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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악보 같은 라이프치히

18. 라이프치히(멘델스존 하우스)

by 전나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습니다.

아리아에 이어 30개의 변주가 끝나면 처음과 똑같은 아리아를 한 번 더 연주하며 끝이 나지요.

그런데 두 개의 아리아는 사뭇 다릅니다.

같은 연주자가 연주하는데 마치 프렐류드와 에필로그 같습니다.

그렇듯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인생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임윤찬은 그동안 내가 즐겨 듣던 글렌 굴드와 많이 달랐습니다.

현대에 만들어진 영화음악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회화적이고 로맨틱했지요.

라흐마니노프가 "페달은 피아노의 영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임윤찬의 페달링은 영혼을 다루는 세 번째 손이라고 할까요?

그의 페달은 음의 가장자리까지 다듬어 넣는 조각가의 손처럼 섬세했지요.

지금까지의 바흐를 완전히 바꿔 새로운 서사를 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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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는 오래된 악보를 닮았습니다.

빛바랜 오선 위에 잔잔히 내려앉은 먼지처럼,

수십 번 고쳐 쓴 음표와 지워진 템포 표기,

종이의 가장자리에 남은 손때 같은 것들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그 위를 걷는 일은, 오래전 누군가가 적어둔 숨결을 따라가는 일과도 비슷했습니다.


역사도, 전통도, 현대적인 풍경도 모두 또렷한데 이상하게도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석조 건물의 벽면의 풍화된 질감 위로 새로운 간판들이 묘하게 어울렸지요.

마치 스스로 무게 중심을 잡고, ‘지나치지 않도록’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 안정감이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20251102_121149.jpg 라이프치히 대학교


그날은 멘델스존 페스티벌의 개막 축하공연이 있는 날.

오전 11시 공연인 데다가 안네 소피 무터의 연주를 들을 수 있기에 친구들도 흔쾌히 좋아했지요.

이틀 전 밤에 보았던 게반트 하우스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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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세의 나이가 무색해 보이는 탄탄한 근육과 여전히 소녀 같은 미소를 지닌 무터,

바람처럼 얇게 흔들리는 비브라토가 끊어질 듯 이어집니다.

바이올린 버전의 조수미랄까?

프로그램은 평소엔 쉽게 만날 수 없는 여성 작곡가들인 파니 멘델스존, 클라라 슈만이어서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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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가 끝나고 나오니 게반트하우스와 라이프치히 오페라 하우스 사이의 광장에 패브릭 시장이 열려 있었습니다.

커튼, 리폼한 소파와 의자, 가방, 옷 등이 걸려 있더군요.

게반트하우스가 처음 시작된 곳이 직물 상가의 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이 도시는 전부터 패브릭 산업이 발전했나 봅니다.


20251102_121216.jpg 라이프치히 오페라 극장 앞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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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여행은 니콜라이교회 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루터교 성당이지만, 동독 민주화의 불씨가 지펴진 곳입니다.

1980년대, 월요일이면 촛불을 든 사람들의 이 문을 나서 행진으로 바꾸었고, 그 흐릿한 빛이 결국 독일 통일을 밝히는 거대한 물결이 되었지요.


20251102_121540.jpg 니콜라이 성당


핑크빛 천장을 향해 기둥들이 연둣빛 야자나무 잎처럼 퍼져 있었습니다.

돌로 만든 식물이 천장으로 곧게 뻗어 올라가는 모습은, 희망이 있으면 얼마든지 자라날 수 있다는 무언의 비유 같았지요.

교회 밖에도 통독 10주년을 기념하는 기둥이 같은 모습으로 세워져 있는데, 한 시대의 용기가 돌의 형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묘한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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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성 토마스교회와 니콜라이 교회의 종신 음악감독이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는 마태 수난곡 등 많은 칸타타들이 초연된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도 그의 흉상이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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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2_121622.jpg 통일 독일 10주년 되던 해 세워진 기념물


이제 바흐가 죽을 때까지 오르간을 연주했던 성 토마스 성당을 찾아가 볼 참입니다.

바흐가 수십 년 동안 칸타타를 쓰고 오르간을 연주하며 성 토마스 소년합창단(1212년에 설립된 라이프치히 소년 성가대)을 이끌었던 바로 그곳입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빈 소년 합창단의 역사는 약 500년, 파리 나무 십자가 소년 합창단이 약 100년 된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장 긴 800년이 넘는 토마스 소년 합창단이 덜 알려진 이유가 있습니다.

빈 소년 합창단은 합스부르크 궁정 예배당 소속으로 국제적인 투어 위주의 활동을 하지요.

하지만 성 토마스 합창단은 교회 음악의 본질과 바흐의 유산 보존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성 토마스 합창단은 지금도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 성 토마스 교회에서 모테트 연주를 이어갈 뿐 월드 투어는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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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무덤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한 사람이 남기고 간 삶이 단순한 돌판 아래에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지요.

출구 쪽 스테인리스 창문에는 바흐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직도 이 도시 어딘가에서 그의 리듬이 조용히 뛰고 있다는 표정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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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스존은 15살 생일에 할머니로부터 악보를 선물 받았습니다.

바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 필사본이었지요.

바흐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넘었고 그의 이름은 세상에서 잊힌 지 오래였습니다.

멘델스존은 그 악보를 통해 바흐의 천재성과 위대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후 멘델스존은 여러 경로를 통해 바흐의 악보를 발굴했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20세가 되던 해에 '마태 수난곡'을 직접 지휘했지요.

이 공연은 구식으로 여겨지며 잊혔던 바흐 음악의 위대함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른바 바흐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고 서양 음악사에서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바흐는 멘델스존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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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지붕으로 덮인 아케이드 마들러 패시지로 들어섰을 때 멀리서 기타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습니다.

'헨델의 사라방드'

오케스트라의 웅장함 대신 가느다란 현의 울림으로 들으니 훨씬 깊은 운치가 느껴졌지요.

화려하지 않은데 깊고, 길지 않은데 오래 남는 이 도시를 닮은 듯했습니다.

좀 더 오래 머물렀더라면 바흐의 '아리오소'나 '시칠리아노'를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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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괴테가 학생 시절 자주 들렀고, <파우스트> 장면에도 녹여낸 아우어바흐스 켈러라는 오래된 음식점이 있습니다.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입구의 메피스토 텔레스 조형물만 봐도 가슴이 움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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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스존이 1845년에서 1847년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던 멘델스존 하우스로 향했습니다.

겉보기엔 소박한 저택이지만, 그의 일상이 조용한 온도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실제 살던 집인 만큼 가구, 자필 악보, 피아노, 여동생 파니 헨젤의 편지, 수채화 등이 전시되어 있어요.

그의 집은 모던하게 꾸며진 모델하우스처럼 군더더기 없고 밝았습니다.

빛이 길게 누운 책상과 악보 스탠드, 초상화들이 가족들의 사적인 온기를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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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누나이자 음악적 동료였던 파니 헨젤의 초상화와 악보가 놓인 방은 마치 그녀의 천재성이 멘델스존과 다르지 않음을 증언하는 듯했습니다.

세상에 제대로 불리지 못한 그 이름 파니 헨젤을 라이프치히가 감싸 안고 있었지요.


20251102_154334.jpg 멘델스존의 아내 세실 멘델스존 바르톨디
20251102_160825.jpg 파니 헨젤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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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2_154424.jpg 멘델스존의 어린 시절 코트


그의 이름이 라틴어로 '행운'이라는 뜻인 '펠릭스(Felix)'여서일까요?

펠릭스 멘델스존은 흔히 금수저로 불립니다.

당대 독일의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던 유명한 철학자 할아버지.

베를린의 부유한 은행가 아버지.

외가 역시 프리드리히 대왕 가문의 후손으로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멘델스존은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경제적, 정서적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베를린 저택에 살 때는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이는 살롱이 정기적으로 열렸고 멘델스존의 연주를 위해 개인 오케스트라를 둘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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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음악만큼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웨일스 등 영국을 열 번이나 방문했고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나폴리 등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을 여행했습니다.

3번 교향곡 스코틀랜드와 4번 교향곡 이탈리아가 바로 여행의 산물이었지요.


영국의 축축한 공기,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바람, 이탈리아의 태양 아래에서도 늘 스케치북과 물감을 챙겼습니다.

그가 여행하며 그린 수채화와 스케치가 무려 300점이나 남아있지요.

하우스에도 그의 작품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가히 '음악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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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에 72세의 괴테를 만나 음악과 문학을 친구처럼 토론하기도 했지요.

괴테는 멘델스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친밀한 우정을 나누며 파우스트 2부의 초본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Mendelssohn_plays_to_Goethe,_1830.jpg 괴테와 멘델스존


부유한 집안, 탁월한 교육, 천재성, 외모, 매너, 명성, 성공, 아름다운 아내와 자녀들까지 다 가진 듯 보이는 멘델스존에게도 고뇌와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나는 칭찬보다 기대가 더 무겁다.”라는 글을 남겼을 정도로 그의 완벽주의는 축복인 동시에 형벌이었어요.

음악은 늘 아름다워야 했고, 그는 늘 완벽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파니 헨젤에 대한 죄책감이 늘 함께 했지요.

그는 누나의 음악적 재능이 자신보다 뛰어남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인습을 제치고 떳떳하게 그녀를 음악계에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파니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충격과 비탄에서 벗어나지 못한 멘델스존도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38세로 요절했습니다.


유대계 가문의 부유한 배경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독일 사회에서 그의 음악은 "진짜 예술이 아닌 살롱 뮤직"이라는 편견과 비판도 이어졌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 가도를 달린 천재 음악가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사회적 편견, 가족의 압박, 과로와 상실의 아픔 등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이 더 아름다운지도 모릅니다.

그는 삶의 무게를 절규 대신 빛으로 바꿔 부서지지 않는 우아함 속에 숨겨두었으니까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20251102_154539.jpg 멘델스존 누나, 파니 멘델스존 헨젤
20251102_154305.jpg 데드 마스크


'여긴 뭐지?'

신기한 방이 있습니다.

오케스트라 음악이 전자악보로 재생되면서 각 악기의 이름이 써진 기다란 기둥들의 불빛이 악보에 따라 이퀄라이저처럼 오르내렸지요.

악기의 소리를 빛으로 번역해 보여주는 방식이 마치 음악이 시간에서 공간으로 순간 옮겨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곳 에펙토리움 (Effektorium)은 가상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 직접 지휘를 해 볼 수 있는 방입니다.

그때 연주되던 곡이 멘델스존의 교향곡 5번 4악장,

처음 듣는 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운드가 얼마나 임팩트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곡처럼 친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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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입었을법한 디자인의 드레스들이 옷걸이에 걸려 있더군요.

옷을 갈아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타블로 비방(tableaux vivants, 프랑스어로 '살아있는 그림'이라는 뜻) 사진방입니다.

구석에 새워진 옛날식 카메라를 보며 스크린의 버튼을 누르니 사진이 찍히더군요.

스크린에 찍힌 사진을 확인하고 맘에 들면 QR코드로 즉시 다운로드할 수 있었습니다.

시대 의상으로 갈아입진 않았지만 자리를 바꿔가며 사진놀이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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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마주어를 기리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라이프치히의 음악 발전에 기여한 점인데요.

멘델스존은 1835년 ~ 1847년까지, 쿠르트 마주어는 1970년부터 26년 이상 카펠마이스터(음악 감독)로 재직하며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세계 정상에 오르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쿠르트 마주어는 매각 위기에 처해있던 멘델스존의 생가를 복원하고 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해 '멘델스존 재단'을 창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멘델스존 하우스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죠.

음악의 계보라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인간적인 연대에서 이어지는지 새삼 느껴졌습니다.

그와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멘델스존은 표준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멘델스존 해석의 대가입니다.

올해는 그가 사망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15년 12월 19일 88세로 사망)

그러므로 멘델스존 하우스와 게반트 하우스에서 기념 음악회가 예정되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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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2_155140.jpg 쿠르트 마주어 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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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음표가 숨을 쉬고 음악이 층층이 쌓여있는 도시는 소리를 잃은 적이 없고,

작곡가들은 여전히 골목마다 발걸음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화음은 천재의 화려함이 아니라 상처를 감춘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투명한 빛이었습니다.

바흐의 무덤에서 시작해서 멘델스존의 집에서 멈춘 우리는 어느덧 드레스덴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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