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올로모우츠(Olomouc)
들판이 낮아지고
지붕들은 부드럽게 기울고
바람이 느리게 불어오면
풍경은 어느 순간 느슨해진다.
숙소가 있는 골목 어귀에 도착했을 때, 어떤 연출도 강요도 없는 무심함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렇다.
기대가 가벼울수록 마음이 가벼운 법이다.
발코니로 나가자 올로모우츠의 차가운 공기가 천천히 스며들듯 느리게 들어왔다.
프라하와는 사뭇 다른 적막감이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 우유, 채소와 감자, 적양배추 절임, 토마토들과 와인 한 병, 아일랜드 식탁 위엔 빵과 쿠키, 넉넉한 캡슐커피들이 풍성하게 놓여 있었다.
웰컴 와인은 종종 보았지만 이토록 '따뜻한 준비'는 처음이라 호스트인 테레자의 훈훈한 마음이 전해졌다.
광장에 들어섰지만 눈이 번쩍 뜨이는 새로운 장면은 없었다.
'작은 프라하'라고 불리는 곳이지만 마음을 어지럽히는 소란스러움도 없다.
오래된 길과 건물이 가진 고유의 품위가 도시 곳곳에 깃들어 있고, 그 위로 부드러운 종소리가 배경음처럼 흐를 뿐이다.
유네스코 유산인 삼위일체 기둥은 보수 천막으로 가려 있어 볼 수 없었다.
체코 도시마다 있는 삼위일체 기둥은 흑사병 이후 구원에 대한 염원이 형상화된 것이지만, 특히 이곳의 기둥은 규모와 섬세함에서 도시의 부와 자존심을 드러내던 상징이었다 한다.
2차 대전 때 적군에게 포위되었던 시절, 시민들은 "제발 기둥만은 쏘지 말아 달라"라고 애원했다는 이야기가 왠지 이 도시의 성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광장 벤치에 앉아 있으니 도시가 스스로 속도를 조절해 주는 듯했다.
가득 채워진 풍경보다 비워진 자리로 시선이 간다.
그 미묘한 널찍함이 마음을 은근히 늦추었다.
이곳 시청사에도 천문시계가 있다.
프라하 천문시계 앞의 소용돌이 같은 인파와 달리 이곳은 한가롭고 넓다.
명도와 채도가 낮은 색감들이 주변을 조용히 가라앉힌다.
사회주의 시대에 다시 디자인된 시계 속에는 성인이나 성녀 대신 노동자, 과학자, 농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려함 대신 담백함이 오히려 맘에 들었다.
올로모우츠엔 유난히 분수가 많다.
신화 속 인물들이 오랜 상징물처럼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있다.
거북이가 자리한 분수는 작은 이야기 하나 품고 있는 듯 생기가 있었다.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마치 도시 위를 유영하는 듯한 모습의 생명체가 보였다.
하늘에 매달린 가오리 모양은 미할 트르팍의 작품, 바다의 전사들.
미세하게 흔들리는 움직임이 바다가 없는 나라 한복판에서 만난 잔잔한 파도 같았다.
미술관 외벽에 웬 남자가 매달려 있다.
배낭에 들어있는 훔친 작품이 반쯤 튀어나온 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하다.
이것은 다비드 체르니의 작품 '도둑'.
프라하에서 보았던 기이하고 위트있는 많은 작품들인 회전하는 카프카 두상, 오줌 누는 남자들, 매달린 프로이트 등이 모두 다비드 체르니의 작품이다.
그 비틀린 유머가 이 도시에도 닿아 있었다.
올로모우츠의 예술은 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길을 걷다 보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가 다시 도시의 배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햇빛은 지나가듯 들락거리고,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걸어갈 뿐이다.
여행지의 고요는 도시가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허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쁜 일정도 아닌 큰 기대는 더더욱 없이 들어서면 비로소 들리는 숨결들.
올로모우츠는 그런 도시였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 오히려 더 잘 들리는 도시.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기울었던 곳.
"Long story short, 간단히 말하자면"
오래된 돌벽과 철제 난간,
층고 높은 구조가 건물의 지나온 시간을 말해주었다.
한때는 군대 제빵소였다는 그곳은 지금은 호스텔이자 이터리(eatery), 베이커리로 쓰인다.
벽면 전체를 덮은 푸른 담쟁이로 인해 건물이 아니라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안뜰의 노란 잎들이 바람에 흩날렸지만 푸른 담쟁이들 덕분인지 어쩐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A부터 Z까지 모든 것이 맘에 들었던 곳, "Long story short"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를 만난 버터와 밀가루 반죽의 단순하고 정직한 향이 다가왔다.
여행지에서 의외로 가장 오래 남는 건 이런 작은 냄새와 온기일지 모른다.
수도원을 연상시키는 아치형의 천장을 가진 기다란 복도,
드문드문 놓인 테이블,
흰 벽과 기도 같은 낮은 빛,
누군가 금방 돌아와 책을 펼칠 듯한 조용한 기운.
그 풍경이 마음에 닿아 '여기서 며칠 묵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깊고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간결한 플레이팅,
과하지 않은 소스,
무너뜨리기 아까울 정도로 정교한 케이크,
진하지도 향을 무리하게 올리지도 않은 커피.
종업원의 우아한 태도까지 더해져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고요한 시간이었다.
만족한 브런치 타임을 마치고 나가려다 문득 발걸음이 멈췄다.
호밀 사워도우, 포카치아, 베이글, 크루아상, 시나몬 롤 등 잘 구워진 갈색 빵들이 진열된 풍경 때문이다.
숙소에 이미 식사용 빵이 있었지만, 그 빵들을 하나라도 사지 않는 건 대단한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를 집어 들었다.
바삭하고 고소하며 부드럽거나 쫄깃한 빵들도 예술의 한 장르가 아닐까?
모든 것이 과하지 않고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도시.
걸음을 재촉할 이유도 없고, 계획하지 않아도 허전하지 않은 하루.
그래서 올로모우츠는 무엇을 보았다가 아니라 어떤 호흡으로 머물렀는가가 남는 도시였다.
길 위에서 문득 떠오른 질문들,
잠시 머물던 시선들,
마음 한 구석의 작은 틈까지 고요가 천천히 스며들어 채우던 순간들.
여행은 결국,
눈부신 곳보다 서서히 스며드는 곳이 더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