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괴를리츠(Görlitz), 즈고젤레츠(Zgorzelec)
독일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도시 괴를리츠.
햇빛이 천천히 지붕을 훑으며 광장 전체가 물감을 얹은 캔버스처럼 밝아지고 있었다.
핼러윈데이라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발자국 소리조차 드물었다.
(아래 사진들을 보면 정말 사람이 없다)
마치 숨을 멈춘 듯한 괴를리츠는 시간이 포개진 오래된 회화 같았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장면이 만들어진 도시.
그러나 그곳은 웨스 앤더슨의 대칭 세계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회색 포장도로와 트램, 골목 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들.
그 사이로 ‘괼리우드(Görliwood)’라는 작은 표식만이 영화적 환상을 과시하듯 붙어 있었다.
광장 한쪽에는 불규칙한 높이의 검은 돌들이 서 있었다.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축소해 놓은 듯한 풍경.
짧은 브리지 패시지를 지나자 둥근 라이헨바흐 탑과, 시계탑이 있는 시청사, 괴를리츠에서 가장 오래된 르네상스 건물 쇤호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촬영팀이 머물렀다는 부르제(Borse) 호텔도 어디선가 본 듯 익숙했다.
도시의 건물들은 비율과 창문의 간격, 색의 조화가 지나칠 만큼 정교했다.
누군가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도시처럼 말이다.
영화감독들이 이 도시를 사랑한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모퉁이를 돌자, 기묘한 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붙잡았다.
거무튀튀한 수십 켤레의 낡은 신발이 가지마다 매달려 있었다.
그 순간, 자연스레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을 떠올랐다.
멀리서 보면 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신발 하나하나에 응축된 그늘이 스며 있다.
오래전 상처의 잔향 같고, 꺼지지 않은 그을음 같다.
말하지 못한 개인의 역사들이 나무 위에서 흔들리는 듯했다.
그 작품은 야코프 뵈메의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Böhmes Botten Baum — 신발이 걸린 나무’.
‘보텐(Botten)’이라는 단어가 ‘낡은 신발’이자 ‘새싹이 돋다’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가난한 구두장이였던 그의 삶과 사유가, 그가 닿아온 길 위에서 다시 싹을 틔운 듯했다.
골목은 자연스럽게 네이스강으로 이어졌다.
강변 너머로 피터교회(페터스키르헤)의 회색빛 첨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견고한 외관, 구릿빛 지붕이 도시를 오래 지켜온 집사처럼 듬직한 모습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연한 올리브색 파이프 오르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상단에 ‘태양’을 상징하는 17개의 금빛 파이프가 햇살이 퍼지는 모양으로 뻗어있어 ‘태양오르간’이라 불리는 악기.
그 안에는 나이팅게일과 뻐꾸기, 작은 산새의 울음소리를 낼 수 있는 특별한 스톱들이 있다고 한다.
초록빛 파이프 사이로 새소리가 흐른다면, 도시는 잠시 숲과 맞닿을 것만 같았다.
강을 따라 걷다 알트슈타트 브뤼케에 다다르자 독일 경찰차가 한쪽에 서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양쪽 다리 난간을 오가며 사진을 찍다 보니 군인이 총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가 거긴가 싶어 여군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여기는 폴란드인가요?”
“네, 맞습니다. 이곳은 폴란드입니다.”
신기하면서도 아득한 감정이 일었다.
네이스강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독일의 괴를리츠, 다른 한쪽은 폴란드의 즈고젤레츠.
원래는 그곳은 모두 괴를리츠였다.
그러나 1945년 여름, 전쟁이 끝난 뒤 지도 위에 새로운 선이 그어졌고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독일인에서 폴란드인이 되었다.
강물은 변함없이 흘렀지만, 사람들의 언어·행정·일상의 방향을 바꿔야 했다.
괴를리츠와 즈고젤레츠는 그렇게 역사적인 균열을 가진 ‘쌍둥이 도시’가 된 것이다.
쉥겐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일반적으로는 국경 검문이 없다.
그런데 그곳에 경찰과 군인이 있던 이유는 최근 불법 이주민들이 늘어나는 이유로 임시 통제가 시행 중이었다.
그럼에도 여행자에게 건네는 인사는 따뜻했고, 강을 따라 걷는 시간은 평온했다.
두 나라로 나뉜 도시 괴를리츠
즈고젤레츠의 강변을 따라 1km쯤 걸어서야 작은 카페를 찾을 수 있었다.
맘 같아선 식사를 하고 싶은데 주변에선 영 찾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강가의 벤치에 앉은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아래에서 천천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모습이 평온해 보였다.
그때 생각했다.
‘늙음’이란 결국 시간의 무늬이며, 주름살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기록한 지도가 아닐까라고...
괴를리츠로 돌아왔지만 도시의 문들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마치 영화 촬영을 위해 비워둔 도시처럼 말이다.
가까스로 문을 연 스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던 길, 눈길이 가는 건물이 있었다.
대칭, 색감, 비율들이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주변 경관이 맘에 들진 않지만 기록용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나중에 확인하니, 그곳이 바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모티브가 된 옛 <카르슈타트 백화점>이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떠올리면, 결국 만나게 되는 걸까?
괴를리츠는 그렇게 조용하고 은근하게 여행자를 이끌었다.
오후 3시 무렵 드레스덴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 뒤,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드레스덴 중앙역에서 17:09분 기차를 타고 라이프치히로 가야 한다.
트램으로 역까지는 20분 남짓, 그러나 늘 그렇듯이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일찍 나섰다.
“드레스덴 역에 도착하면 연락해.
라이프치히 역에 도착하면 또 연락하고,
게반트하우스에 도착해도 꼭 연락해야 돼.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고.”
밤 12시가 훌쩍 넘어서 돌아올 예정이다.
그때까지 나를 기다릴 친구들의 걱정과 당부에 마음이 무거웠다.
8번 트램이 도착했다.
이제 시작이다.
오래도록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그 이름,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그들이 빚어내는 소리는 웨스 앤더슨 쪽일까? 엔리오 모리꼬네 쪽일까?
어느새 짙고 푸르러진 밤하늘 아래로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