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 내 공간이 없다?
"내 집에 내 공간이 없다." "다들 그러니까 그러고 산다." "옷방 한편이 내 자리다."
이런 우스갯소리, 혹시 남편분들 입에서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아니면 혹시 나의 이야기인가요?
저는 불편하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해결해 나가는 편입니다. 남편은 "난리를 친다", "지겹다"며 손사래를 칠 때도 있지만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저의 삶은 조금씩 나아져 왔습니다. 집에서 뿐 아니라 바깥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라고 느끼면 방법을 궁리하고, 그게 저의 나아가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자, 제가 이 집에 이사 오면서 전의 집에서부터 강하게 품었던 의문은 바로 '나의 공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집착인지, 애착인지, 고집인지. 저는 집에서 진정한 나만의 공간에 대한 갈증을 강렬하게 느껴왔습니다.
그리하여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저는 70년대 후반생, 아시안게임을 거쳐 올림픽 경기를 보며 국뽕에 차오르던 세대입니다. <모래시계>, <여명의 눈동자>를 가족과 함께 둘러보며 살았고, KBS에서 <조선왕조실록>을 하면 그거 보느라 중간고사를 망치던, 이인화의 역사 소설을 즐겨 읽던 그런 세대였죠.
그 시절, 집에서 우리는 리모컨 하나에도 힘겨루기를 해야 했습니다. 아빠가 권투를 보면 꼼짝없이 그 소리를 감내해야 했고, 드라마를 함께 보는 시간은 모두가 맞춰야 하는 불문율이었죠. 그러다 누가 먼저 본 드라마에 뒤늦게 합류한 사람(특히 그게 아빠나 엄마이면 결국 리모컨을 내어드려야 했죠)이 "그거 뭐야? 저 사람 역할이 뭐야? 이름이 뭐냐?" 하고 끼어들면 솔직히 짜증이 났잖아요. 애초부터 같이 볼 작정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간절히 염원합니다. 성인이 되어 나만의 원룸을 꿈꿨죠. 그건 바로 서울로 대학을 가는 것이었고, 경제적으로는 아직 아니었지만 물리적으로라도 독립하고 싶었어요. 엄마의 취향에 지배당하지 않는 그런 삶을 말이죠.
결혼 후에는 배우자와 함께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 일정 기간 만족합니다. 아이가 생기면 기꺼이 아이에게 공간을 내어주고, 거실은 아이 물건으로 가득 차는 것이 당연하게 되고요. 하지만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어땠나요? '나만의 공간'에 대한 갈증은 더욱 깊어지지 않던가요?
보세요.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남편과 아내가 의외로 많습니다. 저희 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0평대 구축 아파트, 화장실 1개에 방 3개. 문 잠그는 걸 기본값으로 하시는 사춘기 아들에게 방을 내어주고 나니, 공간도 적고 수납도 부족해서 남편과 모든 걸 공유해야 했거든요. 답답함이 밀려왔습니다.
무엇보다 남편과 저는 취미가 달랐어요. 남편은 골프 중계나 예능 프로그램을 멍하니 보며 낄낄대는 것을 좋아하지만, 저는 필요하거나 실용적인 정보를 주는 프로그램을 선호하거나, 눈이 편안해지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혹은 압도적인 영상미와 철학을 담은 영화를 즐겨 봅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프렌치 수프’를 봤는데, 배경 음악을 최대한 배제하고 현장음(구두 소리, 부엌 냄비 달그락거리는 소리, 주걱 젓는 소리, 손으로 문지르는 소리 등)에 집중한 영화였어요. 프랑스 감성 가득한 정원처럼, 쉽게 만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계의 영상이 펼쳐지는데, 인공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자연스러움 속에서 느껴지는 그 압도적인 최상의 경지를 만나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물론 딱히 적확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지만요.) 여하튼 그렇게 압도적으로 영상이나 철학을 구현하는 그런 영화 말이에요.
음악 취향도 달라요. 물론 헤드폰을 사용하면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지만, 가끔은 공간을 제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채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남편과 아들이 불편해할까 봐 신경 쓰고,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하다 보면 에너지가 소진되어 급 피곤해지더라고요. 좋아하는 음악마저 뭔가 불편해지는 이상한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나의 취향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타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씁쓸했죠.
요즘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은 점점 개인화되고 있잖아요.미디어 소비도 따로 하고, 각자의 취향이 뚜렷해지는 추세고요. 삶을 배분하는 방식도 다르고, 가족이라도 출근 시간이 서로 다를 수 있고, 삶의 리듬과 패턴이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여전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린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고들 하죠. 그렇게 많이들 합니다. 물론 식당이나 다이닝, 거실 같은 공유 공간은 필요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개인의 취향과 리듬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갈망은 계속 커지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된 거죠.
가족과 공존하면서도 나를 소중히 여기고, 생산적인 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 성취감을 얻고 싶은 욕구.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그런 욕구를 풀어놓을 장소, 공간이 절실했습니다.
결국 저는 이 갈증을, 이 갈망을 해결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습니다. 30평대에서 느꼈던 답답함과 불편함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거죠. 나의 삶, 나의 취향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마침내 40평대 집으로의 이사를 결심했습니다. 단순히 넓은 공간을 원했던 게 아니라, 가족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넓어진 평수만큼 저희 가족의 공간도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양보하고 참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 같은 것 말이에요.
다음 글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담아보려 합니다. 따로 또 같이라는 새로운 가족 공간의 혁명에 대한 이야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