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여,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 1987 NO MERCY, 2026 MERCY? >

by simpo

보든 말든 TMI

# '킴 베이싱어'를 '킴 베신저'로 표기했던 시대. 그녀를 좋아했던 아재들이라면 1987년 우리나라에 개봉한

'노 머시(No Mercy)'를 모를 리 없을 터.

# 당대 최고의 섹시 스타 남녀 배우를 모두 캐스팅했다고 볼 수 있지. 리처드 기어와 킴 베신저.

# 영어 원제는 "Mercy"인데 굳이 '노 머시(No mercy)'로 제목을 바꿔 나온 최신작!

#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리처드 기어는 미국 남부의 습지에서 개고생 하고, 크리스 프랫은 의자에 묶인 채 손가락만 움직인다.

# 1987년 뉴올리언스는 마치 서부개척시대 같이 그려진다. 법이 있어도 힘센 놈이 이기는 곳. 로사도라는 악당이 군림한다. 2029년 LA는 AI가 판사인 세상이다. 법이 너무 정확해서 무서운 곳. '머시'라는 사법시스템이 군림한다.

# 레베카 퍼거슨이 AI 판사 매독스 역을 맡았다. 미션 임파서블에서 온몸을 날리던 그녀가 차가운 홀로그램으로 재판을 진행한다. 죄짓지 말고 살자. 인공 지능 판사가 무섭더라고요~


뻔뻔 평점

노 머시(1987) **** 4개 / 노 머시: 90분(2026) *** 3개

(둘 다 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옛 것이 더 나은 건 배우들이 더 고생해서...)

법(法)이라는 한자를 풀면 물(水)과 가다(去)의 합성이다. 물 흐르듯 공평하게 나아간다. 그게 법의 이상이다.

그런데 현실의 법은 언제나 그 이상에 미치지 못했다. 너무 느리거나, 너무 강하거나, 너무 인간적이거나, 너무 비인간적이거나.

1987년 뉴올리언스는 법이 느슨한 세계였다. 2029년 LA는 법이 너무 빡빡한 세계다. 두 영화는 이 양극단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누가 집행하는가.

1987 — 법 없는 곳의 법

에디 질레트(리처드 기어)는 형사다. 파트너가 뉴올리언스에서 살해된다. 그는 복수를 위해 내려간다.

뉴올리언스, 특히 카준 문화 (Cajun; "루이지애나주 프랑스 난민의 후손". 캐나다 동부 해안 지역 옛 프랑스 식민지 주민들은 영어 사용자들에 의해 흩어지고 추방당했으며, 1764년부터 1788년 사이에 뉴올리언스로 이주)가 지배하는 '바이유' 지역은 당시 미국 안의 무법지대였다.

악당 로사도(예룬 크라베)는 이 지역을 자기 왕국처럼 다스린다. 경찰도, 법원도, 연방정부도 손을 못 쓴다.

에디는 로사도의 여자 미셸(킴 베신저)을 인질로 잡는다. 아니, 수갑으로 자기한테 묶는다. 법적으로 보면 이 형사가 하는 짓도 납치에 가깝다.

여기서 영화가 흥미로워진다. 에디는 법을 집행하러 온 게 아니다. 복수를 하러 왔다. 그의 정의는 법전이 아니라 죽은 파트너에 대한 의리에서 나온다.

법학에서는 이것을 '응보형주의(Retributive Justice)'라고 부른다. 철학자 칸트는 "악을 행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이익이나 예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도덕적 필연이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국가의 법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 개인이 나서서 응보를 실현하는 건 과연 옳은가? 현대 법체계에서는 사적인 복수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영화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바이유 습지와 총격전과 킴 베신저로 관객의 눈을 채울 뿐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2029 — 법이 너무 많은 곳의 법

LA는 대량 실직과 경제 붕괴로 범죄가 폭발한다. 시는 결단을 내린다. AI 사법 시스템 '머시(Mercy)'를 도입한다. 판사도 AI, 배심원도 AI, 사형 집행도 AI. CCTV, SNS, 위치 정보, 생체 데이터, 통신 기록. 모든 디지털 흔적을 분석해 유무죄를 판정한다. 유죄 지수 98% 이상이면 즉결 사형.

이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이 형사 레이븐(크리스 프랫)이다. 그는 인간 판사의 편견과 부패에 지쳐 이 시스템을 만들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의자에 묶여 있다. 아내 살해 혐의. 90분 안에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자신이 만든 시스템이 자신을 죽인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 아이러니다. 예방적 형벌 시스템을 만든 자가, 그 시스템의 피의자가 된다.

법학에서 '예방형 주의(Preventive Justice)'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처벌의 공포로 사회 전체의 범죄를 억제하는 '일반 예방'과 범죄자를 격리하거나 교화해 재범을 막으려는 데 중점을 둔 '특별 예방'.

머시 시스템은 극단적 일반예방의 산물이다. 98% 유죄 지수면 즉결 사형. 항소 없음. 교화 없음. 처벌이 너무 빠르고 확실해서 아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

그런데 이 논리의 맹점이 있다. 나머지 2%는 무엇인가?

핸드폰이 없는 사람의 위치는 추적할 수 없다. CCTV가 없는 곳은 보이지 않는다. 조작된 데이터는 구별할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 AI는 맥락을 모를 수도 있다.

데이터는 주인공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런데 그 데이터를 심은 사람이 따로 있다면? 시스템은 질문하지 않는다. 계산할 뿐이다.

완벽한 효율이 정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법은 단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을 놓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두 영화는 정의의 양극단을 보여준다.

1987년 뉴올리언스는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에 가깝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힘센 놈이 이긴다. 사회계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개인은 스스로 정의를 실현한다. 에디의 복수는 그 산물이다. 개인적이고, 감정적이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적이다.

2029년 LA는 벤담의 '파놉티콘(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원형 감옥 설계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중앙의 감시자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피감시자가 항상 감시받는다는 인식을 만들어 행동을 통제하는 구조)'이 완성된 세계다. 모든 것이 감시되고, 데이터화되고, 판정된다. 사회계약의 효율이 극대화된 대신, 개인의 오류 가능성이 배제됐다. '머시 시스템'은 공평하다. 그러나 자비(mercy)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비'를 뜻하는 영어 단어 'Mercy'가 이 영화에서 가장 자비 없는 시스템의 이름이 됐다.

형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법철학의 오래된 질문이다. 응보형주의는 말한다. 형벌은 피해자를 위한 것이다. 악에는 악으로 갚아야 한다. 예방형 주의는 말한다. 형벌은 사회를 위한 것이다. 미래의 범죄를 막아야 한다. 교육형 주의는 말한다. 형벌은 범죄자를 위한 것이다. 사회로 돌아올 기회를 줘야 한다.

1987년 '노 머시'는 응보를 선택했다. 파트너의 죽음에 값을 매기고 받아냈다. 그것이 정의인가? 복수인가? 경계가 불분명하다.

2029년 '머시 시스템'은 예방을 선택했다. 98%의 확률로 정확하게, 빠르게, 감정 없이 집행한다. 그것이 정의인가? 알고리즘인가? 경계가 더 불분명하다.

두 영화 모두 한 가지에는 동의한다. 완전한 정의는 없다.

법이 없으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 법이 완벽하면 데이터가 인간을 지배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가 원하는 정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그 어딘가를 아직 찾는 중이다.

두 영화의 제목이 둘 다 한국에서 '노 머시'가 된 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1987년의 무법천지에도 자비가 없었고, 2029년의 AI 법정에도 자비가 없다.

시대가 달라도, 기술이 달라도,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 안에 자비(Mercy)가 없다는 우리들의 사실인식은 많이 변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두 영화 모두 '노 머시'다. 배급사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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