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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동훈 Mar 20. 2022

어차피 닿을 수 없는 곳이라면,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단편들을 크게 3가지 관점으로 나눌 수 있다. 공상과학(SF) 소설과 페미니즘 소설, 그리고 사회 소설이다. 수록된 단편들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한 작품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좋은 글이겠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는 그게 아쉬움을 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단순히 SF 소설이라기엔 과하게 문학적이며, 페미니즘 소설이라 부르기엔 다소  고, 사회 비판 소설이라고 말하기엔 상당히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인상 깊게 느끼는 건 작가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작품에 쓰이는 주제가 작가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영역이기 때문이다. 김초엽은 [관내분실]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다루기도 하고, [감정의 물성]을 통해서 본인이 수학한 내용을 문학적으로 풀어낸다. 또한 탐구하고 사색한 내용을 간결하고 섬세한 문장에 담아낸다. 어쩌면 이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공상과학소설치고는 과한듯한 문학성과 섬세한 문장이 주는 모호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단편소설집을 읽을 때면, 소설집의 제목으로 쓰이는 단편에 집중한다. 아무래도 작가가 가장 자신 있는 작품임과 동시에 단편집 전체의 주제를 포괄하는 작품으로 여겨지기에 유독 집중해하게 된다. 예상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깊게 남는다.

 

마르크스는 인간에서 비롯된 것이 인간의 억압하는 낯선 힘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인간을 그 본성의 몇몇 본질적 측면들 또는 사회로부터 분리 또는 외부화시키는 소외현상을 말한다. 빠른 기술진보로 인한 노동의 소외, 인간과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그 형태는 다양하다.

 

작품 속 오랜시간 홀로 행성에 남아 있던 안나는 급격한 기술진보로 인한 노동과 인간 소외를 동시에 마주하는 발전의 피해자이다. 작품의 내용에서와 같이, 유망한 연구자였던 안나는 경제성만을 따지는 국가권력에 의해 가족과 이별하게 되고, 아무도 없는 폐정거장에서 스스로 냉동인간이 되는 것을 반복하며 때를 기다린다. 그러는 과정에서 안나라는 인간 존재는 잊혀지고, 그의 가치는 사라진다.

 

182p.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여러 질문을 낳는다. 작가는 왜 ‘없다면’이라는 가정문을 사용했을까? 현대의 기술로 빛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것은 명확한 사실인데, 공상과학에 어울리는 제목이라면 상상력을 배가시킬 수 있게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이 더 어울리는 제목이 되진 않을까 생각했다.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우리의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정이 아닌 전제에 기반한다. 인간이 어차피 빛의 속도로 갈 수없는 존재라면 더 먼 곳을 지향하고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주위의 가까운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돌아보라고 말한다. 막연한 미래가 아닌 당면한 현재와 소통하고 대화함으로써 먼 미래가 아닌 현재를 더 살기 좋게 만들자고 말한다.

 

2017년에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SF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등장인물들은 ‘오아시스’라는 가상세계에서 모든 삶을 영위한다. 모든 만족과 모든 상실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오아시스 뿐이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가상현실 속에서 모든 내용이 전개되기에 <레디 플레이어원>은 지극히 공상과학 영화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를 통해 “현실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그래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급진적으로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에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는 새로운 것, 좋아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그들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차피 빛의 속도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주위를 둘러보자. 그리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자. 그것이 더 나은 삶을 누리는 방법이다. 김초엽의 글이 주는 메시지와 스필버그가 영화를 통해 주는 메시지는 이런 의미에서 일맥상통한다.

 

“우주 저편을 보기 위해서 인간의 본래 모습, 본성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인간의 성취일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개인의 존재 가치를 규정짓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소유 혹은 자신의 존재 둘 중 하나로 규정하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우주 저편을 보고 넘어가길 추구하는 것을 소유, 인간의 본래 모습을 지키며 가까이 있는 것을 소중히 하는 것을 존재로 생각한다면, 미래 우주를 지향하며 기술 발전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오직 소유를 쫓는 행위를 통해 인간 가치를 구축하려는 것이다.

 

소유만으로 인간 가치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진 개인은 취약하다. 자신을 비롯한 개인을 어떤 소유를 위한 수단으로 삼아 살아간다면 그 삶은 쉽게 무너진다. 반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목적으로 두고 사는 삶은 비록 느릴 수 있고, 때로는 외로울 수 있으나 대체로 견고하고 충실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왕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은 현재에 충실한 삶과 존재를 목적에 두며 살아가는 삶이다. 이것이 튀는 듯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스러질 듯이 섬세한 문장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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