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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ie Jan 23. 2020

세탁기 없는 쉐어하우스에서 산다는 것

본격적으로 손빨래를 예찬하는 글

가구가 없는 집에서 사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옷은 몇 벌 되지 않으니 가방에 두고, 침대쯤이야 바닥에서 자면 될 테고. 아, 세탁기가 없으니 코인 세탁소에 매주 가야겠구나.' 그렇게 상상만 하던 삶이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현실이 될 진 몰랐다. 그것도 무려 쉐어하우스에서.






"응, 세탁하는 데는 4달러고, 건조기는 2달러야."


집을 보러 간 날, 아파트가 좀 낡긴 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리 메모 앱에 빼곡히 적어간 체크리스트도 거의 충족했으니까. 다 둘러보고 돌아갈 즈음, 집주인은 아파트 2층에 있는 세탁실을 보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쉐어하우스에 세탁기가 없다고?'


집에 세탁기가 없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에 '세탁기가 반드시 있을 것'은 체크리스트에 없었다. 그동안 일주일에 두세 번은 족히 사용하던 세탁기가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은 꽤 불편할 것이라 생각해 망설여졌다. 그래서 세탁기를 제외하고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한 이 집을 끝까지 보류해뒀다. 대신 다른 집을 보러 다녔지만, 나의 체크리스트를 가득 채워줄 마땅한 곳이 없었고, 그렇게 결국 세탁기 없는 쉐어하우스에 계약을 하고 말았다. 얼떨결에 나의 No 세탁기 라이프가 시작된 것이다.










오롯이 내 에너지로 살아간다는 것


매일 샤워를 할 때 빨래도 같이 한다. 옷에 비누를 살살 묻혀놓고선 머리를 감으며 발로 열심히 밟는다. 그 날 얼룩이 진 부분이 있다면 손으로 나름 애벌빨래도 해놓는다. 손수건이나 장 볼 때 쓰는 천주머니는 따로 빼서 손빨래를 한다. 모든 빨랫감을 기계의 힘 없이 스스로 처리하면서, 세탁기의 탈수 기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물은 손으로 짜도 짜도 계속 떨어졌다. '웨이트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내 힘이 고작 이거밖에 안된단 말이야?'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발빨래'를 마친 세탁물들은 방에서 말려야 한다. 세탁 건조대도 없을뿐더러, 작은 테라스로 나가는 안방 문은 365일 굳게 잠겨있으니까. 고심하다 욕실 수건걸이와 방 안에 있는 행거를 빨래건조대로 정해 매일 널고 개기를 반복한다.


5분이면 끝나던 샤워가 10분으로 늘어났다. 일을 마치고 피곤해진 상태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거대한 빨랫감을 만나게 되면 2배로 피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과정들이 오롯이 내 힘과 에너지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빨래를 하다가 문득, 전기를 24시간 쓰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지만, 전기 또한 결국 구매하는 것이고 자연에게 빌리는 타인의 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에너지로 모든 일을 해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과 그만큼의 보람을 매일 느끼며 살아간다.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 덕분에, 내가 소유한 물건 하나하나에 그 필요성을 자문해보며 비움을 실천해나가는 요즘이다.









어제의 나의 희생이 만든 오늘


나는 아침에 옷을 꺼내 입을 때 가장 감사함을 느낀다. 빳빳하게 마른 옷이 자기만의 규칙에 따라 접혀 차곡차곡 쌓여있는 옷장에서 옷을 하나씩 꺼내 입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감사하다. 셔츠부터 양말까지 모두 온전히 나의 힘으로 세탁한 것이니까. 오늘 아침에 느낀 행복도 어제의 나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손빨래를 하며 나오는 구정물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오늘은 이만큼 걸어 다녔구나, 오늘도 많은 일을 하고 경험을 했구나, 를 알 수 있는 나만의 척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오늘 하루에 대해 되새겨본다. 오늘 내가 이만큼 성장해있는 것도 어제의 내 노력과 희생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이고, 제일 잘 알아야 하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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