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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Dec 17. 2019

두려운 날들은 늘 우습게 지나간다

두려운 날들이 우습게 지나갔다


오늘은 프랑스의 대중교통의 파업이 시작한 지 꼭 열흘 째가 되는 날이다. 열흘이란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공공부문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매우 낯설었다. 파리의 경우는 무인으로 운영되는 2개 노선을 제외한 전 노선의 메트로와 전철 등이 파업에 돌입, 처음 4일 동안은 거의 전면적으로 운행이 중지가 되었고 지난 월요일부터는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에만 몇 차례 운행을 하고 있다. 버스 또한 배차 간격이 상당히 늘어나는 등 정상적인 운행이 아니어서 일주일째 파리의 시내와 교외는 교통지옥을 겪고 있다. 오늘처럼 비까지 내리는 출근 시간은 전쟁터가 따로 없다. 얼마 전 총리로부터 파업의 원인이 된 연금 개혁안의 세부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 측의 공감을 전혀 얻지 못하는 상태여서 파업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크리스마스를 넘기게 될지 아무도 장담을 못 하는 상황이다.


프랑스어가 서툴러서 아직 기사를 다 이해하기가 힘들고 한국 쪽에서는 당연히 단편적인 뉴스 밖에는 나오는 것이 없어서 파업의 이유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더듬더듬 찾아본 바에 의하면 정부에서는 각 업종별로 다르게 운영되고 있는 연금을 통합하고 업종에 관계없이 근로한 기간에 상응하는 포인트를 부여(업종의 난이도와 위험도에 따른 가감은 있음), 그 포인트를 퇴직 후 연금으로 전환받는 안을 밀어붙이려 하고 있는 듯하다. 그 이유로는 직종 간의 이동을 용이하게 해서 근로의 유연성을 확보하고 연금을 통합 관리하여 연금의 형평성과 투명성을 키우겠다는 점을 들고 있는 듯.


하지만 노동자 측에서는 친기업적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마크롱 정부의 이런 시도를 연금의 권리를 약화시키고 근로 시간을 늘리고 퇴직 시기를 늦춰서 실질적으로는 지급받는 연금 액수를 낮추려는 일종의 기만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연금은 일종의 약속이고 그래서 시작한 시기의 조건을 바꾸는 것은 밖에서 볼 때는 합당해 보일 지라도 당사자들에게는 일종의 기만처럼 느껴질 수 있기에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일 년 이 년의 문제가 아닌 30년 40년을 쌓아놓은 약속이기에 더더욱 변화를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 어려운 것 같다.


다만 프랑스도 우리나라처럼 연금이 고갈되고 있는 듯하고 따라서 노동자 측을 포함한 모두가 개혁을 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곳에서라도 어느 누구로부터라도 완벽한 답은 없을 테니 적지 않은 충돌과 진통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까진 그동안의 불편은 대체로 감내를 하겠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태도인 듯하다.


자신의 뜻은 큰 소리를 치면서라도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이 이쪽 사람들의 문화이다. 그것이 때로는 아직은 외부인일 우리의 눈에 놀라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나는 남에게 나의 의사를 말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하는 사람으로, 남들과 부딪힐 바에 혼자 손해를 감내하고 얻는 고요를 더 큰 효용으로 생각하자 하면서 살아왔다.


순수했던 시절에는 내가 처하지 않는 일들을 대신 주장하면서 집단 전체와 맞서기도 했었지만, 그 결과는 나 혼자만의 고립이었다. 내가 대신 권리를 주장해준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조차 '왜 나서서 괜한 분란을 일으키냐'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하여 나 혼자를 제외한 집단 전체가 나에게 등을 돌리는 상황을 맞았을 때, 그때의 상처는 무척이나 쓰라렸다. 그리하여 점차 고요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진 나의 눈에 충돌을 불사하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은 여러모로 성가심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고요함이 완벽함은 아니다. 곪아가고 그러다 자신이 병 그 자체가 될 수가 있다. 말을 해야 하고 불만을 토로해야 하고 엉성한 주장이라도 해야 한다. 설명을 들어야 하고 삐쳐있어야 하고 그러면서 또 함께 한다는 것 자체는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조용히 집단에서 열외 하게 되면, 또 조용하니 좋다며 열외 하는 개인들은 그냥 내버려 두면 그 사회는 잠시 동안은 고요하고 심지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할지도 모르나 결국 내리치는 작은 파도 한 번에도 모래성처럼 부서지고 말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훨씬 큰 장벽이 되기도 한다. 몰라서 못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것이지. 입장이 확실한 문제를 가지고도 상대와 싸우게 되는 것도 그런 한 이유 때문일 테다. 그런 감정적인 일어섬은 논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우선은 고요한 공기를 위해 충돌을 덮으려 하지 말 것. 나의 시간 감각으로 화해하라며 받아들이라며 강요하지 말 것. 쉽진 않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온통 가시가 돋고 못 죽어 안달하는 날도 온다.


원래부터 출퇴근 시간이면 지옥이 되던 파리의 지하철은 종점인 곳에서도 사람들이 너무 몰려 플랫폼에 진입하는 것 자체를 직원들이 통제하고 있을 정도였다. 버스 또한 종점부터 만원이 되어 매 정거장마다 가득 찬 버스를 보고 낙담하는 많은 눈들을 볼 수 있었다.


파업이 시작한 지난주 목요일과 금요일은 학교마저 문을 닫아서 목, 금, 토, 일 4일 동안의 연휴가 생겨 버렸다. 평소의 파리는 지하철을 타면 거의 모든 곳을 갈 수 있지만 파업으로 지하철을 이용할 수가 없다 보니 입원을 한 환자 마냥 집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 날씨 마저 좋아서 우리는 못 견디겠다며 신을 신고 나와 동네의 이곳저곳들을 달리거나 걷거나 하면서 답답함을 덜었다.


파리는 서울과는 달리 언덕진 곳이 거의 없어서 인지 시내의 곳곳에 자전거와 전동 킥보드 그리고 무동력 킥보드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여가로 즐기는 것이 아닌 출퇴근의 수단으로 그러한 것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내심 눈여겨보던 킥보드를 파업을 빌미로 구입해 볼까 하며 파업 후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쇼핑몰에 가보기로 했다.



시청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그곳 정류장에서 쇼핑몰 근처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날씨는 좋았지만 무척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젊은 사람은 나와 엠마뿐이었고 장바구니를 든 할머니와 지팡이를 짚으신 할아버지들만 가득했다. 다들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잘 쓰지 못하시는 어르신들은 우리에게 버스가 오긴 오냐고 물으셨고 우리는 또 프랑스어가 서툴러 우리가 확인한 정보에 자신이 없었다. 다들 적당히 불안함을 가지고 버스가 오는 방향만 목이 빠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께서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쿠쿠’ 라며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쿠쿠는 가족이나 아주 친한 사이에 하는 인사이다.) 처음에는 버스가 너무 안 와서 그냥 장난 겸 제스처를 해보시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진지하게 지나가는 차들마다 ‘쿠쿠’ 라는 고음을 내시면서 연신 손짓을 하셨다. ‘에이 설마 세워줄까’ 의심스러워하며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몇 대의 차가 그냥 지나갔지만 할머니는 포기를 하지 않으셨고 마침내 노부부가 타고 있던 한 승용차가 멈춰 세우는 데 성공하셨다. 할머니가 목적지를 말했고 노부부는 미안하지만 자신들의 집은 그곳에 못 미치는 곳에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할머니께선 포기하지 않으시고 몇 마디를 더 건네셨다. 잠시 망설이던 운전석의 할아버지께서 마침내 문을 열어 주셨고, 신이 난 할머니는 우리를 바라보며 환히 웃으시고는 가볍게 차에 오르셨다. 할머니가 들고 있던 캐리어가 뒷좌석에 실리지 않자 운전석의 할아버지는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택시기사처럼 할머니의 짐을 트렁크에 실어주고는 손수 문까지 닫아 주셨다.


화요일에는 파업 때문에 오전 수업만 하고 학교를 마쳤는데 돌아갈 지하철도 없고 해서 30분을 걸어 국립중앙도서관 근처에 있는 스포츠용품점에 가서 킥보드를 샀다. 사실 한국에서는 고민할 만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쓰임새가 확 줄어서 꼭 필요할까를 되물으면서 지난 주말까지 포함해 4번 정도 빈 걸음을 했었다. 그 덕에 ‘Trottinette’ 라는 복잡한 단어도 절로 외웠다.



이날은 아침에 하도 고생을 해서 파업기간 동안에는 ‘정말 트호띠네뜨라도 있어야겠다’ 싶어 후퇴 못할 전진을 해버린 것. 그래도 한참을 1층 2층을 두리번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같은 모양의 트호띠네뜨를 나란히 들고 가 계산을 했다. 5유로는 현금으로 나머지는 카드로.


계산을 하자마자 신이 나 바로 개봉을 하고 상자는 버린 후 시운전에 들어갔다. 근처에 있는 국립도서관을 향해 내달렸다. 며칠 동안 집에만 갇혀 있다가 시원하게 달리니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고풍스러울 거라 생각했던 프랑스의 국립중앙도서관은 책을 펼친 모양을 본떠 만든 모던함을 넘어 미래적인 느낌마저 나는 깔끔한 하얀색의 건물이었다. 센느강이 보이는 상당히 넓은 대지에 중앙을 공원처럼 비워두고 책들이 펼쳐진 모양의 건물들이 사방에 높게 올라가 있었다. 때는 또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이라 시민들을 향해 펼쳐진 하얀색 책들은 은은한 아이보리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우린 도서관에 있는 작은 카페에 들려 타르트를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곧 사람들의 퇴근을 위해 잠시 동안 지하철이 운행하는 시간이 되어 우린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갔다. 가는 동안은 내내 오르막이어서 허벅지가 많이 아팠지만 기분은 여전히 상쾌했다.


지하철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전광판에 지하철이 30분 가까이 있어야만 도착한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 사람이 가득한 채로 들어올 지하철에 킥보드까지 들고 탈 엄두가 안나 우린 기다리는 일을 포기하고 학교 근처 파리의 남쪽 경계까지 내려가 종점에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종점에는 이미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래도 종점이니 사람들에게 덜 방해가 되는 곳에 킥보드와 함께 자리를 잡을 수 있겠지 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보통 10분 정도이던 배차는 하염없이 늦어져 30분이 넘어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아침에 비까지 내려 날이 무척 차가웠다.


그때 한 이이를 태운 젊은 여성이 운전하는 차가 정류장 앞에 정차를 했다. ‘왜 굳이 여기에다 정차를 하는 거지?’ 하는 의문에 나는 그 차를 퉁명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젊은 여성이 누군가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뭐야? 왜 하필 승강장 앞에서 누굴 기다리는 거야.’ 하며 나는 속으로 불평을 했다. 근데 그 젊은 여성은 찔끔찔끔 차를 앞으로 이동시키면서 계속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손짓을 하더니 급기야 창문을 내려 뭐라 뭐라 말을 건넸다. 주변에 서 계시던 한 할머니가 혹시 길을 묻는가 싶어 보도에서 내려와 차로 다가갔다. 젊은 여성은 차에 남은 자리가 있으니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겠다며 할머니께 승차를 권했다. 살짝 당황한 할머니가 재차 말을 확인했고 젊은 여성은 다른 분들도 타도 좋다고 전해달라며 할머니께 부탁을 드렸다.


“이 마담께서 가는 길까지 모셔다 드린대요. 타실 분?”


추위에 지쳐가던 노인 몇 분이 기뻐하며 도로로 내려섰다. 차가 흐뭇함을 주며 떠난 후로 30분을 더 기다렸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다행이다. 내가 다 고맙네.”



파리에 와서 무뚝뚝할 거라 생각했던 파리의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정이 넘쳐서 놀랐던 적이 많다. 지하철에서는 ‘요즘의 서울’ 에서보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본다. 여든은 훨씬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열차에 오르자 흑인 남성이 쏜살같이 자리를 양보했고.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는 오히려 씩씩하게 엄지를 들어 올리며 ‘쥐스트 윈 스타시옹 멕시!’ 하며 사양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젊은 이들은 자리를 자주 권하고 어르신들은 거절을 자주 하신다. ‘난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어’ 하며 씩씩하게 서서 가시던 할머니도 생각이 난다.


마침내 탄 버스는 종점에서 이미 만원이 되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버스로 빨려 들 듯 들어섰다. 앞 쪽에서 얼마 없는 의자 때문에 다툼이 생겼는지 한 마담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는 그대로 버스에서 내려 버렸다. 순간 버스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고 엠마와 나는 긴장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후의 버스 안은 흐뭇한 모습뿐이었다.


정류장마다 빈틈이 없는 공간 때문에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는 일을 무척 힘들어했다. 서로 치이고 쓸리고 눌리고도 했지만 사람들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차가 내리고 구석에서 몸을 빼내지 못해 내리지 못하는 젊은 여성이 있자 막히는 문을 손으로 막으며 ‘쥬 데성드’ 를 다 같이 계속 외쳤고, 몸이 끼여 못 내리는 그 여성을 마담들이 팔을 잡아끌어 빼내 주셨다.


“쥬 데성드라고 말만 해. 내가 다 빼줄 테니까!”


마담의 호기로운 말에 사람들은 웃었다. 내 옆의 므슈는 정거장마다 차에 올려타는 사람들에게 ‘데 정펑! 데 정펑!’ 소리를 치면서 그들 눈에는 안 보일 자신 뒤 쪽의 아이들이 사람들에게 눌리지 않게 두 팔로 버티셨다. 그 덕에 키가 작은 아이들과 나 또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차가 종점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여성분이 사색이 되어 핸드폰이 없다며 울상을 지었다. 나는 순간 복잡함을 틈나 누군가가 소매치기를 했나 보다 하며 그간 흐뭇했던 마음을 움츠렸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주변의 여러 마담들이 ‘누메호!’ 라며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셨다.


“제호 시스 디즈위트…”


번호를 얘기하면 주변 분들이 크게 따라 얘기를 하고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그 번호를 눌렀다. 누군가 빨랐던 이의 핸드폰에서 통화 연결음이 들리자 주변은 숨을 죽였다.


“삼성? 아이폰?”


“아이폰이래요. 다들 가방이나 바닥 봐봐요.”


주변의 마담들이 더 열심히 그 여성분의 핸드폰을 수소문했고, 다행히 작은 아이폰이 어딘가에서 발견이 되었다. 다들 다행이라며 또 웃었다.


파업이라서 다들 힘이 들고 날이 서 있을 테니 서로가 서로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 거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보이는 좋은 모습이라도 내 마음에 흐뭇하게 기억되긴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곳에 와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소매치기를 당하고, 동양인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을 이용해서 부당한 일들을 시키는 업주와 집주인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걱정해서 마음먹은 것보다 정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서 놀란 것도 사실이다. 어제도 킥보드를 들고 휘청이며 서 있는 엠마를 보고 한 마담이 킥보드를 뺐다시피 받아 자신의 다리 아래에 놓아주셨다. 그리고는 뒤쪽에 빈자리가 나자 자신의 자리는 엠마에게 양보하고 자신이 뒤쪽으로 기꺼이 자리를 옮기셨다.


영어를 써서 물으면 대답도 안 한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정류장이나 마트에서 핸드폰을 보며 서있으면 무슨 일이냐며 도와주겠다며 영어를 쓰며 말을 거시는 분들도 많다.


앞 차가 느리게 간다고 경적을 울리며 위협 운전을 하는 모습도 봤지만, 또 대부분의 차들은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라도 우리에게 길을 건너가라며 정차를 해준다.


어디든 어느 곳이든 적당히 나쁘고 또 적당히는 살갑다. 그러니 떠나는 것도 머무는 것도 결국 자신의 일인 것이다. 열흘을 넘긴 파업에 사람들이 지쳐 또 다른 모습들을 보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이곳에서 어깨를 펴며 살고 있다는 것에 다행인 요즘이다. 어제는 무려 2달 만에 쥐를 봤다. 두려워하면서 못 보니 더 불안하던 그 녀석이었다. 쏜살같이 지나가던 그 녀석은 생각보다 소문보다는 훨씬 작은 녀석이었다.


두려운 날들은 늘 우습게 지나간다. 그리고는 우리는 늘 한 해가 어느새 가버렸다고 놀라워한다.


글, 이미지 레오


201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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