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모라비아의 궁전들

12. 미쿨로프 (Mikulov), 레드니체 성, 발티체 성

by 전나무


여행의 반이 흘렀습니다.

어딜 가든, 기간이 얼마든 상관없이 예정된 일정의 반이 지나가면 시간은 그야말로 쏜살 같이 흐르는 듯합니다.

누구든 그런 느낌을 가져봤을 거예요.

그건 왜일까요?


여행 초반은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섭니다.

하나하나가 낯선 풍경, 처음 보는 길, 처음 먹는 음식…

이 과정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반면 여행의 중반이 지나면 낯섦이 줄고, 그 여행의 리듬에 몸이 적응합니다.

그런데 익숙해질수록 시간은 훅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져요.

처음 며칠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여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의 후반으로 갈수록 머릿속에서 남은 일수를 계속 계산하게 되죠.

시간의 종착역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속도는 더 빨라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행의 시작은 기대가 미래를 잡아 늘려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여행의 끝은 ‘돌아본다’는 감각이 뒤섞여

짧고 찰나처럼 느껴져요.


좋았던 여행일수록 “벌써 반이네?” “며칠 밖에 안남았어”라는 감각이 더 큽니다.

이렇듯 기쁨과 충만함은 시간의 속도를 앞당깁니다.

이건 바로 잘 놀고 잘 느끼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반대로 시간이 더디게 느껴진다면 문제가 있는 거죠.

지루하다거나 맘에 맞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일테니까요.



게다가 오늘(10월 26일) 새벽 3시에 summer time이 종료되었습니다.

한 시간이 앞당겨졌지요.

유럽의 서머타임은 매년 3월 마지막 일요일에 시작하여, 10월 마지막 일요일 새벽에 해제됩니다.

갑자기 시계가 한 시간 느려졌거나 빨라졌다면 고장이 아니라 서머타임의 시작과 종료를 생각해 볼 일입니다.

물론 스마트폰은 자동으로 변경되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1시간이 빨라졌으니 오후 4시 반만 되어도 어둑어둑해질 겁니다.

밤길 운전은 위험하니 되도록 일찌감치 돌아올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했지요.


미쿨로프로 향하는 길,

고속도로 이정표에 낯익은 이름이 지속적으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빈, 브라티슬라바.

마치 그 이정표들은 '여기서 얼마 안돼, 가까워'라고 손짓하듯 말이지요.

체코의 남쪽으로 이동하다 보니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와의 국경이 가까워지는 이유입니다.

작년 이맘때쯤 다녀왔는데도 왜 또 엉덩이가 근질근질할까요?


"한 시간이면 갈 수 있겠는데 그냥 이대로 비엔나에 갔다 올까?"

"좋지"


진담 같은 농담을 던지며 창밖의 포도밭을 바라보았습니다.

가지 끝에 매달린 작은 포도알들이 햇살이 닿아 유리구슬처럼 반짝였습니다.

아이스 와인을 위해 남겨둔 듯한 그 작은 알들에서, 모라비아의 풍요가 전해졌습니다.



미쿨로프는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산뜻한 색감으로 고르게 칠해져 있는 집들이 은은하게 숨 쉬는 귀족의 품격을 드러내고 있었지요.

단순한 고급스러움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와 취향이 만들어낸 빛깔이었습니다.

그 품격의 중심에는 디트리히슈타인(Dietrichstein) 가문이 있었습니다.

독일식 이름인 ‘디트리히슈타인’,

돌을 뜻하는 ‘슈타인’과 고대 게르만어 ‘디트리히’가 합쳐진 그 이름에서부터 단단한 권위가 느껴집니다.

시가지 중심부엔 가문의 묘당이 자리하고 있더군요.

마치 왕릉처럼 느껴질 정도로 크고 위엄 있었습니다.

물론 그 가문의 힘으로 지금까지 미쿨로프가 건재할 수 있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도시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성과 묘당, 계단과 정원에 미묘한 긴장과 우아한 균형을 만들어내고 있었지요.

성으로 오르는 길, 거친 바람이 몰아쳤습니다.

두 친구는 비니를 쓰고 있었지만 나의 버킷햇은 바람에 날리기 일쑤였지요.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머리에 썼습니다.


'어때, GD 스타일?'

'아니, GD가 아니라 쥐디 같아.'


합한 나이, 200살이 다 되어가는 세 사람은 마치 여고생처럼 깔깔대며 바람을 헤치고 궁전이 있는 언덕으로 올랐습니다.


붉은 지붕이 층층이 이어진 골목 위로 햇살이 비쳤고, 멀리 언덕 위에는 하얀 채플과 작은 순례자의 발걸음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그곳은 성스러운 언덕이라는 뜻의 '스파티 코페첵'.

전염병을 물리친 1622년, 추기경은 신에게 감사의 의미로 성 세바스티안 예배당을 지었고 그 후 붙여진 이름입니다.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언덕을 따라 늘어선 붉은 지붕의 집들 너머로 오스트리아의 땅이 보입니다.











성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감성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디트리히슈타인의 취향 때문이지요.

그는 르네상스 문화를 좋아했고 그의 예술적 취향이 계단과 복도, 중정의 곡선, 밝은 색감의 벽과 천장에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곳곳에 와인을 만드는데 쓰였던 거대한 압착기들이 보입니다.

모라비아의 와인 역사는 약 1,000년.

체코 와인의 95%가 이곳에서 생산됩니다.




중세 수도원들이 포도를 재배했고, 합스부르크 시절엔 귀족들과 함께 와인 문화가 크게 발전했어요.

미쿨로프가 우아하고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와인 문화와도 연관이 있더군요.

특히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은 유명 소믈리에도 인정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다만 수출이 없고 내수로 소비되기 때문에 유명세를 타지 못한 것이라고 해요.

그러므로 미쿨로프에서는 매년 9월 둘째 주 주말, 3일 동안 팔라바(Pálava) 와인 축제가 열립니다.

와인 경연대회를 비롯하여 음식 축제가 이어진다는데 전통 의상에서도 이탈리아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점심 식사를 한 곳도 이탈리아 비스트로입니다.

하지만 지리적인 특징인지 이태리,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아우르는 다국적 메뉴입니다.

아주 부드럽고 말랑한 식감의 깔라마리와 감바스 스타일의 통통한 새우 요리, 슈니첼까지 아주 맛나게 먹을 수 있었어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레드니체와 발티체는 미쿨로프와 함께 3종 세트로 방문해야 하는 성입니다.

두 곳은 각각 약 10Km 남짓,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지요.

성의 내부를 들어갈 만큼의 시간은 없었지만, 외관과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그곳의 기품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비가 얇게 내리던 오후,

첫 번째로 향한 레드니체의 정원이 희미하게 드러났습니다.

마치 오래된 유화 속에서 색이 번지듯, 레드니체의 네오고딕 궁전은 비에 젖어 부드럽게 빛났지요.

흰 레이스처럼 얹힌 장식, 첨탑 끝으로 맺히던 작은 물방울들, 호수 위로 내리는 회색빛의 가벼운 흔들림.

호수 주변을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몇 세기 전 귀족들의 산책길을 따라간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미쿨로프 성을 아름답게 가꿨던 그들은, 레드니체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상적인 정원을 구현했습니다.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걸으며 비를 풍경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운치 있고 고즈넉했습니다.

잠시 머문 그 고요가 아쉬울 만큼 짧았지만,

다음 목적지는 발티체에 가까워질수록 언덕을 따라 촘촘히 심어진 머스캣과 리슬링 줄기들이 창밖을 스치고, 궁전의 연회장이 떠오를 만큼 우아한 대칭 구조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발티체는 레드니체보다 조금 더 궁정적이었지요.

광장처럼 펼쳐진 앞마당, 중앙에서 위로 곧게 뻗는 계단이 한 시대의 음악적 리듬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레드니체가 ‘정원’의 언어였다면, 발티체는 ‘향기’의 언어랄까?

레드니체에서 맡았던 젖은 잔디의 싱그러움이 바람을 타고 연결되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미쿨로프—레드니체—발티체는 서로 다른 장소가 아니라, 한 가문의 호흡으로 이어진 하나의 풍경이었습니다.



미쿨로프와 두 곳의 궁전을 만든 디트리히슈타인 가문이 그토록 큰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시대의 구조와 영리한 선택이 함께 작용했습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핵심 관료로 일하며 황제 곁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쌓았고, 교회의 최고 직책까지 겸하며 넓은 교회령(교회 소유지)을 관리했지요.

30년 전쟁 이후 반란 귀족들의 영지가 대거 몰수되었을 때 황제는 이 충성스러운 가문에게 그 땅을 넘겨주었고, 그 덕분에 미쿨로프를 비롯한 남모라비아의 넓은 땅과 포도밭, 마을 여러 곳을 통째로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이 지역은 비엔나와 브라티슬라바를 잇는 중요한 길목이어서 무역세 같은 현금 수입도 안정적이었겠지요.

여러 귀족 가문들과의 혼인도 부와 영지를 한데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디트리히슈타인 가문은 정치·교회·전쟁·지리·혼인의 힘이 하나로 모여 남모라비아의 부를 손에 넣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디트리히슈타인 가문의 후손들은 이제 더 이상 성에 거주하지도 소유하지도 않습니다.

미쿨로프 성을 비롯해 레드니체와 발티체 궁전은 공산주의 시대에 국유화되어 정부 관리로 넘어갔으니까요.

가문은 물질적 재산과 권력은 잃었지만 공간과 건축,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레드니체와 발티체를 걷는 동안 한 가문의 영광이 누렸던 사치와 우아함, 그리고 인간의 덧없음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성과 궁전은 역사의 숨결을 체험하게 하는 거울이 된 셈이니까요.


알면 알수록, 걸으면 걸을수록 남모라비아의 세 궁전은 더 깊이 스며듭니다.

한때 찬란했던 디트리히슈타인 가문의 웃음과 발걸음은 사라졌지만, 벽과 첨탑, 정원에는 여전히 빛과 그림자가 뒤섞여 숨 쉬고 있습니다.


궁전 카페 옆 발코니에 가문의 숨결처럼 녹슨 마차가 비를 맞으며 서있습니다.

그리고 빗물은 세월을 비추는 거울처럼 마차를 풍경 속에 새겨놓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