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친구 ‘로레나’

함께 걷는 길의 기쁨을 알게 되다.

by 김성희

평소 운동도 안 하며 편하게 지내던 내 몸이 어제부터 갑자기 시작된 강행군에 놀랐는지, 도대체 너 왜 이러냐며 여기저기서 연신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기했던 건, 걷기 전엔 고통스러웠으나 막상 걷기 시작하니 그런대로 또 몸이 고통을 잊은 채 움직여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마치 오래된 고물 자동차처럼. 시동 걸기까지 삐걱삐걱 거릴 뿐 막상 시동이 걸리고 나니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오늘 나의 까미노 여정에는 동행이 있다. 어제 숙소에서 만난 로레나는 56세로 씩씩하면서도 나이가 무색하게 순수한 면이 있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인으로, 굉장한 수다쟁이였다. 프랑스에 있을 때도 그렇고, 유독 나는 할머니 친구들이 편하고 좋았다. 특히, 로레나같이 마음은 여전히 해맑아 소녀 같은 그런 친구가…

내 친구 로레나

로레나는 나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나의 페이스를 따라주며 발걸음을 맞춰주었다. 그녀의 영어는 처음 만났을 땐 더듬더듬하는 수준이었는데 같이 대화하며 걷는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나와 소통하고 싶다는 로레나의 열정이 그녀의 입을 트이게 한 것 같았다. 그녀는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나에게 다 큰 밤비노(아기)라며 어르고 달랬고 그러면서 우리 둘은 또 나란히 꼴찌로 둘째 날 숙소였던 성 니콜라스에 도착했다.


나만 아니었어도 로레나는 훨씬 빨리 도착했을 텐데… 이유는 모르지만 로레나는 나와 걷는 것을 참 좋아했고 같이 걷는 동안 서로의 언어가 달라 말이 잘 통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태양처럼 밝고 명랑한 그녀의 에너지가 나도 무척 좋았다.

도착 시간은 어제와 비슷한 오후 6시쯤. 주인아저씨가 너무나 친절하셨고, 숙소 또한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앙트완을 비롯해 아침에 함께 출발한 낯익은 얼굴들이 한참 전에 도착해 벌써 술 한잔씩을 하고 있었다. 도착한 우리를 보자 까미노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한국어를 잘 하시던 슈퍼 사장님

계란을 삶아 슈퍼에서 산 햄과 과일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숙소 레스토랑에서 저녁 메뉴로 나온 돈가스가 남았다며, 우리의 단출한 식탁을 풍성히 채워주셨다.

어찌나 감동이었는지... 감사의 인사를 드리자, 정색하며 쑥스러워하시는 츤데레 숙소 아저씨였다.

이곳에서 1유로를 주고 1회용 침대 시트를 깔았다. 사실 숙소 전체가 너무 깔끔해서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베드 버그(빈대)에 물리면 몇 년이나 몸에 흉이 남는다는 말을 들은 터라 까미노 여정 내내 유난히 베드 버그가 신경 쓰였던 것 같다. 첫날 숙소와는 달리, 이곳에는 담요가 제공되어서 훨씬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다행히 어제보다는 조금 덜 고된 듯 느껴졌다. 이제 점점 몸이 적응을 하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하게 된 것이 까미노였는데, 혼자이다 보니 만나는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되는 나 홀로 여행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수줍음이 많은 줄 알았던 나에게, 이렇게 만난 지 얼마 안 된 누군가와 스스럼없이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대범한 모습이 있다는 것에도 놀랐다. 여행을 통해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특히나 산티아고에서 이렇게 친구를 많이 만들 수 있을지 미처 몰랐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출발지에서 출발한 이들이 대부분 비슷한 마을에서 묵고,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기 때문에 보는 얼굴을 자꾸 또 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장소에서 동료를 다시 보게 되는 그 반가움이란... 마치 떨어졌던 가족을 다시 만난 느낌, 그 이상이랄까.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은 제각각의 직업, 삶을 가지고 있고 나이도, 국적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다. 까미노를 걷는 이유 또한 모두 제각각이다. 그런데 스쳐가는 사람들의 배낭을 보다 보면, 그의 삶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뜻하지 않게 알게 되기도 한다. 긴 트래킹 거리 때문에 배낭을 가볍게 하는 것이 불문율인 까미노이지만 놀랍게도 간혹 이런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얗고 조그만 강아지라던가 덩치 큰 기타가 배낭 안에서 빼꼼하고 얼굴을 내밀고 있는 풍경을.


까미노를 걸어보면 안다. 내 몸 하나 건사해서 목적지까지 가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런 곳에 기타나 강아지를 데려와 같이 걷는다는 건 그들의 삶에서 그것들이 얼마나소중한 존재인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풍경들을 보다 보면, 배낭 안에 품고 온 소중한 친구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가 있어 잠시나마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내 아코디언을 사랑하지만 11kg짜리 아코디언을 짊어지고 까미노를 걸을 순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아쉬워하기도 하며….

까미노에서 본 아름다운 집

내게는 오늘 의도치 않게 동행이 있어서 나의 리듬대로, 내가 원하는 데로 걸을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로레나는 나와는 다르게 꽤나 파워풀하고 열정적이었던 편. 그럼에도 로레나와 내가 비슷한 속도로 같이 걸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녀의 무거운 배낭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까미노에서는 배낭의 무게가 전생의 짐의 무게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로레나의 가방은 무려 14kg이었다. 그럼에도 씩씩한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 덕분에, 나는 약간 무리를 하게 되어 발이 많이 아프게 되었다. 중간 발톱 하나가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동행이 있다는 것은 혼자 갈 때보다 외롭지 않아 즐겁고, 때로는 내 속도보다 빠르게 힘을 내어서 상대에게 맞추어 더 멀리 가게 해주는 힘이 있다. 그러나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거나 내 속도대로 가는 것은 내려놓아야 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까미노에서의 날들은 그랬다. 때로는 동행이 있어 좋았고 때로는 동행이 없어 좋았다. 삶도 그렇듯이…하지만 이 속도로 가다간 내 발이 아작 날 거 같으니 내일은 로레나에게 이야기해서 더욱 천천히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