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두렵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예상은 했지만 피레네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특히나 평소 운동이라곤 담을 쌓고 지내던 나 같은 '저질 체력'에게는 더욱더… 생각해 보면 지난 4년간 내가 유학 기간 동안 해온 자신 있는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과 악기 연습하는 동안 열심히 놀린 손가락 운동이 전부였을 뿐이다.
오후 6시 무렵, 욱신거리는 무릎과 고관절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해가 저물어가는 산속에 홀로 남겨졌을 때의 그 막막함이란. 어느 순간부터 내 뒤로는 더 이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 이 길을 넘는 마지막 순례자는 나인 듯했다. 처음엔 하나둘 나를 앞질러 가는 이들을 보며 마음이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아등바등하다가 몸에 무리까지 왔는데 결국 꼴찌가 된 것이다.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닥치고서야 나는 내가 꼴찌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막상 꼴찌가 되고 나니 묘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더 이상 쫓기듯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그리고 그동안 스스로에게 나의 속도대로 걷기와 자유를 허락하지 않은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을 뿐이란 걸 알게 되자 허망함까지 밀려왔다. 예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제 현실로 닥치자 웃기게도 오히려 내 멋대로 할 용기와 자유가 생겨났다. 될 대로 되라지. 이것보다 더 나쁠 일은 없을 테니.
하지만 내 바로 앞을 지나가던 노부부의 안쓰러운 눈빛만은 잊히지가 않는다. 겉보기에는 한창나이일 내가 삐걱대는 고관절을 부여잡고 부들거리며 걷는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그들은 나에게 힘내라는 따뜻한 응원의 말을 건네주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까미노에서 자신이 걸어야 할 몫은 자신이 걸어야 한다. 응원해 줄 수 있고 걱정해 줄 수 있지만 목적지에 당도하기까지 길은 그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것이다.
한참을 걷다 쉬기를 반복해 겨우 마을이 눈앞에 들어왔을 때, 그 노부부를 다시 만났다. 이미 해는 거의 저물어 주변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노부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하며 "브라보!"를 외쳐주었다. 30km라는 엄청난 거리를 허약한 내가 걸어낸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오셨다는 그들의 환호 속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프랑스를 넘어 스페인 땅을 밟고 있었다. 처음 마주한 스페인의 공기는 프랑스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어르신들의 격려를 뒤로하고 숙소를 찾아 나서는데 멀리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시아인 여자 아이가 보였다. 차분하고 선한 인상에 이끌려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더니, 그녀는 10유로짜리 공립 알베르게의 위치를 친절히 알려주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나보다 일찍 도착한 그녀는 저녁 식사를 하러 가야 했다.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숙소에 들어서 여권과 순례자 여권을 내밀었다. 첫 스탬프를 받으며 비로소 첫날의 일정이 마무리되었음을 실감했다.
아침 식사는 과일과 햄, 치즈가 더해진 것과 기본적으로 빵만 나오는 것으로 선택해 티켓을 구입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는 코스 요리였는데, 수프나 파스타를 고르고, 메인 디쉬는 치킨과 생선,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이나 요거트로 택할 수 있다. 식당에서의 식사가 생각보다 헤비하고 맛도 없어서 주변 일행들에게 물어보니, 까미노에서는 웬만하면 직접 요리해 먹는 게 값도 싸고 건강에도 좋을 거라고 이야기해 준다.
숙소는 깨끗했고, 나름 괜찮은 편이었다. 세탁 서비스가 놀라웠는데, 3유로란 가격이 싼 편은 아니었지만 건조해서 차곡차곡 개어주기까지 한다. 순례길 내내 이런 극진한 세탁 서비스를 받은 곳은 없었기에 기억에 남는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미 10유로짜리 2층 침대 방은 다 차 있었다. 조금 더 비용을 지불하고 1층 침대에서 잠을 잤는데, 7월의 스페인은 생각보다 훨씬 쌀쌀했다. 숙소에 따로 담요가 없었기 때문에 다들 떨면서 잠이 들었다. 나도 가져온 옷 가지들을 다 꺼내어 덮고 잤지만 얇은 옷뿐이어서 몹시 떨며 잠들었다. 두꺼운 옷이나 침낭을 하나쯤 챙겨 오지 않은 게 후회됐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려 과연 내일 다시 걸을 수 있을지 잠깐 두려움도 몰려왔다.
다음 날 아침, 깊이 잠든 순례자들을 깨우러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일렬 행진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타를 튕기면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전통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 순수한 모습이 참으로 유쾌하게 느껴져 간밤의 피로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평화로웠던 숙소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내 옆 침대에서 자던 이탈리아 아주머니 엘레나가 돈과 여권이 든 가방을 도난당한 것이다. 그녀는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가, 내가 출발하려 할 때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알고 봤더니 그녀를 포함해 주변의 세 명이나 지갑을 털렸다고 했다. 누군가 작정하고 순례자들의 안식처를 헤집어놓은 것이다.
엘레나의 바로 옆에서 잠들었던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엘레나는 나를 향해 "너는 정말 행운아야, 이제부터 정말 조심해야 해"라며 눈물 가득한 얼굴로 충고를 건넸다. 앞으로 계속 마주칠지도 모르는 순례자 중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같은 방향에서 시작한 동행들과 순례길 코스는 계속 겹치기에, 그 말은 같이 걷는 일행 중 누군가를 의심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엘레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녀의 앞날에 무사가 깃들기를 진심으로 빌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