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의 모든 순간이 즐거울 순 없다.

by 담하

20대 중반, 유럽 배낭여행을 결심했다. 결심은 불현듯 찾아왔다. 강원도의 한 목초지를 걷다가 초원 위에 우뚝 선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는 순간, 문득 ‘유럽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보면 충동적인 결정처럼 보이지만, 돌이켜보면 그동안 마음속에 오래 쌓여 있던 바람이 그날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었다.

나는 원래 여행을 좋아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해 생활하던 터라 여행은 늘 사치에 가까웠다. MT가 내 여행의 전부였다. 그러다 친한 언니와 떠난 내일로 기차여행을 계기로 혼자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해외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국내 곳곳을 소소하게 다녔다. 그럼에도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늘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꼭 가고 싶었다.

그 당시 마침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취업을 하면 긴 여행은 더 어려워질 것 같았다. 배낭여행은 보통 20대 초반에 많이 간다는 말도 마음에 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 중반도 한참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는 지금이 아니면 체력적으로 힘들어 배낭여행을 못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비행기 표부터 끊었다.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는 확신하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선택한 뒤에 옳게 만들겠다’는 마음이었다.




준비 과정은 설렘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장기 해외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 중동호흡기증후군인 메르스가 국내에 유행하던 시기라 괜히 더 조심스러웠다. 설레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채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드디어 출발 날.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들여 짠 일정표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그렇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체력이 닿는 데까지 걸었고, 보고 싶던 것들을 마음껏 보았다. 꿈꾸던 공간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찼다.

하지만 그 기분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하나둘 생겼다. 길을 헤매고, 계획이 어그러지고, 피곤이 쌓였다. 잊지 못할 친절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어떤 날은 불친절한 일을 겪어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유럽까지 와서 기분을 망칠 수 없는데’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애써 다독였지만,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 것까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열흘이 지나며 비로소 깨달았다.

여행지에서의 모든 순간이 즐거울 순 없다는 것을.




나는 유럽 배낭여행을 이상에 가깝게 그려두고 있었다. 유럽에 가면 매 순간이 반짝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여행도 결국 삶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았다. 여행지에서 매 순간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기분 나쁜 일이 생겨도, 길을 헤매도, ‘이 또한 여행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가지를 쓰는 순간조차 “이런 경험도 나중엔 웃으며 말하겠지” 하고 넘길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일상도 마찬가지다. 여행지에서의 모든 순간이 즐거울 수 없는 것처럼, 일상의 모든 순간이 고되기만 할 수도 없다. 반복되는 일상으로 무료하고 지치고 무기력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소한 기쁨이 숨어 있다. 버스가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오거나, 회사 근처 새로 생긴 카페 커피가 맛있었던 순간 같은 것 말이다.

결국 내가 일상 속에 있든, 여행지에 있든, 그 어디에 있더라도 완전하게 행복한 날도, 끝없이 불행한 날도 없다.

행복도 불행도 결국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모든 일에 의연해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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