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티 안 나는 시간의 힘

변화는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시작된다.

by 생활미감


햇살이 먼저 찾아오는 시간


또? 새벽 5시 반, 눈이 떠졌다.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알람도 없이 정확히 그 시간.
이 당황스러운 상황이 며칠째 반복된다.


"넌 잠으로 망할 거야."

학창시절, 엄마의 독설이 어렴풋한데
'조금만, 조금만...'

그렇게 잠꾸러기였던 내가,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싶어 하던 내가,

평생 아침과 원수였던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된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출근까지는 세 시간 남았다.

대체 뭘 하겠나 싶지만,

주섬주섬 일어나 기지개를 편다.

막상 깨어나면,


이 고요가 아깝다.


혼자 깨어 있다는 것은


커피를 내리고 책을 펼친다.

있어 보이려는 건 아니다.

그냥 이 시간을 흘려보내기 아까워서다.


아차, 오늘이 재활용 쓰레기 수거 마지막 날이지…

버리고 와서 책 읽자.

정말 집에 있던 날모습으로 현관문을 나섰더니

이미 환한 바깥에 개 산책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다들 부지런하구나' 싶으면서도, 소속감이 든다.

새벽 일찍 깨어 있는 사람들만의 은밀한 연대감 같은 것.

묵혀버릴뻔한 쓰레기를 툭툭 던지고 돌아서는-

이 별거 아닌 일을 했을 뿐인데

묘하게 개운하다. 개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뭔가 해냈다는 기분.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회사에서 먹을 간식 도시락을 싸면서

또 피식 웃는다.

이런 것도 나름 절약이지..

언제부터 이렇게 부지런해졌나.


그런데 불쑥 따라붙는 질문,

"그래서 이게 뭐가 달라지는데?"

"돈이 나와? 출세를 해? 뭐가 나아졌는데?


게임이론 재도전


어젯밤 붙잡고 있다가 덮은 '게임이론' 을 다시 펼쳤다.

처음엔 한 페이지도 쉽게 이해할 수 없던 책이,

두 번째 읽으니 조금씩 들어온다.

AI 시대를 다룬 '듀얼브레인' 은

두 번째 읽는 중이다.

처음엔 FOMO 증상에 따라 산 책이었지만,

보통 어려운 외국인 교수들의 글과 달리

술술 읽혀서 다행이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해도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땐

'나는 내가 잘해. AI가 뭘 하겠어.' 이랬다면,

이제 ChatGPT는 물론 여러 AI를 용도별로

마치 비서처럼 파트너로, 조수로 쓰고 있다.

평소 글 쓰고 데스킹하는 일을 하다 보니

AI가 지어내는 내용을 걸러내고

정확하게 다시 지시하는 게 낯선 일이 아니다.

귀찮은 반복 작업은 통째로 맡기고

나는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니 효율이 배가 된다.

이 책을 처음 잡을 때와 지금의 내가

AI를 활용하는 수준이

완전히 달라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읽히는 것도 보이는 것도 다르다.

다만 '생각하는 존재'로서

내가 누구인지는 계속 질문하게 된다.


"이런 걸 해서 정말 뭐가 달라질까?",

"즉시 보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계속하게 된다. 왜일까.


바뀌는 건 풍경이 아니라 시선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이 시간이 나를 정돈해주고 있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생산적인 생각'이 아니라,

그냥 내 생각을 하는 시간.
돈으로도 측정되지 않고,

거창한 기록도 아니겠지만—

분명히 쌓인다.

아주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나무가 위로만 자라지 않듯,

사람도 보이는 성장만 하는 건 아니다.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깊고 단단하게 자란다.


새벽에 혼자 깨어 있는 이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중이다.


변화는 조용히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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