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를 놓아버리는 순간, 시작되는 마법
인생은 어쩌면 나만의 노란 화살표를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에는 어디에나 수호천사 같은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걷다가 어느 순간 화살표가 보이지 않으면 길을 잃었다는 신호다. 그럴 땐 당황하지 말고 화살표가 있던 지점까지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면 된다. 길 위에서 다시 발견한 노란 화살표가 주는 안도감, 그것은 방황하던 영혼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을 때 느끼는 평온함과 닮아 있었다.
로레나는 나보다 걸음이 빨랐는데, 그래서인지 나보다 빠르게 지쳤다. 같이 출발해서 앞서가는 건 언제나 로레나였지만 우리는 쉼터에서 늘 다시 만났고, 거기서 로레나가 더 쉬고 싶어 하면 느린 걸음으로 내가 먼저 출발했다. 느릿느릿 걷다 보면 어느새 걸음이 빠른 로레나는 또 나를 따라오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누구도 무리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길을 걸었다.
이날의 길은 평탄한 평지였지만 날씨는 짓궂었다.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는 험한 날씨 속에서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순례자의 숙명. 숲길 중턱에서 우리는 추억 속 만화 파트라슈의 '네로 할아버지'를 닮은 천사 한 분을 만났다. 산티아고를 너무나 사랑해 기부금만 받고 사비로 과일과 달걀, 주스등을 나누며 5개 국어로 순례자들을 응원하던 분. "그저 좋아서 이 일을 한다"는 할아버지의 맑은 미소 앞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팜플로나(Pamplona)까지 가는 경로는 첫날 헬 난이도였던 피레네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이었다. 길의 대부분이 마을들을 통해가는 지라, 스페인의 마을과 도시, 도로등을 보며 걷는 재미가 있기도 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호되게 겪어본 뒤에는 자연스레 알게 된다. 평지를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눈물 나게 행복한 일인지.
스페인 시내를 걷고 있으려니, 딱 봐도 순례자 차림인 나를 보고 거리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다. '부엔 까미노!' 언제 들어도 힘이 나는 말. 가는 동안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분들이 특히 격려의 말씀을 많이 주셨다. 조금만 더 가면 팜플로나라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걷고서야 팜플로나에 도착한 건 슬픈 일이었지만, 그 말은 나에게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도록 힘을 주었다. 그렇게 언제쯤 도착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생각 없이 넘은 큰 돌대문을 지나자 느닷없이 나타난 아름다운 도시 팜플로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의 기쁨이란!
나바르 지역의 수도 팜플로나는 고풍스러운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연노랑 건물 옆에 핑크색 건물이 나란히 서 있고, 내가 사랑하는 보랏빛 집들이 즐비한 색채의 도시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걷는 내내 노래를 불렀던 '타파스'를 먹었다. 비록 시간이 없어 들어간 이름 없는 식당의 홍합 타파스는 짜기만 했고 만두 타파스는 한국의 만두 맛을 그립게 했지만, 도시가 주는 활기와 사람들의 인사는 발바닥에 돋아난 물집의 고통을 잊게 하는 힘이 있었다.
마음 같아선 팜플로나 구경도 하고, 이 마을에서 자고 가고 싶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그렇듯. 하지만, 나의 동행이었던 로레나는 단호하게,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조용한 마을이 나온다며 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팜플로나에는 많은 순례자들이 있기 때문에, 숙소의 청결 상태도 의심이 되며, 이곳에 머물다 보면 까미노를 걷고 싶지 않고 머물러 쉬고 싶은 마음만 들것이라는 것이었다. 로레나의 말은 일리가 있었고 베드 버그가 무서웠던 나는 그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잠시 공원에서 낮잠을 잔 후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쏟아지는 땡볕 아래서 끝도 없이 걷다 보면, 도착에 대한 기대조차 놓아버리고 '걷는 행위' 그 자체에만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목적지마저 놓아버리고 온전히 걷기에 몰두하는 그 찰나, 원하던 장소는 늘 기적처럼 어느새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렇게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 삶은 비로소 마법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우주는 다시 한번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다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에야 로레나의 말을 따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만난 알베르게는 너무나 조용하고 좋았으며, 마을 자체도 팜플로나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와는 달랐다. 그리고 이 마을은 내가 까미노 순례 중 두 번째로 좋아하는 마을이 되었다.
시수르 치키아(Zizur Txikia)라는 특이한 이름의 이 마을은, 언젠가 내게 가족이 생긴다면 같이 살고 싶은 그런 마을이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햇살이 눈부시던 팜플로나의 밝은 에너지와 달리 묵상하는 듯 흘러가는 회색 구름과 뺨을 스치던 서늘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기억에 남는다. 맑으면서도 흐린 듯한 잿빛의 느낌이 주는 기묘한 그곳의 공기는 시간조차 느리게 흐르는 듯한 신비로운 어떤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곳의 따뜻한 마을 사람들이 좋았다.
마을을 걷다 길 한복판에서 기분 좋게 술잔을 나누고 나오신 듯한 할아버지 무리를 만났는데, 그분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우신지 한참 동안이나 대화를 이어가고 계셨다. 살짝 비켜서 돌아가려 하자, 옆에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이 순례자 가는데 길막하지 말고 나오라며 동료 할아버지에게 고함을 빽 지르셨다. 그 이후 다들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단체로 모자까지 흔들어 주시던 훈훈함이란.
발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약을 살 마음으로 들어간 동네 약국에는 무뚝뚝한 말투와 다르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약사 아줌마가 있었다. 약을 파시는 게 아니라 양호 선생님처럼 사지도 않은 약들로 내 몸 여기저기를 살피시더니, 손수 약을 발라 치료를 해 주시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막간을 이용해 스페인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시고...
발에 붙이고 걸을 밴드만 사고 가려다, 밴드를 붙이고 걸으면 상처가 더 덧난다며 호되게 불호령만 들었다. 깨갱하고 하시는 데로 가만 발을 맡겼다. 마지막 케어로 불타는 스페인 태양에 탄 내 어깨와 목 부분에 수분 스프레이까지 뿌려주시던 그 마음을 잊지 못할 것이다.
놀랍게도 도착한 숙소에서는 나처럼 혼자 까미노에 온 한국 여자분이 있었다. 마침 나와 나이 또래도 비슷해서, 오래간만에 한국말로 수다 떠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오늘도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 풍경과 마주하고 뿌듯한 까미노를 보낸 느낌. 그렇게 나는 조금씩 단단해져 가고 있었고 점점 까미노가 좋아지고 있었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