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라이프치히
고백하건대 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기를 들고 무대로 걸어 나오는 시간을 좋아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이 신고 있는 검은색 광택의 에나멜 구두(페이턴트 가죽 구두)까지도 사랑한다.
깔끔하고 장식이 없는 옥스퍼드 디자인의 굽 낮은 구두,
거기다 앉았을 때 맨살이 보이지 않도록 검은색 실크 또는 얇은 소재의 긴 목 양말이 슬쩍 보이는 것도 좋다.
뒷자락이 제비 꼬리처럼 길게 갈라진 형태의 검은색 테일 코트,
옆선을 따라 새틴이나 그로스그레인 소재의 줄무늬가 있는 바지,
윙 칼라의 흰색 정식 드레스 셔츠 위에 화이트 보 타이,
그리고 서스펜더(멜빵)가 보이지 않도록 입는 흰색 피케 면 또는 실크 소재의 로우컷 조끼.
틀보다 틈을 좋아하지만 여기선 예외이다.
나는 클래식의 그 엄중한 틀을 사랑한다.
라이프치히 중앙역에 도착했다.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성 토마스 합창단이 라이프치히의 얼굴이라는 걸 증명하듯, 플랫폼에 네온사인이 새겨져 있었다.
이미 깊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나는 게반트하우스로 향했다.
10분 남짓 걸리는 길이지만, 설렘은 늘 걸음을 재촉한다.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조차 전주곡 같다.
환한 유리창 너머로 샴페인잔을 부딪치며 담소를 나누는 실루엣이 보였다.
1781년, 직물 상가의 홀에서 작은 연주회로 시작된 곳.
왕실이 아닌 시민의 힘으로 세워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민 오케스트라이다.
멘델스존이 지휘를 맡으며 바흐를 다시 세상에 불러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유리창 너머에는 샴페인 잔을 들고 음악이 오픈되길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 모든 시간이 공기 속에 얇게 겹쳐 있었다.
독일의 콘서트홀이 그렇듯 크게 화려하지 않으면서 실용성에 무게를 둔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코트를 맡기고 기념품샵으로 향했다.
그곳을 가득 채운 것은 역시 CD들.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음악을 고르는 노인들의 손끝을 보며, 수년 전 수천 장의 음반을 정리해 버린 내가 괜히 부끄러워졌다.
앞에서 두 번째 줄, 지휘자의 손끝 하나도 놓치지 않을 만큼 가까운 자리다.
하지만 티켓은 고작 48유로, 무려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연주인데 말이다.
이런 게 바로 유럽이라서 가능한 호사이다.
심장은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속도를 높여갔다.
조명이 어둡게 가라앉고, 아우구스틴 하델리히(Augustin Hadelich, 1984년 이탈리아 출생, 독일 부모)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그 순간 그의 얼굴과 목에 남아있는 화상의 흔적이 선명히 보였다.
15살에 입은 심각한 화상, 수년의 재건 수술, 연주만이 그를 버티게 했던 시간들.
그 모든 이야기가 그의 미소와 함께 단단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과르네리 ‘Leduc, ex Szeryng’은 악기가 아니라, 그의 기적 같은 생의 증거처럼 보였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 major,
첫 음이 홀에 닿자 객석은 순식간에 고요 속으로 빨려 들었다.
하델리히의 소리는 유리처럼 투명하면서도 뜨거웠다.
섬세한 비브라토의 떨림이 미세한 공기 속에서 전해졌다.
속주와 더블 스톱, 고난도 장식을 정확히 소화하면서 결코 화려하지 않고 따뜻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크레셴도에선 누구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좋은 연주만큼 중요한 건 청중들의 태도이다.
내가 마주 보고 있는 합창석의 사람들은 마치 상자 속에 들어있는 마카롱처럼 단 한 사람의 움직임도 없었다.
게반트하우스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즐길 줄 아는 태도가 하나의 문화였다.
그 속에 나 역시 작은 조각으로 자리하고 있음이 자랑스러웠다.
그날의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Andris Nelsons 1978 ~ , 라트비아)는 2018년부터 게반트하우스의 카펠마이스터, 즉 수석 지휘자이다.
역동적이고 미묘한 해석, 섬세한 프레이징, 그리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높이 평가받고 있는 지휘자이다.
음반으로만 들었고 그의 실연을 접하는 것 역시 처음이다.
수차례의 커튼콜에 하델리히가 다시 무대로 나왔다.
앙코르는 프로그램보다 더 기대되고 설레기 마련이다.
오케스트라는 악기를 내렸는데 그는 천천히 현을 그었다.
'미파파#솔 라솔'
그 첫 소절만으로도 모든 이가 알아차릴 수 있는 곡.
―― Por una Cabeza.
‘여인의 향기’의 그 장면.
더블 스톱핑으로 일관되는 그의 연주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보다 훨씬 풍부하고 우아했다.
두 개의 현을 짚어내는데 주선율의 소리가 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탱고의 열정이라기보다는, 불빛이 사라진 방 한편에서 들리는 오래된 숨결 같았다.
그가 줄 위에 얹는 음 하나하나는 그의 과거와 현재가 아주 조용히 얽혀 있는 듯한 미세한 떨림이었다.
어둡고 막막한 시간들을 견뎌온 그의 절절함이 묻어나는 소리였다.
눈물이 차올랐다.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다.
인터미션,
사람들이 하나둘 천천히 공연장을 빠져나간다.
유럽의 콘서트홀을 찾는 청중들의 나이는 비교적 높다.
그날도 그랬다.
평균 연령이 60~70대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움직임은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그날 역시 안내견을 동반한 시각장애인을 보았다.
파리 필하모니 드 파리의 통로 계단에 점잖게 앉아 곁에서 주인을 지키던 골든 레트리버, 유럽의 공연장에서 흔하게 보는 풍경이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틀 뒤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도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런 문화적 여유가 부러웠고, 음악을 사랑하는 그 신사분이 존경스러웠다.
옆자리에 앉은 부인이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디서 왔어요?"
" 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왔어요. 드레스덴에 머물고 있는데 음악회 때문에 왔어요.
당신은 여기 살아요?"
하자 대뜸 '안녕하세요'라고 또렷하게 인사를 했다.
'어머, 한국말을 하시네요.'
하니 다시 영어로 말을 시작했다.
'아뇨, 나는 독일 서부의 에어푸르트에 사는데 이곳에 직장이 있어요.
몇 년 전에 광주에서 조금 살았어요. 거기서 휴즈 테라피를 가르쳤거든요.'
'그렇군요, 반가워요.'
하는 사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를 가득 채웠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2부는 도라 페야체비치(1885 - 1923, 크로아티아)의 F♯단조 교향곡.
그녀의 이름은 간간히 들어보았지만 음악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게다가 F#단조의 곡은 드물다.
고전 시대의 현악기나 관악기는 F#단조와 같이 샵(#)이 많은 조성의 연주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건 하이든의 45번 교향곡뿐이다.
F#단조라는 조성이 주는 본질적인 어두움과 비극적인 색채가 곡 전체를 지배했다.
특히 현악기와 금관악기의 밀도 높은 화성은 깊은 멜랑콜리(우울감)와 폭발적인 열정 사이를 오갔다.
말러의 영향을 받은 듯한 방대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복잡한 음악적 짜임새가 인상적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을 넘어, 인간 내면의 고뇌와 희망을 동시에 표현하려는 듯한 철학적인 깊이가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영화음악 같은 회화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19세기의 여성 작곡가가 만든 곡이라는 게 놀라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넬손스는 오케스트라를 부드럽고 단단하게 이끌며, 전체를 하나의 호흡으로 묶었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는 서로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대화의 단어 하나하나가 연주 속에서 형태를 갖춰갔다.
그녀의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그 신념은 오케스트라의 소리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어둡고 넓게 펼쳐지는 초반의 흐름,
깊이가 쌓인 듯한 중간 악장의 응축된 힘,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 이르러 마음을 밀어붙이는 거대한 파도.
잊혔던 작곡가의 이름을 다시 무대 위로 불러올 때 가능한, 단단한 확신이 있었다.
게반트하우스의 수석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는 역동적이고 미세한 결을 다루는 데 뛰어나지만,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는 습관은 조금 아쉬웠다.
지휘자와 단원들이 일심동체가 된 것 같은 눈 맞춤과 같은 호흡을 보는 맛이 미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계에서는 그의 스타일로 받아들이고 존중한다고 한다.
모든 연주가 끝났다.
하지만 커튼콜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은 초조했다.
만일 앙코르곡이라도 시작된다면 콘서트홀을 빠져나갈 수 없으므로 기차를 놓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코트도 찾아야 하니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박수가 이어지고 있는 틈을 타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켓팅할 때 2열의 맨 가장자리 좌석을 선택했던 건 이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므로 옆좌석 어느 누구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다.
이름도 나누지 못한 채 짧은 대화를 했던 옆좌석의 여인에게 기차를 타러 가야 한다며 짧은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 반가웠다며 미소를 지었다.
콘서트 홀을 향할 때와 다르게 역으로 향해 걷는 10분은 천천히 흘러갔다.
도시의 불빛은 그대로였지만, 여전히 마지막 앙코르의 멜로디가 귓전에 맴돌았다.
친구에게 라이프치히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 식사도 못해서 배고프겠다는 답장이 왔다.
'원래 콘서트는 공복에 들어야 제 맛이지, 좋은 음악을 들었더니 배가 안고프네 ㅎㅎ'
‘좋다’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 사전적 의미는 “대상의 성질이나 내용 따위가 훌륭하여 만족할 만하다”
하지만 그날은 ‘좋다’ 그 이상의 단어가 필요했다.
드레스덴역에 도착하니 밤 11시 43분.
안전 때문에 우버가 아닌 트램을 택했다.
밤길이 안 무섭다는 내 말은 거짓이었다.
트램을 기다리는 24분은 매우 더디게 흘러갔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여 지폐 봉투를 숨겨야 하나? 하는 순진하고 뻔한 생각도 했다.
예상대로 두 친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마치 엄마처럼 따뜻하게 물었다.
"배고프지, 누룽지 끓여줄까? 라면은 어때?"
누가 더 빨리 내 저녁을 준비하는지 경쟁하듯 움직이는 두 친구.
세상에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우리 내일 볼 마술피리, 유튜브로 보고 있었어.”
“잘했어, 나 때문에 늦게까지 못 자고 미안하네, 천천히 먹고 잘 테니까 먼저 자.”
“무슨 소리야, 친구가 좋았으면 우리도 좋아. 굿 나잇!”
삶의 테두리는 해본 것보다 해보지 못한 게 더 많은 법이다.
다 가질 수 없고, 다 누릴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짧은 나들이가 더 소중하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틈 사이로 희미한 안개 기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