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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덕이 Dec 14. 2023

비공식 초등 상담 일지 1
(ft. 귀여움)

2023.12.14

아이를 싫어하던 내가 이렇게 초등 상담을 좋아할 줄 알았을까.


이 일지는 프리랜서에게 단비 같은

'일이 즐거운 순간'을 모아놓은 일지이다.

공식적인 상담 일지는 그 양식을 지켜 비밀보장이 되는 장소에 꼭꼭 숨겨 놓았지만

비공식 상담 일지는 내담자에 대한 정보 없이

오직 상담 장면에서 일어나는 귀여움만 다룬다.

이래야 일이 힘들고 하기 싫을 때도 '귀여운 짜식들' 하며

현관문을 나설 수 있다.


1.

작년부터 꾸준하게 만나는 한 초등학생 3학년은

요즘 그 나이대의 아이가 그렇듯이

숏츠 마니아이다.

상담 시작 후, 5분 정도 아이가 관심 있는 동영상을 함께 시청하며

라포를 형성하는 것이 요즘 루틴이다. (그래야 최신 트렌드도 알고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 아이들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은 자녀가 없는 30대에게는 의식적인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오늘도 신나서 들어오면서 "선생님,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하며

선택권 없이 핸드폰을 들이민다.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초등학생이라면 1절 정도는 외워 주는 게 국룰이다.

가끔씩 다 외우는 기억력 좋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1절 정도 외우는 것에서 만족했다. 정글짐에서 신나게 부르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에도 사회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개척자 정신을 지닌 아이들은

열심히 공을 들여 개사했고

가끔씩 음악 시간에도 개사 버전을 불러 아이들에게는 웃음을, 선생님께는 찌푸림을 유발했다.

순정을 선호하는 나는 개사 버전은 부르지 않았지만

개사 버전이 좀 더 쿨하고 센스 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20년도 더 지난 지금, 그 개사 버전이 아직도 유행하고 있었다.

구글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짤’로 검색하면 나온다.

각종 틱톡과 숏폼 영상을 보여주며 즐거워하는 아이 앞에서

차마 20년도 전에 이 노래가 이미 나왔다는 걸 알려줄 순 없었다.


'그거 사실 요즘 노래 아니야. 25년 전에도 있었어!'



2.

"선생님, 근데 선생님 몇 살이라고 했었죠? 26살인가?"

"선생님은 100살이지~~~"

"에이, 선생님, 제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걸 믿을 것 같아요?"

"작년이었으면 믿었을지도?"

"전 6살 때 이미 산타는 없다는 걸 안 사람이라구요."

"아니, 그런 비밀을 벌써 알았다고?! 0.0"

"꺄르륵"


솔직히 웃어줄 줄 몰랐는데 웃어준 학생에게 고마웠다.

10살이나 됐으면 선생님이 100살이 아니라는 걸 알 나이가 되었다는 아이의 뿌듯함이 참 귀엽고

5살 동생이 자기를 진짜 화나게 하면 산타의 비밀을 폭로해 버리겠다는 아이다운 협박도 참 순수했다.

그래도 일단 이번 크리스마스까지는 안 말하는 걸로 합의를 봤으니

동생이 너무 화나게 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3.

학급 수업을 하러 간 교실에서 잠깐 복도에서 대기하라고 할 때,

차가운 복도에 서서 잠시 핸드폰을 보다 눈을 들었다.

교실 뒷문에 호기심 어린 눈과 함께 옹기종기 와있는 10명 남짓한 학생들이 귀여웠고

귀여워서 손을 휙 들어 인사하니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해서

순간 형님이 된 느낌이었다.

뿌듯하고 짜릿했다. (앞으로도 종종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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