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낼수록 선명해지는 것들

단순한 삶에 감사하며...

by 김성희

까미노에서의 삶은 지독히도 단순했다. 해가 뜨면 걷고, 숙소에 도착해 먼지를 씻어내고, 기운이 남으면 마을을 구경한다. 빨래를 돌리는 사이 슈퍼마켓에 들러 저녁과 다음 날 아침거리를 사 오는 것. 그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빨래가 마르길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하는 시간. 1년 차 세계 여행자의 내공을 가진 쉐아는 모든 옷가지를 야무지게 손으로 빨아 널었다. 걷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져버린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부지런함이었다.


삶이 단순해지니 먹는 것 또한 간결해졌다. 주로 삶은 달걀, 햄, 요거트, 그리고 과일들. 거창한 조리법이 필요 없는 이 단순한 음식들이 주는 행복을 나는 오롯이 만끽했다. 복잡한 선택지를 걷어낸 자리에는 오직 '걷는 나'와 '생각하는 나'를 위한 시간만이 남았다.


심플한 식탁과 심플한 마음으로...


나는 온 마음을 열어두었다. 자연이 보내는 아주 작은 메시지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순간조차, 우리를 사랑하는 거대한 빛 혹은 어떤 존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 존재는 주위의 사건과 환경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까미노는 그런 우주의 속삭임을 몸과 마음으로 수신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장소였다.


동행인 쉐아는 작지만 단단한 친구였다. 느낌 가는 대로 숙소를 잡는 나와 달리 그녀는 이미 5유로짜리 알베르게를 점찍어둘 만큼 계획적이었다. 우리 돈으로 고작 6,500원 남짓. 첫날 아무것도 모르고 온라인 예약 사이트에서 17유로를 주고 잡았던 도미토리가 떠올라 잠시 분통이 터졌지만, 이내 웃어넘겼다. 그렇게 '호갱'도 당해보고 시행착오도 겪으며 강해지는 것이 순례자의 숙명이 아닐까.


그날 저녁, 대충 달걀이나 삶으려던 내게 쉐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직접 만드는 파스타 식탁에 초대받은 것이다. 요리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며 수줍게 웃는 그녀를 도와 함께 요리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요리를 너무 못하는 쉐아 때문에 혼자 먹을 때보다 번거롭고 손 갈 일은 많았지만, 함께 준비하는 식탁은 그 과정부터 이미 풍성하고 따뜻했다. 어느덧 편리함에 익숙해져 잃어버렸던 삶의 온기가 이 소박한 부엌에서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운 좋게 다른 순례자에게 나눔 받은 생선 통조림 덕분에 토마토 파스타는 근사한 ‘생선 파스타’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내가 사 온 이베리코 하몽과 신선한 샐러드까지 더해지니 순례길을 떠난 후 가장 호사스러운 만찬이 차려졌다. 스페인 친구 미키와 프랑스 친구 스테파노도 합류했다. 우리는 음식을 나누며 각자의 이야기를 접시에 담아냈다.


까미노에서의 만찬


"저녁 여덟 시에 마을에서 음악 페스티벌이 열린대. 아이리쉬 밴드가 온다는데 같이 갈래?" 미키의 제안에 피곤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이리쉬 음악이라니, 이건 무조건 가야 했다. 마을 광장은 축제의 열기로 가득했다. 미키와 함께 이탈리아의 전통춤인 '타란텔라'를 배우며 발을 맞추던 그 순간, 온몸의 감각이 깨어났다. '아, 내가 정말 살아있구나.' 심장이 벅차게 뛰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웃는 새로운 경험. 어쩌면 우리는 이런 빛나는 순간들을 수집하기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내가 까미노의 어느 작은 스페인 마을에 도착했는데, 마침 거기서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니... 분명 이건 삶이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이렇게 삶은 언제나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


음악 페스티벌 마치고 돌아오던 설레던 밤


그동안 나는 무엇이 두려워 마음을 닫고 경계하며 살았을까. 빗장을 풀고 나니 찾아온 자유는 눈이 부실 정도로 거대했다. 나의 세계가, 나의 한계가 한 뼘 더 넓어진 기분이었다. 점점 여행이 좋아질 것만 같았다. 이 뜨거운 설렘을 어쩌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