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꽃,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꽃은 덧없이 피고 지지만…

by 생활미감

그날 새벽, 신문지에 돌돌 말린 꽃다발을 풀어놓는 순간의 서늘함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다. 갓 잡은 생선을 들어 올리듯, 기대와 함께 신문지를 펼치고 오늘의 색감을 어떻게 맞출지 혼자 복기하던 시간.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결국 일어나 차를 몰았다. 온 도시가 고요에 잠긴 새벽 2시, 이제 곧 3시. 창문을 열면 비릿하면서도 싱그러운 공기가 스쳤다.


새벽 꽃 도매시장, 입구부터 밀려오는 특유의 냄새. 물비린내, 풀 냄새, 라면과 찌개의 밤참 냄새가 뒤섞인 '삶의 냄새'였다. 덩치 큰 상자를 나르는 발걸음이 분주했고, 부스스한 얼굴들 사이로 저마다의 꽃을 고르는 눈빛이 얽혀 있었다. 그 시절, 싱싱하고 푸짐하게 꽃을 사려면 이 시간, 바로 여기가 답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왜 이리도 꽃에 마음을 빼앗기는 걸까.



한국에서 꽃은 사치 같았지만, 미국에서의 3년은 달랐다. 홀푸드나 트레이더조 같은 유기농 슈퍼에서 꽃은 양파나 대파처럼 장바구니에 자연스럽게 얹는 물건이었다.


6불, 7불, 큰맘 먹어도 8.99불. 집에 돌아와 줄기를 사선으로 잘라 물에 꽂고, 하루가 지나면 다시 잘라주며 열흘도 보았다. 마당에 수국과 알륨을 심기도 했지만, 흙에서 꽃을 살리는 일엔 번번이 실패했다. 그럼에도 꽃을 곁에 두는 생활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꽃을 사랑하는 마음은 미국을 떠난 후에도 이어졌다. 귀국 후, 한국의 꽃 풍경은 내가 떠나 있던 사이 꽤나 많이 변해 있었다. 꽃 구독 서비스는 더 늘었고, 농부 직배송, 제철 꽃 세트, 온라인 장보기 속 꽃 코너까지. 이른바 '집 앞 꽃시장'이 생겨난 것이다.


여러 곳을 거쳐 정착한 곳은 ‘어니스트플라워‘. 농장의 이야기가 덧붙은 꽃은 더 각별했고, 싱싱함은 오래갔다. 예전처럼 한 다발씩 사야 하는 부담 없이, 2만 원 안팎으로 제철 꽃을 일주일간 돌보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꽃은 이제, 땀 흘리며 새벽시장까지 가지 않아도, 현관 앞까지 온다.



이제는 손쉽게 곁에 오는 꽃이지만, 그 생애가 전하는 깨달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어쩌면 꽃의 생애가 인간의 시간을 닮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일본 다도의 '일기일회(一期一会)'처럼, 한 송이의 꽃은 계절과 인생의 모든 순간이 단 한 번뿐임을 알려준다. 완벽하게 피어난 순간조차 시듦을 향해 가지만, 그 덧없음이 오히려 눈을 멈추게 하는 힘을 가졌다. 꽃이 가진 이 덧없는 아름다움은 역사 속에서 때로는 투기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버블'은 꽃이 권력과 부의 상징이자 투기의 대상이 되었던 극적인 예다. 조선시대 귀한 모란과 연꽃 역시 궁궐과 상류층 정원에서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꽃의 가치는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어갔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꽃은 '특별한 날의 선물'에서 '일상의 물건'으로 내려왔고,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주문해, 현관 앞 택배로 받아보는 시대가 됐다.


이런 꽃의 변화하는 가치는 예술에서도 끊임없이 은유되었다. 덧없음을 표현한 네덜란드 정물화의 '바니타스',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반 고흐의 해바라기, 조지아 오키프의 백합, 데이비드 호크니(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창가에서 매번 다르게 그려낸 화분들까지. 꽃은 인간의 삶과 감정의 변화를 담는 거울이었다. 최근 본 영화 '프렌치 수프' 속 부엌에서도, 대화가 멈춘 식탁 한편에서도 꽃은 그 자체로 장면의 공기를 바꾸는 주인공이었다.


조반니 볼디니


흔히들 '나이 들면 꽃 사진을 찍는다'라고 한다.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젊었을 땐 배경이던 꽃이, 이제는 나를 멈춰 세우는 풍경이 되었을 뿐이다. 핀 꽃을 보며 활짝 웃고, 시들어 고개 숙인 꽃을 보며 다음 꽃을 기다린다. 꽃은 나이를 먹어가는 나의 표식이 아니라, 멈춰 서서 나를 들여다볼 줄 알게 된 나의 마음을 닮은 풍경이다.



10년 전 새벽시장에서도, 오늘 우리 집 식탁 위에서도, 나는 여전히 꽃을 든다. 다만, 그 시간을 더 오래 바라보고, 더 많이 느끼고, 더 깊게 살아간다. 꽃이 가르쳐 준 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곁에 있는 덧없는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열망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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