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크로메르지시(Kroměříž)
세 번째 프라하.
지난 여행은 2박씩 짧게 머물렀던 터라 아쉬운 기억이 있었지요.
이번엔 밤낮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거리를 걸어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구시가지에서 주차장 딸린 숙소를 찾는 건 쉽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하엔 널찍한 주차장이 있고 프런트에 직원이 24시간 상주하는 훌륭한 곳을 예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밥 지을 냄비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전기포트가 없어서 차를 마시려면 불편하더군요.
3~4박도 아니고 6박을 할 거라 어떤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맘에 호스트에게 이러한 사정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묵직한 스테인리스 냄비 두 개와 전기 포트를 프런트에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분 좋은 출발입니다.
프라하 구시가지는 여전히 분주했습니다.
어디를 가도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밀려드는 사람들의 흐름에 기가 빠지는 느낌이었지요.
우리 셋은, 번잡하고 시끄러우면 무기력해지는 성향입니다.
이제 광장에 도착했을 뿐인데 말이지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에너지를 보충시켰습니다.
천문시계 앞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일제히 천문 시계를 향해 스마트폰을 든 채 인형쇼를 찍고 있었습니다.
카메라를 꺼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어요.
아니, 의욕 자체가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겁니다.
커피 한 잔, 만 원.
시청사 탑에 올라가려면 입장료와 엘리베이터 요금이 약 4만 원.
음식 값은 이미 서유럽과 다를 바 없고, 팁은 맛과 상관없이 의무처럼 따라왔습니다.
프라하는 더 이상 물가 저렴하고 소박한 도시가 아니었지요.
그래도 이곳에 또 올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첫날과 마지막 날을 프라하에서 보냈습니다.
카를교를 건너고, 비투스 성당에 들어가 알폰소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고, 카프카의 작은 집에도 들렀습니다.
그의 얼굴을 모티브로 만든 회전하는 두상 앞에서 잠시 멈춰 서기도 했지만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끝내 변신을 보여주지 않았지요
마지막 밤에는 카를교가 보이는 블타바 강가를 거닐며 보았던 야경으로 아쉬움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을 뿐, 카메라는 한 번도 꺼내지 않은 채 프라하를 떠났습니다.
올로모우츠로 향하던 날, 고속도로 맞은편 차선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트레일러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기이한 풍경이었지요.
약 한 시간을 달리는 동안 트럭들은 빈틈없이 이어졌고, 유럽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물류의 길목이란 게 실감 났습니다.
휴게소마다 버거킹, 맥도널드, KFC가 자리한 풍경도 자연스럽습니다.
짧은 휴식 시간에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트럭 기사들이 많은 탓일 것이라 짐작했어요.
그 패스트푸드 간판들은 체코의 풍경이라기보다 '도로의 리듬'을 상징하는 기호처럼 보였습니다.
올로모우츠에서의 첫날은 특별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도시로 이동한 다음 날은 넉넉하게 비워두는 게 우리의 오래된 여행 방식이거든요.
하지만 크로메르지시로 가기로 한 날, 비 예보가 있어 일정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먼저 향한 곳은 모라비아(Moravia)의 심장부, 크로메르지시.
'모라비아'라는 단어는 입안에서 굴릴 때마다 묵직한 흙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보헤미아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오래된 정취가 서려 있고, 그 자체로 담담한 힘을 가진 땅.
크로메르지시는 고요한 기운을 품은 도시였습니다.
도시에 다가갈수록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활기찬 올로모우츠와는 달리 오래된 수도원 정원의 숨결이 느껴졌달까?
도착한 주차장은 놀랍게도 벨케 나메스티(Velkénáměstí) 광장 한복판.
체코에서는 중앙 광장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광장의 정경을 헤치는 것이 아쉽지만 나름 편리한 면도 있더군요.
광장은 커다란 크기에 비해 아늑합니다.
복숭아색, 민트색, 크림색의 파스텔 톤 건물들은 르네상스 양식의 박공지붕을 얹고 둘러서 있고, 햇살은 천천히 광장 중앙의 분수대에 스며들 듯 내려앉았지요.
물소리, 교회 종소리, 그리고 희미한 생활 소음이 배경음처럼 깔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졌지만 첫인상은 오히려 따뜻하고 평범했습니다.
계획은 단순했습니다.
대주교의 성을 보고, 정원을 걷는 것.
그러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요.
비수기여서인지 주말에만 오픈하더군요.
근위병이 서 있어야 할 작은 초소도 비어 있습니다.
밀로스 포만 감독이 '아마데우스'를 촬영했던 성의 회랑을 넘겨다보며 안쪽에 남아 있을 잔향을 상상해 보았어요.
모차르트의 웃음소리와 은빛 목관악기가 어디선가 들려올 것 같았지요.
그 도시엔 음악의 기운이 은근히 묻어 있는 듯합니다.
모라비아의 작은 도시 속을 부유하듯 걸었습니다.
발길 닿는 대로 거닐다 보니 광장과는 또 다른 위엄을 풍기는 건물들이 나타나곤 했지요.
고풍스러운 양식의 짐나지움(Gymnasium, 고등학교) 은 겉모습만 봐서는 영락없는 대학이나 관공서 같습니다.
학생들 대신 가발을 쓴 귀족들이 드나들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요.
조금 더 걷자 웅장한 법원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 압도적인 규모와 권위적인 외관은 이 작은 도시가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지였음을 묵묵히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거리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어요.
사람들이 18세기 복식으로 옷을 갈아입는다면, 당장이라도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들 법했습니다.
프라하를 비롯해서 체코의 여러 도시들은 전선이 지중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대극 촬영에 안성맞춤이지요.
실제로 영화 '아마데우스'도 프라하를 비롯하여 체코의 여러 도시들에서 촬영되었습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달라졌습니다.
광장과 달리 그늘이 져 있었고 바람은 한층 더 서늘했지요.
물 먹은 벽돌과 회벽에서는 오래된 냄새가 스쳤고, 비틀어진 돌길은 발바닥에 거친 감촉을 남겼습니다.
이 도시의 공기가 몇 세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상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바람이 정원을 스치며 은근한 향을 데리고 왔어요.
그리고 어디선가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길 끝에서 장미 몇 송이가 가지런히 놓인 작은 화단이 있었지요.
장미는 마치 오래 기다린 손님을 맞이하듯 은은한 빛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풍경을 만났습니다.
낡은 갈색 담장 지붕 위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두 송이의 붉은 장미.
푸른 하늘 아래 선명한 붉은빛이 오래된 도시의 호흡을 깨우는 듯합니다.
바람이 불어 꽃잎이 흔들릴 때마다 화면은 조금씩 달라졌지요.
그 순간만큼은 어떤 화려한 유물보다 이 장면이 더 값지게 느껴졌습니다.
그 한 장이 이 도시에서의 기억을 오래 붙잡아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거든요.
점심 식사를 하러 들어간 식당은 로컬 맛집임을 증명하듯 손님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식전 수프를 먼저 먹고 있더군요.
심지어 KFC나 맥도널드에서도 수프를 판매하고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아왔던 터라 메뉴 세 개와 수프 한 개를 주문해 보았습니다.
버섯과 양배추가 들어간 수프는 생각보다 짭짤했고 양도 많아서 3개를 시켰으면 오롯이 남길 뻔했습니다.
비록 성문이 닫혀 있었지만 크로메르지시는 넉넉한 도시였습니다.
광장은 비어 있었지만 풍경은 충만했고, 사람은 드물었지만 세월의 흔적은 간명했어요.
광장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올로모우츠로 돌아가는 길,
차창에는 흐린 하늘이 비치더니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비록 B컷 같은 크로메르지시였지만, 마음속에서는 A컷으로 남은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