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해결이 돼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by 담하

내가 기억하는 청소년기의 집은 늘 엄마와 언니의 싸움으로 가득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집 안의 공기는 전쟁 같았다. 나이 차이가 꽤 났던 언니는 집 근처 대학을 다녔고, 엄마와 언니는 매일 부딪혔다. 어린 내 눈에는 두 사람 모두 기가 세 보였다. 한 사람만 조금 참으면 끝날 것 같은 싸움이었지만,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하루하루 더 격해지는 싸움이 무서웠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말려보려 한 적도 있었지만, 늦둥이 막내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조용해지는 법을 배웠다. 주장하지 않고, 눈치 보며, 최대한 작아지는 것이 그 집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나의 청소년기는 기죽어 지낸 시간이다. 그 당시 나에게 유일한 희망은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뿐이었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당연히 집 근처 대학에는 원서조차 내지 않았다. 학비와 생활비를 혼자 감당해야 했지만, 집을 나온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독립한 후 명절이나 집안 행사에 가끔 내려가면 여전히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있었고, 나는 또다시 도망치듯 돌아왔다. 그 전쟁과 같은 싸움은 언니가 결혼해 독립하기 전까지 10년 넘게 이어졌다.


그 시간을 지나며 나는 많이 억눌려 있었다. 집에 있을 때도, 독립한 이후에도, 나는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다. 부탁 하나도 쉽게 하지 못했고, 당연한 요구조차 미안해했다. 자존감도 낮았다. 타고난 성향이라고 생각해보려 했지만, 집에서의 시간들이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족이 밉기만 했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엄마에겐 키워준 고마움이 있었고, 언니는 으레 여동생이 그러하듯 닮고 싶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복잡했다. 도망치듯 집을 나오긴 했지만, 언젠가는 엄마와 언니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 시절의 나는 둘의 싸움 때문에 힘들었다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 속상했고, 무서웠고, 미웠고, 외로웠다고.




무언가 해결되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은, 나를 불행한 순간에 묶어둔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나는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게 이런 문제의 경우, 완전히 해결되기는 어렵다. 특히 가족의 문제는 더더욱 말이다. 내 의지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와 언니에게도 각자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 시간 속에 서로가 누구보다 힘들었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나의 상처를 자동으로 치유해주진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터놓고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시간의 나에 대해 이해받고, 사과받고 싶었다.


그러나 독립해 집에서 떠났다고 해서 관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감정을 이해받기는커녕,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에 묶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펐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그 생각은 20대 내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새 창을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상처가 회복되어야만 '내'가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몰되지 않는 겁니다. 부모와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이 되어야만 '내'가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 안 하는 것이 좋아요. 상처 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평생 상처에서 허우적거릴 수 있습니다. 그 일은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어떻게 해도 없었던 일이 되지 않아요.
―오은영의 『화해(p.256)』 중에서


내가 왜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가족과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야만, 그 상처가 풀리고 관계가 정리되어야만 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 생각에 너무 오래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가족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야만 내가 괜찮아질 수 있다고 믿는 생각이 오히려 나를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상대의 성격과 가치관은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없다. 가족이라 해도 결국은 나와 다른 사람이다. 그들의 반응을 내가 통제할 수는 없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없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을 조금 바꿔보려 한다.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어도, 나는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부모와의 문제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집을 나와 내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대학을 멀리 가는 선택을 했고, 스스로 감당했고,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기죽어 지낸 시간이 길었지만, 이후의 삶은 내가 선택했고 내가 책임졌다.


나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다.

과거는 바뀌지 않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다르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조금씩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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