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경단녀의 희망퇴직 이후 실패 배틀
진정한 성공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충실할 때 온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자기 신뢰>
성공적인 운항을 위해 선장이 지도를 펼쳐 경로를 파악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내가 어떤 선박을 몰고갈 건지 확인하는 것이다.
컨테이너선인지, 유람선인지, 요트인지 아니면 작은 모터보트인지, 그 종류와 성능을 손바닥 들여보듯 훤히 꿰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고장 난 곳은 없는지 매의 눈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 이놈을 데리고 태평양을 건너 머나먼 아메리카 땅을 밟을 수 있는지, 아님 팔만 뻗으면 닿을 것 마냥 가까운 거리의 암초에서 낚시나 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다.
같은 말을 다시 해볼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고 있으면,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선택과 도전에 실패할 가능성이 적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지 직관적으로 정확하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은 낮아지고,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성공을 이룰 가능성이 높아진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천치 아니었나. 도무지 내가 무얼 좋아하고 잘하는지 감이 안 잡혔다. 머리가 안되면 몸으로 때워야 한다. 잔꾀를 부릴 수 없다. 그게 진리다. 똥인지 된장인지 헷갈리면 먹어봐야지. 슬프게도, 나에겐 몸빵이 필요했다.
다음은 내가 김치말이 국수처럼 시원하게 말아먹은 것들이다.
1. 스마트스토어
누군가 '단군이래 가장 돈 벌기 좋은 시대'라며 쇼핑몰로 한 달에 월 천만 원 이상의 수익을 번다고 했다. 나는야 세상에 둘도 없는 깃털 같은 팔랑귀의 소유자. 정신 차려보니 유튜브 영상을 보며 스마트스토어를 개설 중인 내 모습이 보였다. 팔랑거리는 귀와 손가락의 기막힌 조합의 결과물이었다.
뭘 팔아야 할지 고민하는 건 초보셀러에겐 사치였다. 그저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카더라 하는 건 무조건 다 올렸다. 좋게 말하면 백화점, 그냥 말하면 잡화점이다. 그런데 레이저 같은 소비자 눈엔 그저 잡상인처럼 보였던 걸까. 아무도 내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첫 스마트스토어는 깃털처럼 훅하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2. 그림책 작가
그래. 스마트스토어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남편은 지금부터라도 내가 좋아하는 걸 해보라고 응원해 줬다. 정말 난 시집을 잘 갔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라는 비웃음 섞인 소리만 들을 것 같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어릴 적 꿈이 떠올랐다. 바로 그림책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냐고 묻는다면 똥손이라고 답하겠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짧은 이야기 속에, 결코 짧게 담기 어려운 따뜻한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참 멋져 보였다. 마침 그림책을 만들 수 있는 온라인 클래스가 보였다. 남편의 응원에 힘입어 신청했다.
그런데 실제로 배워보니 글보다 그림을 통해 풀어내야 하는 비중이 월등히 높았다. 그림실력이 비루하니 내 생각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벼락치기 일지라도 집중적으로 실력을 쌓아보려 했건만 똥손이 어디 가겠나. 그래도 강의를 들으며 꾸역꾸역 작품 하나를 완성했다. 내가 만든 그림책을 마주하고 난 완벽하게 당당히 깃발을 내려놓았다. 그림책 작가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실패다.
3. 부동산 경매
그래, 무슨 그림책 타령이래. 돈이나 벌자. 때는 바야흐로 '벼락거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2021년. 당시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집값이 하루가 다르게 가파르게 오르는 걸 보니 겁이 났다. 무섭게 올라가는 전세보증금을 따라가지 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점점 변두리로 이사 가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이건 아니지. 우리 가족을 위해 내 집을 사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나름 국재재무설계사(CFP) 자격증도 있는 금융전문가였는데 부동산은 잘 몰랐다. '맞아. 난 은행원으로 10년 동안 살았는데, 부동산 투자도 공부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잘하는 걸 해야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 투자에도 여러 분야 있었는데 내가 특별히 관심이 갔던 분야는 경매였다. 소액으로 투자를 할 수 있다는 부분이 작고 귀여운 신혼살림을 하고 있는 새댁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둘째를 임신 중이었는데도 무거운 배를 이끌고 새벽에 일어나서 종이로 된 경제신문을 보고, 큰맘 먹고 고가의 부동산 경매 강의도 들었다. 강의에 나오는 투자 성공 사례를 볼 때마다 마치 내가 수익을 낸 것 마냥 심장이 벌렁벌렁 설레었다.
부푼 몸의 임신부가 부푼 마음으로 법원으로 향했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첫째 손을 꼭 잡고 사연 있는 여자처럼 북적이는 법원 안을 휘젓고 다니며 입찰했다. 결과는 유찰. 그게 여러 번 반복되니 지쳤다. 둘째를 출산하고 육아에 신경 쓰다 보니 부동산에 대한 열정의 불씨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실패다.
이 이외에도 중간중간 도전하고 실패한 것들이 사소하게 많다. 건강식품판매업,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수익화, 명품 구매대행 등. 기간으로 따지면 4년 동안 내리 실패만 했다. 잘 나가는 은행원으로 살다가 손만 대면 말아먹는 아줌마가 된 것이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렇게 4년 동안 우리 집 등골브레이커로서 김치말이 국수만 말아대던 나에게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네가 뭘 못하는지 알았으니까 됐다마. 이제 쇼핑몰 한다고 밤새 눈 벌게져있진 않겠지."
(우리 부부는 부산토박이라 말투가 다소 투박하다.)
순간 놀리나 싶어서 욱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다.
나의 잘난 점만 발견하는 게
나를 알아가는 게 아니었어.
나의 못난 점을 발견하는 것도
나를 알아가는 거였어.
나는 물건 파는 일에 소질이 없고, 그림도 잘 못 그리고, 투자감각도 없다. 내가 소질이 없는 부분을 몸빵으로 깨달았다. 또한 아이들을 키우고 주부로서 살아가면서 요리, 공간정리, 인테리어 감각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4년이란 시간 동안 몸빵을 하면서 나의 못난 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못난 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던
잘하고 좋아하는 것들도
내 눈앞에 하나씩 나타났다.
집안일 중에선 그래도 청소하는 걸 좋아하며 아이들 먹이고 재우는 보육엔 영 서툴렀지만 교육에 관심 많은 엄마라는 걸 알았다. 그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책육아와 엄마표 영어를 사교육 없이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또 내가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책을 통해 체계적으로 학습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기획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발견했다.
남편의 사업장에 필요한 마케팅 기획과 SNS 관리하는 일을 시작했다. 마케팅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서 혼자 책과 영상을 보고 배웠다. 한동안 집중해서 노력했더니 이제는 네이버 상위노출도 잘 만들어내고 AI를 활용한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운영은 기본, 남편에게 새로운 마케팅 방법을 제안해보기도 한다.
길을 걷다 넘어지면서도,
우린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 수 있다.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마냥 실패만 한건 아니다. 그 속에서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조금씩 배워갔으니까. 그렇게 몸빵으로 실패를 경험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하며 나에 대한 직관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을 이제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나는 결국, 읽고 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