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온 친구 '쉐아'

주파수가 맞닿을 때 일어나는 일들

by 김성희

의도치 않게 또 동행이 생겼다. 첫날 론세르바예스에서 스치듯 만났던 아시안 소녀가 길 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홍콩에서 온 '쉐아'. 안 그래도 그날의 짧은 만남이 아쉬워 더 이야기 나눠보고 싶었는데, 길 위에서 다시 만나니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1년째 세계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곳 산티아고가 그녀의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 마침표라고 했는데, 영화를 보고 산티아고 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나보다 한참 작고 앳된 모습이라 당연히 이십 대 후반쯤 됐을 줄 알았는데, 세상에... 마흔이란다. 마흔 살이 된 기념으로 자신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어 이 여행을 계획했다는, 참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쉐아와 나는 닮은 점이 많았다. 우린 작고 소소한 것들을 사랑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걷다가 예쁜 풍경을 마주하면 멈춰 서서 사진이나 영상을 찍곤 했다. 취향이 비슷하니 서로를 기다려주는 시간들도 편안한 이해로 채워졌다.


13.jpg 쉐아와 함께 걷던 길


그녀에게 여행 전후로 달라진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없는 것 같다며 수줍게 웃더니 이내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어"라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안심이 됐는지 모른다. 나 자신을 모르는 게 오직 나만의 문제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오롯이 나를 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하긴, 오죽하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남겼을까.


예전의 나는 여행하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여행으로 얻는 게 뭔지 몰랐기에, 그 돈이면 차라리 좋은 집이나 차, 예쁜 옷을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여행이 내게 주는 진짜 의미를. 여행은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고, 내면을 성장시키는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 영혼이 이 지구에 태어난 이유는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몸을 빌려 다양한 체험을 하고, 수많은 다른 영혼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는 너무도 잘 알 것 같다. 좁았던 세계를 깨고 어느새 이만큼 자라난 내 영혼이 참 대견하게 느껴졌다.


우리의 리듬은 꽤 잘 맞았다. 수다를 떨다 보니 발이 아픈 것도 잊은 채 길을 걸었다. 쉐아는 내게 홍콩의 시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홍콩에 식량을 재배할 농사 시스템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놀란 나에게,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그 이유 때문에 홍콩이 독립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던졌던 질문이 미안해질 만큼, 내가 홍콩에 대해 아는 게 참 없었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오르막 정상에 도착했다. 탁 트인 뷰와 함께 지친 순례자들을 위한 작은 휴식터가 보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쉐아는 고심 끝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더니 헝겊 필통에서 펜 뭉치를 꺼냈다. 그녀의 배낭에 빼곡한 펜들을 보니 까미노까지 수많은 펜을 들고 온 그녀가, 삶을 사랑하고 그렇기에 삶을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성스레 돌 위에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Add Oil'. 홍콩 젊은이들이 주로 쓰는 말로 "힘내!"라는 뜻이란다. 우리는 서로에게 "Add Oil!"을 외치며 다시 힘차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운로드 (48).jpg 손재주 좋은 쉐아의 돌멩이 그림


열정적으로 앞만 보고 걸을 땐 마음의 주파수가 같은 로레나를 만났고, 나의 속도를 이해하는 비슷한 리듬의 동행을 원하니 쉐아가 나타났다. 삶은 이렇게 언제나 나의 소망들을 가만히 실현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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