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가 건넨 다정한 문장
까미노에서 가장 행복하고 희망에 벅찬 발걸음을 내딛는 시간은 아마도 아침이 아닐까. 아침의 공기는 상쾌하고, 태양은 그렇게 강렬하지 않으며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오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까미노를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좋은 예감도 든다. 이 생각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는 때는 태양이 강렬해지고, 바람은 식어버리는 오후가 되면서부터이다.
어제의 동행이 즐거웠던 나와 쉐아. 오늘도 함께 걷자는 약속은 따로 없었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기다려주며 자연스레 동행이 시작되었다. 대놓고 "같이 걷자"라고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말은 없어도 마음이 먼저 닿는 이쪽이 훨씬 편안하고 설레었다. '이 친구도 나와 함께 걷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의 기분. 형체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마음뿐이었지만, 그건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보다 근사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일까? 만약, 앞으로 누군가와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까미노에서 말없이 서로를 기다려주며 동행을 하듯 자연스레 시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가는 동안, 신기한 풍경을 목격했는데 눈썰미 좋은 쉐아가 내게 말해주어 알았다. 달팽이들이 한 무리로 몰려 풀 위에 포도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풀밭 여기저기에. 쉐아와 나는 이 '달팽이 열매'의 미스터리에 사로잡혀 한동안 사진 찍고 사연을 추측해 보기에 바빴다.
달팽이 포도에 이어 오늘의 길은 탐스럽게 익어가는 청포도들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포도밭의 풍경도 좋았지만, 집집마다 장미나 꽃 대신 포도 넝쿨을 장식처럼 기르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포도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과일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훗날 내 집을 갖게 된다면 대문에 꼭 포도를 기르겠노라 다짐해 보며...
오늘도 길 위 곳곳에는 노란 화살표들이 열일을 하고 있었다. 걷다가도 그 노란 화살표만 마주하면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마치 화살표는 내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발을 내딛는 모든 곳이 길이 될 것이라고. 그러니 너는 언제나 옳은 곳에 있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 있어야 할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 화살표는 언제나 그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나를 다독여 주는 듯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작은 개울을 만났다. 그곳에서 쉐아는 지친 발을 개울에서 담그며 쉬고 싶어 했고, 빨리 마을에 가서 물도 마시고 좀 쉬고 싶었던 나는 계속 길을 가는 것을 선택했다. 까미노에서는 식수대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를 미리 파악하고 동선을 짜는 것이 중요한데, 오늘 그 과정을 깜빡하고 움직이는 바람에 도중에 물이 떨어졌던 것이다. 타는듯한 갈증을 안고 겨우 다음 마을에 도착해서 목을 축였다. 그곳에서 어느 아주머니의 귀띔으로 오렌지 주스 맛집도 찾았다. 오페라 음악이 흘러나오던 정겨운 분위기의 작은 가게에서는 스페인식 감자 계란 오믈렛과 진짜 끝내주는 오렌지 주스를 팔고 있었다. 거기서 간단하게 당과 수분을 보충하고 다시 혼자가 되어 길을 떠났다.
다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어 카페로 들어갔다. 하지만 스페인에는 아아가 없었다는 사실. 어쩔 수 없이 에스프레소와 얼음, 물을 시켜 자체 제작에 들어갔다. 그런 나를 보고 재밌다는 듯이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던 반대편 순례자 할아버지와 자연스레 눈인사를 하며 커피 한 잔을 원샷하고 다시 일어섰다. 이번 마을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의 걸음을 떠미는 듯, 그 어디에도 알베르게가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고민 끝에 다음 마을로 다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인생이 그렇듯, 때로는 죽을 듯 힘들지만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무거운 발을 이끌고 터널을 지나는데, 벽면 가득 다양한 언어로 순례자들이 남긴 흔적들이 보였다. 익숙한 한국어도 눈에 띈다. '안녕하세요', '부엔 까미노'. 그리고 마침내 내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앞만 보지 말고, 뒤도 돌아보세요.'
그 투박한 문장의 울림 앞에 나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글귀는 내게 잠시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내가 땀 흘리며 걸어온 굽이진 길 위로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앞만 보고 갈 때는 몰랐던, 내가 지나온 길의 아름다움이 그제야 보였다. 어쩌면 인생도, 사랑도 목적지에 닿는 것보다 그 길을 걸어오며 내가 남긴 발자국을 한 번쯤 다정하게 돌아봐 주는 여유가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그동안은 능동적인 로레나와 꼼꼼한 쉐아 덕분에 걱정 없이 알베르게를 찾았지만, 오늘은 오롯이 나 혼자의 힘으로 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터널 속 그 문장 덕분에 조바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기왕 늦은 거 슬렁슬렁 길 위의 풍경들을 즐기며 걷기로 한 것이다. 뜨거운 스페인의 태양 아래 바람에 기분 좋게 날리던 빨래들, 골목길 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관찰하던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 그리고 실수로 거꾸로 찍어버린 스탬프까지. 뒤를 돌아볼 여유를 갖게 되니, 비로소 까미노가 나에게 건네는 사소하고도 다정한 선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꼼꼼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느긋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새삼 놀라기도 했다. 까미노는 이렇게 내가 몰랐던 나의 얼굴을 불쑥불쑥 보여주곤 한다. 다음 마을인 에스텔(Estrella)까지 2.4km. 얼마 안 남았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간절한 꿈은 오직 하나였다. 그 별 같은 마을 어딘가에,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다정한 알베르게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를. 나는 다시 한번 신발 끈을 고쳐 매고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