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골짜기 한의사의 따뜻한 이야기 프롤로그

수익금은 1차 진료마저도 받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될 예정입니다.





80~90세가 흔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진료실에 60세 정도 되신 분이 들어오면 어쩜 피부가 그렇게 좋은지 젊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40~50대는 말할 것도 없이 나이가 무색합니다.

이분들은 저승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분들이니만큼, 많은 것에서 졸업했습니다. 식욕에서도 졸업하셨고, 부부임에도 결혼에서도 졸업하셨고(어쩌면 학위까지도 있을지 모릅니다.), 육아에서도 졸업하셨고, 돈, 주식, 비트코인, 아파트에서도 졸업하셨고, 그리고 질병에서도 졸업했습니다.



질병에서도 졸업했다는 말이 잘 안 와닿으시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정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 식욕이나 욕구에서 벗어나시다 보니 언제 돌아가셔도 괜찮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분들의 막내아들이 보통 60대 중반 이상이신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엄청 적응이 되지 않았습니다. 막내아들이라 저랑 비슷한 40대 전후이거나 그보다 어릴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놀라면, 환자분들은 저를 슬쩍 훑어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이렇게 자주 말하셨습니다.



“에이. 막내 아들 이제 64살 정도 됐을꺼야! 내가 좀 일찍 낳긴 했어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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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웬만한 수술이나 시술은 모두 섭렵하신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도 무릎 인공관절을 2~3번씩이나 재수술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아주 큰 병원에 가셔도 손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이쯤 되면 아파도 초연해집니다. 그래서 80~90세 정도 되시면 건강검진이나 아픈 곳을 검사하는 것은 잘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이나 지인분들이 미리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저기... 죄송한데 저희 어머님(혹은 저 친구) 요즘 상태가 안 좋아서 누워있다가 돌아가실수도 있을거 같아요. 원장님 그러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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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원에서는 이런 환자분이 많습니다. 병원을 전국적으로 한 바퀴 다 돌고 오신 뒤에 최후의 수단으로 오시는 분들 말이죠. 여러 곳에서 막대한 돈을 들여서 모든 것을 검사한 후에 이제 최후의 시점까지 도달한 것을 모두가 깨닫기 시작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분들. 그분들이 한의원에 내원하십니다.


이분들을 보면 최후에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엄청난 장비도 필요하지 않고,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들이나 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것에서 졸업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따뜻한 한의원과 한의사는 (설령 제가 없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이미 먼저 길을 다녀가신 분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적혀있는 한의학과 그분들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도와드릴 수 있는 과학은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유산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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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경험이 없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변증과 진단을 내려서 병을 치료하라고 배웠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분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병을 진단하고 치료해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가끔은 다소 우울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 점은 1차 의료기관 종사자라면 다들 일정 부분 공감하실 겁니다. 요즘은 대학병원에서 모든 검사와 치료를 다 끝낸 후 안 되면 1차 의료기관으로 오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으니 말입니다. ^^



한의사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1차 양방 의료기관으로 가서도 해결이 안 될 때도 한참을 더 망설이시다가 한의원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병보다도 그 사람을 더 자세하게 봐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혈액검사보다도 어떻게 해서 그러한 병에 걸렸는지,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생긴 합병증보다도 어째서 마음에 불안을 안고 사는지, 고가의 진단 장비보다도 왜 굳이 한의원에 와서 진료를 받으려고 하는지 대화해보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시작은 안정적인 직업이기 때문이었고,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가 나이 들어가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주 엄청난 사건은 별로 벌어지지 않지만, 잔잔한 사건들 속에서 격랑을 헤쳐나간 환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이 드신 분들 옆에서 저도 점차 노년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에 더없이 보람을 느낍니다.




'노년은 그런 것들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노년이 되어서야 생기는 것은, 청년기의 모든 감각적 쾌락보다 더 값진 것이라네.’
-키케로









본 이야기는 사실에 기초하지만 제가 창작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함과 병명 같은 개인 정보는 드러나지 않게 잘 간직해두었습니다. 저보다 어려운 환자분들의 소중한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따뜻한 진료실은 저 하나만 운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이야기가 전부인 것도 아니고, 저만이 유일한 사람도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따뜻한 진료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숨어서 묵묵히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는 분도 계시고, 남모르게 선행을 베푸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는 이런 따뜻한 진료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수많은 따뜻한 진료실의 이야기입니다. 배고프고 힘든 어르신과 약하디약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위해 애쓰는 저와 같은 모두의 따뜻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