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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욱 Apr 10. 2018

아이의 행동을 교정하고 싶다면?

육아 일기, 생후 30개월


아이의 행동 교정에 관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오랜만에 글을 쓴다. 작년 7월 10일, 재원이가 30개월 때 있었던 일이다. 사실,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의식적으로 느끼지 못했던 일상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뭔가 무의식적으로 불편했던, 그 이야기를 적고자 한다.  


문제의 발단은 '휴지'다. 어느 날 재원이가 휴지를 돌돌돌 말아서 쓰는 모습을 봤다. 낭비하는 것이라고 느낀 나는, 재원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나는 구두쇠다. 시간도 자원도 늘 아깝다. 그래서 뭐든 최소한으로 사고, 소비하는 삶을 지향한다. 책만 빼고 (ㅋㅋ)


"재원아, 그렇게 필요도 없는 곳에 휴지를 막 쓰면 낭비하게 되는거야. 아빠는 낭비를 싫어해. 아빠가 싫어하는게 뭐라고?" 
"나앙비"
"그래그래, 아빠는 낭비를 싫어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휴지를 쓰면 안 되겠지?" 


별 생각 없이 했던 말이었고,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 되었다고 느꼈다. 그 이후로 아내도 여기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싫어하는 말들이 하나씩 추가되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싫어하는 것은 '징징거리는 것'이다. 


(재원이가 징징거리는 중) "잉잉잉" 
"또 왜 그래! 재원아. 엄마가 뭐 싫어한다고 했지?"
"징징거리는 거" 
"그래, 엄마가 재원이 징징거리는거 싫어하지?"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자문했다. "이것은 효과적인 훈육일까?"  나아가서, "누가 '나쁜 행동'이라고 의미부여 하고 있지? 그것은 정말 나쁜 것인가?" 차근차근 생각하니,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첫 번째, 이것은 효과적인가? 그리고 효과적인 훈육이 반드시 올바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체벌이 그렇다. 말을 안 듣는 아이를 때리면, 아이는 말을 듣는다. 마치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아이의 마음 속에 어른에 대한 '불신과 원망'을 쌓게 되고, 궁극적으론 아예 '말을 안 듣는 아이'를 만들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는 비효과적이다. 아내와 나는 물론 체벌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말로 알아듣게 설명하고자 이런 방법을 썼다. 나쁜 행동에는 그에 맞는 적절한 피드백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방법이 효과적인지는 의문이 든다. 그 이유는 2번째 질문 때문이다.  



두 번째, '나쁜 행동'이란 의미 부여는 누가 하는가?  


의미 부여란 꼬리 붙이기다. 꼬리 붙이기는 아주 쉽고 효율적이지만 남발하면 위험하다. 예를 들어보자. "남자가 되가지고 그것도 못해!" "여자는 자고로 이래야지!" "남들 다 이정도는 해" 이처럼 자기만의 '상식'을 가지고 누군가를 재단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그것이 마치 '정해진 답'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오만한 행동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재원이에게 우리가 했던 것도 이런 것이더라. 어떤 기준으로 '낭비'와 '징징'을 정의할 수 있는가. 아기 입장에선 그렇게 쉽게 낙인 찍힐 수 있겠다 싶었다. 어쩌면, 내가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이 재원이에겐 그저 따라하기,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아내가  '징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재원이에겐 그저 '감정 표출'과 '이해받고 싶다는 말'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아무리 자기들의 아이지만, 어떤 부모도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어떤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시도이다.



마지막, 아이의 행동에 쉽게 꼬리를 붙이는 순간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까? 


어쩌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섬세함'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 판단 내리는 것이 쉬울 수록, 그로 인해 발생하는 '판단 받는 자'의 소외도 커진다. 어찌 보면 그 때문에 우리 교육이 지금처럼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게 아닐까. 객관식 정답은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주관식 에세이나 토론 결과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 결과 객관식 정답은 그 덕분에 지금과 같은 교육 현실을 만들었다. 선생님 말을 외우고, 정답 잘 맞추는 자만 올라가는 사회. 다양한 생각들이 표출되지 못하는 그런 사회 말이다. 그래서, 나의 대안은 이것이다. '꼬리 붙이지' 말자. 쉽게 판단하지 말자. 그저 물어보고, 그대로 알려주자. 


"재원이가 휴지를 돌돌돌 말았구나. 그게 재미있어? 그런데 재원이가 그렇게 하면, 아빠는 쓸데없는 것에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서 속상해. 그래서 다음에는 재원이가 쓸 만큼만 썼으면 하는데 어때?"
"재원이가 속상하구나. 그런데 재원이가 계속 그렇게 울면, 엄마도 속상해. 일단 다 울고 나서, 왜 그렇게 속상한지 말해줘. 그렇다고 재원이 원하는대로 다 해줄 수는 없어. 이해해줘"  


돌고 돌아서 결론은 비폭력 대화, 그리고 I-message다.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참 어려운. 물론, 너무 이상적이라는 것 나도 안다. 특히 상황이 벌어질 때, 바로 대응하는건 정말 어렵다. 꼬리붙이고 싶다. 가뜩이나 육아로 힘든데, 조금이나마 편한 길로 가고 싶다는 것 나도 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하나의 인간을 대하는 일이 쉽고 간편한 일이 되어선 안된다. 쉬운 답을 찾고자 할 때, 언제나 스스로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부단한 자기의심과 성찰이 필요하다. 하물며 육아 뿐이랴. 


쉬운 답을 찾고자 할 때, 언제나 스스로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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