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출산기념 선물로 명품백을 사준다기에 따라나섰다. 코로나로 인해 명품에 대한 사람들의 소비 욕구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사실 난 명품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남편 눈엔 맨날 에코백만 메고 다니는 내 어깨에 뭔가 걸쳐주고 싶었나 보다.
오픈런은 필수였다. 개점시간 전부터 백화점 출입문 앞에서 서성이다 줄을 섰다. 딱히 사고 싶은 게 없었는데 괜히 심장이 벌렁거리고 초조해졌다. 이윽고 웅장한 음악과 함께 문이 열렸다. 줄 서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남편과 난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순간적으로 ‘지금 뛰어야 하는 거야? ’라는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고, 우리는 말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웃긴 게 뭔 줄 아는가. 사실 샤넬로 갈 건지 에르메스로 갈 건지 정하지도 않고 그냥 사람들을 따라 달린 것이다. 그날 우린 푸드코트에서 밥만 먹고 왔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삶은 그저 생존에 불과하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그저 생존해 있었지 살아 있지 않았다. 부모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 줄 착각하고 모범생으로 자랐다. 연봉액수가 높으면 자존감도 높아질 거라 착각하고 은행원이 되었다. 큰 회사에 다니면 나도 큰 사람이 되는 것인 줄 착각했다. 나의 생각보다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 훨씬 신뢰할만하다고 착각했다. 착각의 늪에 빠져서 내가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정신 차려보니 살림은 물론 모유수유도 제대로 못하는, 잘하는 걸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기 어려운, 심지어 취미조차 없는 아기엄마가 보였다. 나는 거울 앞에 섰다. 낯빛도 칙칙하고 눈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퀭했다. 언제든 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있도록 다 늘어난 수유복을 입고 유령처럼 하루종일 집안일을 하면서 아기를 돌보았다. 그런 내 모습이 짠해 보였던지 엄마는 아기를 봐줄 테니 어서 복직하라고 하셨다.
은행으로 다시 출근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아침에 눈 뜨면 회사에 출근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정신없이 살아갈게 뻔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이다.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며 인생을 허비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인지 헷갈렸다. 유치원생도 자신 있게 말하는 걸 30대 애엄마가 말하지 못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아기 손을 잡고 말했다. “아가야, 엄마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어떡하면 좋을까.”
나무를 심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20년 전이었고, 두 번째로 좋은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 중국 속담
남편에게 복직하지 않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워낙 평소에 제발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람답게 살라는 말을 자주 했던 남편이었기에, 흔쾌히 오케이 했다. 남편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좋은 곳을 왜 그만두냐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정말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아이들도 내 손으로 직접 키우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하려고 태어난 사람인지 알고 싶고 또 성장하고 싶었다. 내 아이들에게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멋진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10년간 근무했던 은행을 퇴직했다.
모든 새로운 시작은 다른 시작의 끝에서 온다. - 세네카
‘애 엄마가 무슨 장래희망 타령이냐, 주책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다르다. 장래 희망이 있다는 건 삶의 목표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모양과 크기의 그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맞는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다. 즉,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질문이기에 애엄마이든 할머니든 나이에 상관없이 일생동안 반드시 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애엄마가 주책 떠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단지 나는 그 작업을 애 엄마가 되고 나서 시작한 것일 뿐이다. 늦지 않았다. 오히려 애 엄마라 아이와 함께 성장할 수 있어 더 좋다. 이보다 좋은 자녀교육이 어디 있겠는가. 질풍노도의 애 엄마가 나와 친해지며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장래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앞으로 계속 전하겠다.
이제 백화점에 가면 당당하고 여유 있게 푸드코트로 직진한다.
명품백보다 에코백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