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엔테 라 레이나로 가는 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이 무의식 속에 남아, 나는 어느새 산티아고 길조차도 '열심히 노력하며' 걷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러다 보니 남들이 가는 속도에 맞추느라 무리를 했고, 남들이 쉬는 마을에서 잠을 잤다. 그 결과 몸은 지쳤고, 기억 속에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추억 대신 고단함만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산티아고 길을 걸은 지 3일 차가 된 오늘, 이제는 온전히 내 속도대로 걸으며 주변 풍경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목적지만을 향해 전진하느라 작은 마을들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으나, 이제 나는 그 소박한 마을들을 하나하나 다 돌아보고 싶어졌다. 천천히 가더라도 마을마다의 고유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출발지에서 아무리 가까운 마을이라도 마음에 들면 걸음을 멈추고 충분히 머물러 보자고. 오늘의 까미노는 30분을 걸어도 괜찮고, 며칠을 쉬어가도 좋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자유롭게 길을 떠나기로 했다. 내 영혼이 원하는 데로,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날 아침의 날씨는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하늘엔 낮고 짙은 구름이 깔려 있어 조금은 기분 좋게 쓸쓸한 공기가 감돌았고, 선선한 바람은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날씨 때문인지 아침부터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오늘의 길 위에는 끝도 없이 펼쳐진 해바라기 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앉아서 그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던 길. 누군가의 장난인지, 혹은 우연히 떨어진 씨앗의 선물인지 모를 웃는 얼굴 모양 해바라기부터 노란 화살표 모양의 해바라기까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아름다운 길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던 나는, 동행이었던 로레나에게 이제 나의 리듬대로 걷고 싶다는 결심을 전했다. 로레나는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우리는 길 위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고 헤어졌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길. 천천히 산책하듯 걸으며 내가 좋아하는 작고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띌 때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음껏 사진에 담았다. 그러는 동안 문득 깨달았다. 나는 사진 찍기를 참 좋아하며, 이렇게 걷는 여행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까미노를 떠나기 전, 나는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음악 공부를 위해 하던 일도 그만두고 프랑스로 건너와 4년 동안 미친 듯이 공부에 매진했던 시간들. 하지만 실제 음악가로서의 삶을 마주한 유학 생활 마지막 1년 동안, 나는 내가 무대에 적합한 성격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 나이는 벌써 마흔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계시처럼 다가온 산티아고 행을 하루 만에 결정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까미노 곳곳에서 순례자를 안내하는 노란 화살표가 내 인생에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길 위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조차 나는 언제나 옳은 길 위에 있었음을. 인생에 틀린 길이란 결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음악을 하던 순간도, 카페에서 일을 하던 순간도, 까미노를 걷는 지금도, 내가 선택했던 삶이었고 행복했다. 그 모든 삶의 과정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선택한 길을 나의 속도로 걸어가는 나를 발견했다. 때로는 실망하고 슬퍼하고 절절하게 아파하기도 하면서... 삶은 그 자체로 그저 옳은 것이었다.
조급함은 이제 내려놓기로 했다. 까미노에서 발견한 내 몸과 마음의 속도가 꽤 마음에 들었기에… 첫날과 둘째 날 모두 꼴찌로 도착하는 나를 지켜보며, 내 리듬이 남들보다 느리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빠른 곡보다는 느린 곡을 좋아했고, 연주할 때도 감정을 실어 천천히 풀어내는 곡에 더 자신이 있었다. 첫날엔 느린 내 모습이 초조했지만, 이제는 그 리듬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나를 발견한다.
길을 걷다 이름 모를 꽃을 마주하면 충분히 그 아름다움을 눈에 담고, 앞만 보고 걷는 대신 뒤를 돌아보며 내가 걸어온 까미노의 풍경을 감상한다. 뼛속까지 이 길의 아름다움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바라기와 밀밭이 어우러진 오늘의 길은 자꾸만 내 발걸음을 붙잡았고, 나는 지금 이 순간 오롯이 행복한 나를 느끼며 그 충만함 속에 머물렀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나를 알아가는 건 평생 하나씩 보물처럼 발견해야 하는 흥미로운 수수께끼 같은 일이 아닐까. 인생이란 나를 알아가는 긴 여정이고, 혼자 떠나는 여행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가장 좋은 거울이 되어 준다. 바람에 춤추는 해바라기들이 나를 응원하듯 활짝 웃고 있었다. 해바라기들과 노닥거리며 보낸 30분 남짓의 시간은 무엇보다 행복했다. 이제 까미노를 얼마나 빨리 완주하는지는 더 이상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빨리 간다면 일찍 쉬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겠지만, 걸어가는 과정 속의 아름다운 풍경과 여유는 놓칠 수밖에 없다. 바쁘게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해 쉬는 것보다는 걷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순간순간의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음악조차도 산을 정복하듯 연습해 왔던 나지만, 이제야 알아차리게 된 내 리듬과 삶을 대하는 방식이 차츰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이곳에 와야 했던 이유는 까미노가 건네는 이 메시지를 알아차리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삶의 속도는 모두 다르며, 결국 우리는 각자의 리듬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이니 조급해하지 말라는 것. 언젠가는 자신만의 색을 가진 꽃으로 피어나게 되는,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지금도 나의 꽃은 천천히, 나만의 색을 고르며 조금씩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리듬과 속도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길을 걸으며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다음에는 나와 리듬이 비슷한 동행과도 걸어보고 싶어졌다. 로레나와 함께 걷는 동안 동행과 함께하면서도 나의 리듬을 지키는 법은 결국 서로를 '기다려주는 것'이란 것도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