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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욱 Nov 28. 2020

무엇을 확실하다고 믿는가.

타라 웨스트오버 <배움의 발견> 리뷰

"우리는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어렵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부터 심오한 철학적 답변까지 그 스펙트럼도 넓다. 배움이란 무엇인지, 배움이 삶에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는지, 그 질문에 대해서 '자신의 삶'으로 대답한 책이 있다. 바로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이다. 올해 읽었던 책 중에 꽤나 울림이 있었던 책이다.




다시, 아주 간단한 질문이다. 여러분은 "지구가 둥글다"라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한국에선 이 질문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2019년 미국 인구의 2%는 '지구가 사실은 평평하다'는 주장의 지구 평면설을 확고하게 믿고 있다. (미국 인구가 3억 명이니 약 600만 명이나 된다.) 이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된다.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넷플릭스에서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를 보시길 추천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이것을 단지 남의 일이라고 치부해선 곤란하다. 우리 누구나 어떤 영역에서는 맹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고, 나를 잘 안다고 믿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 나 또한 오랜 시간을 그랬었기에, 이러한 일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타라 웨스트오버의 부모님은 극심한 피해망상을 가진 종교적 원리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자신을 제외한 정부와 사회, 모든 것을 의심했고 그의 자식들은 학교와 병원을 다니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이 옳았다' 그러다 보니 무지와 몰이해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촬영을 하지 않았을 뿐, 매년 드라마를 찍는 느낌이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휴거'를 대비하는 장면인데, 그는 끊임없이 복숭아 통조림을 쌓고, 연료를 비축한다. 하지만, 기다리던 휴거는 결코 오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을 믿은 것일까.


필요의 시간이 다가왔고 준비의 시간은 지났다. 아버지가 말했다. 날짜가 지루하게 흘러갔고, 드디어 12월 31일이 됐다...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예언서를 읽었다. 그들도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버지를 놀렸고, 비웃었다. 오늘 밤이면 그동안의 오명을 씻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 아버지는 그날 아침보다 더 작아 보였다. 온몸에 깃든 그 실망감이 너무도 아이 같아서, 순간적으로 신은 어떻게 아버지의 소원을 이렇게 외면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버지와 같은 충실한 종, 노아가 방주를 짓기 위해 자진해서 고통을 받았듯, 그렇게 주님을 위해 고통을 자청한 아버지의 소원을 말이다. 그러나 신은 홍수를 보내지 않았다.


저자를 낳은 것은 부모지만, 그녀를 기른 것은 다름 아닌 '학교'다. 그녀는 집안 식구들의 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대학을 다니며 책과 지식을 접하기 시작했고, 기존에 알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그때 벌어지는 일은 단순히 개인에게만 찾아오지 않는다. 변화하려는 사람에게 생기는 '창조적 긴장'은 주변 사람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 특히 기존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은 '변화와 불확실성, 그리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곧 기존 관계망과 그에 속한 어느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아버지와 숀 오빠는 동지가 됐다. 두 사람이 의견 일치를 본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대학 맛을 본 내가 주제넘은 아이가 됐고, 그런 나를 치료할 방법은 어떻게든 과거를 상기시켜 주는 것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렇게 이전의 내 모습에 다시 닻을 내리고 거기 고정시켜야 한다고 두 사람은 동의한 듯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내 삶을 잠시 돌아보았다. 내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꼽는다면, 그것은 대학 졸업 시점이다. 그때까지 나는 그저 평범한 공돌이에 불과했지만, 졸업 이후에 내 존재는 크게 흔들렸다. 엔지니어로는 도저히 살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다. 이렇게 방황하는 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강렬히 나를 찾고 싶었고, 다시 만들어나가고 싶었다. 당시의 관계 역시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저 충돌하고, 배우고, 깨어져 나갔다.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에 배운 것이 많지만, 막상 나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정말 온갖 사람들을 만났다. 한때는 나에게 구원이 될 것 같던 사람들이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사기꾼에 소시오패스가 많았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지금 돌아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이끌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내 안에도 꿈틀거리는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적은 노력으로 많은 것을 원했고, 한 번의 결정적인 도약으로 삶을 바꿔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는 우를 범하진 않았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은 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닐까. 배움의 여정은 자기 확신이나 지름길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문단에 반하고 말았다. 변화를 위해선 결정이 바뀌어야 한다. 결정이 바뀌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단절과 죽음이다. 그저 찾아오는 행운은 없다. 공간을 비워놓지 않으면, 아무것도 채울 수 없다. 지금까지의 자아가 눈 감고, 새로운 자아가 눈뜨게 해야 한다. 그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저자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것은 어떻게 명명할 수 있을까. 여전히 명료하진 않지만, 일단은 '확신에의 경계'라고 정의해 본다.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사실 만큼은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찾은 유일한 확신이다.  


나와 아버지를 가르고 있는 것은 시간과 거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된 자아다. 나는 아버지가 기른 그 아이가 아니지만, 아버지는 그 아이를 기른 아버지다.... 그날 밤 나는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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