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무개 Apr 06. 2018

더 나은 나, 말빚 지지 않기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큰 말빚은 지지 말자는 것

가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홀로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를 찾았다. 내가 길상사를 찾은 건 이곳에서 법정스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세상과 사람에 지쳐서 힘들 때면 법정스님의 수필집을 수시로 펼치곤 했다. 자기 전 아무 페이지를 펼쳐서 마음 가는대로 읽다가 잠들었다. 고요한 산중에서 간소하게 사는 법정스님의 맑은 글을 보다보면 내 마음도 그곳에 있는듯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길상사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일주문을 지나 계곡이 있는 왼쪽 산책로를 따라가면 법정스님의 수필 글귀가 나무 사이사이 걸려 있는 게 보인다. 그렇게 숨어있는 글들을 하나씩 찾아 읽다가 둥글게 한바퀴를 돌아 산책로의 끝에 다다르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곤 했다. 


절 입구로부터 가장 안쪽으로 떨어진 곳에는 진영각이 있는데 이곳에 스님의 유품이 있었다. 생전에 걸친 가사, 몇 개의 다기, 낡은 지갑 같은. 손 때 묻은 간소한 물건으로 무소유를 말만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신 검박한 삶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울컥했다.  


이 안에 책에선 볼 수 없었던 스님의 유언장이 있었다. 스님의 삶답게 간단한 유언장이지만 내용은 결코 간단하게 넘길 만하지 않았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


무소유는 비단 물건뿐 아니라 말에도 깃들어 있었다. 


스님의 유언을 보면서 그동안 생각 없이 쏟아낸 말과 글에 대한 지난 행적이 떠올라 또다시 부끄러워졌다. 많은 이들의 영혼을 치유한 법정스님조차 자신의 글을 말빚이라 칭하고 한없이 낮추는데 내가 써놓은 글들은 말빚을 넘어서 ‘말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잘 보이려 나를 포장하고 과시한 허세, 완벽한 사람이 아닌데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서 누군가를 탓하는 비판,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내게도 도움 되지 않는 가십 같은 말. 그 밖에도 떠올리면 참 많다. 특히 약 10년간 신문사에 있으면서 말빚을 수도 없이 많이 지었다.  


다행히 심플라이프를 실천하면서 그동안 지었던 말죄에 가까운 말빚을 조금이나마 갚아나가게 됐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나는 물건을 비워내듯 내 안에 부정적인 말을 비워내고, 긍정적인 말로 나를 채우는 과정 중에 있다. 다시금 불필요한 말을 줄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툇마루에 말없이 한창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 말할 때는 ‘아차!’ 싶을 때가 많았다. 말을 잔뜩 늘어놓고 후회하고 또 쏟아놓고 후회하고. 말을 하는 순간에는 다짐을 잊곤 했다. 어리석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원래부터 말수가 남들보다 적은 편인데도 말을 줄이는 건 어려웠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지키자고 다짐했다.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큰 말빚만큼은 지지 않겠다는 것. 그런 말은 심장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송곳 같아서 오래도록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큰 흉터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 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그럴 수 없다.  



살다 보면 서로를 송곳으로 찌르는 아픈 말빚을 종종 목격한다. 그런 일은 어떤 때는 오프라인 만남에서 어떤 때는 온라인 댓글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말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말과 글이 되어 나온다.  


특히 요즘 온라인에서의 글이나 댓글이 도를 지나칠 때가 많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온라인은 모두가 보는 개방적 공간으로 미디어의 성격을 띠는데 이런 공간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근거없이 비방하는 글이나 비판이라는 이름 하에 비난하는 글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그렇게 서로를 글말로 찌르다 결국 남는 것이 무엇일까. 이겼다는 성취감? 남보다 낫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우월감?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박? 내가 보기엔 승리처럼 보이는 패배만 보인다. 남을 눌러야만 자신이 높아지고 보호받는 것 같은 낮은 자존감과 인격, 중요한 일은 뒷전인 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시간낭비를 하고 있음을 인증하는 것. 무엇보다 주고받은 송곳에 찔려서 생긴 마음의 상처. 


칭찬 같은 좋은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우리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마따나 이 글조차도 말빚이 되어 남을 지 모르겠다. 그래도 모두가 좋은 말과 글만 주고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남긴다.


원문 : 심플라이프(simplelife.kr)


Q. 살면서 누군가가 당신에게 큰 상처를 준 말은 무엇이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