면 오르티세이 시가지 풍경이, 뒤쪽 발코니에서는 알페 디 시우시로 오고 가는 곤돌라들이 보였다.

게다가 지하 주차장은 늘 여유 공간이 있어 주차 스트레스도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하다.




짐을 풀고 장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숙소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슈퍼마켓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다른 슈퍼마켓들도 마찬가지다.

그날이 이탈리아의 국경일이라 혹시나 해서, 구글에서 '영업 중'이라는 확인까지 하고 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기대는 낭패로 돌아왔다.

다른 부식들은 하루쯤은 버틸 수 있었지만 생수가 없다는 건 조금 곤란했다.

끓여 먹자, 생각하며 돌아왔는데 마침 밀카를 만났다.

“슈퍼마켓이 다 닫았네요.”

“맞아요, 오늘이 국경일이라 그럴 게예요. 뭐가 필요해요?”

“사실… 이것저것 많지만, 당장 물이 없네요. 수돗물 그냥 마셔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마치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여기 물은 최고예요. 걱정 말고 그냥 드세요. 아주 깨끗해요.”

듣고 나니 그럴 것도 같았다.

오르티세이는 해발 1300m의 고지대이고 이 지역 모두가 알프스 산맥이니까 말이다.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당황스러운 순간에 누군가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은 그 자체로 충분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차가운 수돗물 한 컵이 기대 이상으로 상쾌하게 느껴졌다.


라면 물을 올리는데 희끄무레한 커튼 틈으로 기척이 들렸다.

그렇게 비는 소리가 먼저 왔다.

가늘고 단정한 빗줄기,

초여름의 얇은 종이를 찢는 듯한 섬세한 울림.

이따금 튕기는 물방울,

하얀색 철재 테이블에 닿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를 따라 차가운 공기가 훅하고 밀려들었다.


나는 그대로 섰다.

반쯤 열린 문 앞에 그 차가움과 소리와 비 냄새를 그대로 껴안았다.

안락한 실내의 온기와 바깥의 냉기 사이, 그 경계에 선 기분이 좋았다.

쌀쌀하다기보다 선명했고, 외롭다기보다 행복했다.


라면물이 끓고 있다는 걸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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