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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의 슈톨렌과 파파게노

17. 젬퍼 오퍼, 마술피리

by 전나무


오페라 ‘마술피리’ 공연은 오후 두 시.

그러므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마이센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작은 언덕 위에 앉은 그 도시가 궁금하기도 했고, 명품 도자기의 흰 광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이센 대신 드레스덴을 하루 더 즐기자는 의견에 동의했다.

미련이 없었다면 거짓일 테지만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마이센

구시가지를 천천히 걸었다.

익숙한데 조금씩 다른 표정이다.

건물 외벽에 비치는 겨울 햇살, 광장에서 들려오는 소리, 성모교회 돔 위의 은색 먼지 같은 공기.



군주들의 행진 앞에 사람들이 한 곳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 앞에 앉은 두 여인, 넥타이를 날리며 쟁반을 든 한 남자.

마네킹처럼 한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가, 누군가 동전을 넣는 순간 인사를 하고 다시 돌처럼 굳어버렸다.

흔한 ‘리빙 스타츄’이지만, 그는 유독 특별했다.

마치 드레스덴이라는 무대에 딱 맞춰 연출된 인물 같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족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값의 고저를 떠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방금 식사를 했어도 고소한 빵 냄새가 나면 홀린 듯 따라가곤 하는 게 우리들의 공통점이다.

크리스마스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케이크, 단단하고 묵직한 '슈톨렌'이 바로 드레스덴에서 시작되었다.(1474년)


우연히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슈톨렌 전문점, Emil Reimann(에밀 라이만)이었다.

여러 가지 베리향과 버터 향이 동시에 훅 들어왔다.

산처럼 쌓아 올린 슈톨렌들은 마치 시간을 봉인한 조각들 같다.

슈톨렌의 유통 기한은 유독 길다.

그 이유는 건과일 절임(특히 럼이 함유), 다량의 설탕, 다량의 버터 코팅이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여 세균 번식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슈톨렌을 사고 나니 크리스마스가 부쩍 가까운 듯하다.




힘차지도, 피곤하지도 않은 절묘한 시간, 오후 2시.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음악이 시작되기 전의 숨 고르기 같다.

바그너의 절친이었던 고트프리트 젬퍼가 설계한 드레스덴 젬퍼오퍼는 유난히 기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69년에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고, 그의 아들 만프레드 젬퍼가 재건했으나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겨우 되살아난 그곳은 또다시 엘베강의 대홍수로 8개월간 문을 닫았었다.(2002년)

세 번이나 부활한 젬퍼오퍼는 마치 시대를 뚫고 되살아난 생명체처럼 고귀하고 단단하다.

게다가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견줄 만큼 세계적으로 음향이 뛰어나기로 손꼽힌다.

오페라하우스에 들어서자 마치 다른 시간대에 들어온 것 같다.

층마다 마련된 뷔페 라운지의 고급스러운 천장화와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 복도,

은은한 아이보리와 금색으로 치장한 둥근 오페라 홀의 중앙에 보이는 왕의 좌석,

와인빛 벨벳천으로 감싼 의자 등이 고전적 기품이 있었다.







우리 좌석은 왼쪽 발코니 2층 1열.

오케스트라 피트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관객과 무대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공기마저 손끝으로 느껴질 만큼 가까워서 이미 음악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서곡이 시작되었다.

빛은 언어가 되고, 음악은 철학이 되었으며, 오래된 이야기는 새로워졌다.


그날 마술피리의 온도를 높인 출연자는 단연코 파파게노.

눈을 크게 치켜뜬 표정, 몸을 비틀어 농담처럼 던지는 동작, 가볍게 툭 던지는 노래.

파파게노가 마술 벨을 울릴 때마다 신비스러운 종소리를 내는 글로켄슈필의 음색까지 더해져 집중력을 높였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객석은 조금 더 따뜻해졌고, 커튼콜에서도 가장 큰 박수는 그에게 향했다.


반면 노파의 모습으로 나타난 파파게나는 놀랍도록 노인의 목소리로 노래했고, 느린 동작에 표정도 기울어져 있었다.

분장이 아니라 시간이 그녀에게 입혀진 듯한 느낌이랄까?

프로그램을 찾아보니 그날의 파파게나는 65세의 크리스티아네 호스펠트(Christiane Hossfeld), 젬퍼오퍼의 전속 가수이며 대학 교수였다.

발랄하고 젊은 캐릭터의 파파게나를 노파 분장과 까슬한 목소리로 재치 있게 살려서 그녀가 갖고 있는 장난기와 따뜻함을 또 다른 빛깔로 보여준 셈이다.



그리고 3 boys.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보이소프라노의 맑고 앳된 음색은 오래된 성당의 창문을 열었을 때처럼, 공기를 환하게 바꾸었다.

그렇게 소년들이 등장할 때마다 객석은 엄마 아빠 미소로 가득했다.


자라스트로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대의 높이가 달라지는 듯했다.

큰 체구와 깊은 음색은 땅밑에서 울리는 듯한 공명을 만들어냈다.

그가 부르는 ‘오 이시스와 이시리스’는 극의 결말을 미리 예고하는 것처럼 묵직한 평화를 전달했다.


반면 ‘밤의 여왕 아리아’는 기대가 큰 만큼 아쉬움도 컸다. 호흡은 길게 흘렀지만, 칼날 같은 선율의 날카로움과는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하이라이트답게 폭발적인 박수는 터지지 않았다.


파미나와 타미노 역시 그들의 비중에 비해 담담했다.

그들의 멜로디는 무대의 다른 인물들과 오케스트라 소리 속에 묻히는 느낌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지휘자는 그 모든 순간을 반짝이게 했다.

그는 배우들의 호흡을 읽듯, 지휘를 하며 자주 고개를 들어 그들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선율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지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 안에서 함께 숨 쉬는 사람.

설명되지 않는 그 열정은 높이 살만하다.

오케스트라는 단정하고 풍성했다.

공간의 음향이 워낙 좋은 이유도 있지만 악기의 울림이 한 겹씩 귓속에 맺혀 들었다.

가수들의 노래 실력이 부족했다기보다, 젬퍼오퍼의 음향이 워낙 뛰어나서 그 격에 조금 못 미쳐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무대 디자인은 전통적이지 않았다.

색감은 단순했고 구조물은 추상적이었다.

천장에서는 ‘VERNUNFT(이성)’, ‘NATUR(자연)’, ‘WEISHEIT(지혜)’라는 단어들이 내려왔다.

모차르트 시대의 계몽주의를 시각적으로 강조하려는 연출이었지만, 오히려 극의 몰입도를 끊기도 했다.



나는 줄리 테이머의 연출을 전적으로 사랑한다.

그녀가 빚어낸 환상적인 컬러의 의상과 압도적인 무대 연출이 돋보이는 <마술피리>와 <라이온 킹>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터였다.

그러므로 그날의 무대는 좋았지만, 가슴을 세게 흔들지는 못했다.





모든 막이 끝나고 무대 인사가 이어졌다.

그중 유독 키 작은 가수가 눈에 띄었다.

모노스타토스를 맡았던 한국의 바리톤 홍종우였다.

큰 배역은 아니지만 그의 존재감은 뚜렷했고 인상 깊었다.

배우의 국적이 무대의 장벽을 허물어주는 순간이 있다면 아마 그런 때가 아닐까 싶다.





2막이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오자, 도시가 또 다른 콘서트를 준비해 둔 듯했다.

강가를 따라 펼쳐지는 야경은 빛으로 만든 두 번째 무대였고, 엘베강 위로 번지는 금빛은 커튼콜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장면의 한복판에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건너며 슈가파우더가 잔뜩 묻은 슈톨렌 한 조각을 베어 먹었다.

케이크의 단맛과 오페라의 음표들이 마음속에서 뒤섞여 절묘하게 어울렸다.

그렇게 우리는 드레스덴의 깊고 푸른 밤하늘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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