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16일이라 쓰고
부마라고 읽는다.
10·16 부마(釜馬)
제갈 상길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 있었다. 직책은 망원(望遠)이라고 그 당시에는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일이었다. 망원이라고 하니 보름달이 잘 보이는 남산에서 달을 멀리 보는 것을 연상하는 분은 더 이상 읽지 마시고, 망원이 기관의 끄나풀이라는 것을 아는 분만 읽기를 바란다. 비유하자면 일제 강점기 순사 앞잡이 같은 존재였다. 점조직으로 운영되었던 끄나풀이 부산대학교에 몇 명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그가 관찰하고 보고해야 했던 것은 무역학과와 경제학과 동향 보고였다.
-망원 37호 보고-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무역학과 중앙도서관 앞에서 50여 명의 데모가 있었으나 큰 호응 없이 해산됨. 보고자 김길수 -
짧은 메모를 기자 수첩 용지를 한 장 뜯어 보고서를 썼다. 이름이 ‘제갈 상길’이지만 ‘김길수’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중앙정보부 부산지사, 속칭 삼일공사 조경수 사무관에게 메모지를 전달하고 봉투 하나를 받았다. 봉투 속에는 한 학기 대학교 등록금이 50만 원 하던 시절에 거금 10만 원이 들어있었다. 세월이 40년 흐른 오늘날에야 부끄러움이 일지만 당시에는 돈맛에 부끄러움을 모르고 지냈다.
정광민은 15일의 데모가 흐지부지되자 친한 친구 몇 명에게 도서관 앞 벤치로 모이게 하여 토론했다. 서울에 이화여자대학교 학도호국단에서 부산대 학도호국단 앞으로 ‘가위와 면도날’을 보냈다는데, 이건 아니지? 하는 그의 말에 모였던 친구들이 다 동감을 표시했다. 그는 2학년 과대표도 아니었고, 평소 데모를 주로 많이 하던 이념 서클 가입자도 아니었다.
1979년 10월 16일 정광민은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이었다. 그해 부산에 괴담이 떠돌았다. 이름하여 ‘3불’이라는 것이었는데, 부산대학교를 상징하는 독수리상의 독수리는 날지 않는다. 후문에 설치된 ‘자유의 종’ 역시 울지 않으며, 서울과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대학교 학생들이 유신반대 시위를 해도 부산대는 유신반대를 안 한다, 이렇게 ‘3불’이었다.
그리하여 서울의 이화여자대학교 학도호국단에서 부산대학교 학도호국단 사무실로 ‘가위 한 개’와 ‘면도날 열 개’를 소포로 보냈다. 누가 본 것은 아니지만 소문은 부산대학교 담장 너머 일반 시민에게도 퍼졌다.
학생 신분이면서 학생들의 데모 주동자가 누구인지 유인물 내용이 무엇이며 누가 초안을 작성했고, 누구 집에서 경필 글씨를 긁고 종이는 누구 돈으로 인쇄는 몇 장을 어디에서 배포했는지 정확하게 육하원칙은 아니지만 파악할 수 있는 최대한 상세하게 보고하면 그 보고서의 정보가치에 따라 돈이 지급되었다.
검은 테 안경을 눌러쓰고 집과 도서관과 강의실만 맴돌던 그가 데모하는 격문을 쓰고 등사하고 배포한 것은 10월 15일 도서관 앞에서 ‘독재 타도’, ‘유신 철폐’ 데모가 50여 명이 외치다 별 호응도 없이 흐지부지된 것에 대해 이건 아니다 싶어 대학노트 여백에 급하게 긁적거렸다.
10월 17일은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7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야당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미국의 한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독재에 대해 미국은 더 이상 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을 ‘사대주의 발언’으로 간주하여 국회에서 제명되었다. 부산시민들은 분노했다.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 처리’가 통과되자 부산지역은 학생, 시민, 노동자 등 직업 불문하고 분노했다.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학생이 아닌 일반인들이 동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부터 한국 경제는 고용불안, 물가 상승, 국제수지 불안의 양상을 보이면서 극심한 침체기로 접어들었다. 정부의 경제 안정화 정책은 중소기업의 대규모 도산과 경제성장률의 하락을 통계청 자료가 보여주고 있었다.
부산지역은 섬유, 신발 같은 노동집약적 경공업 공장이 밀집된 지역이었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집중 육성정책 혜택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부산지역 노동자들의 노임은 전국에서 최저 수준이었다.
1979년 부산지역 대학생들의 시위는 학내투쟁에서 대정부 정치투쟁으로 서서히 변화했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
‘학원 사찰 중지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
학생들의 데모가 심해질수록 박정희 대통령은 더욱 강력한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1979년 8월 9일 YH 여성 근로자들이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했다. 여공들의 농성 사건을 빌미로 야당탄압을 가해오던 대통령 호위그룹은 10월 6일 김영삼 총재 제명이라는 전대미문의 정치적 탄압을 일으켰다.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10월 15일 도서관 앞에서 학생시위를 시도했으나 용두사미가 되었다. 그날 오후에 교련 수업이 있어 정광민은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고 11시경에 점심 같은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 도서관 앞에 누군가가 시국 선언문을 뿌렸지만 시위는 흐지부지 되었고 선언문 몇 장이 바람에 이리
저리 굴러다녔다.
그는 유인물 한 장을 주워 들었다. 경제학과 전공 수업이 있는 507 강의실로 들어갔다. 교실 뒤쪽 창가에 주저앉아서 장준호 교수 거시경제 강의는 건성으로 들으며 노트에 선언문 초안을 적었다.
―부산대 청년학우 여러분!
지금 우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부모님이 보내준 학자금으로 편안하게 공부해서 졸업하고 취직하면 그만인가요? 이미 김지하가 시 <오적(五賊)>에서 풍자했던 특수 권력층의 부정부패, 재벌에 대한 특혜금융, 빈익빈 부익부(貧益貧富益富), 격차는 점점 커지고 생산직 근로자는 터무니없이 낮은 저임금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왜 열심히 일을 해도 근로자는 계속 가난해야 합니까?
(이하생략)
노트에 선언문 초안이라고 쓰기는 했는데, 문장도 투박하고, 선언문으로 감동을 주지도 못하는 부족한 내용이었지만 등사기로 몇백 부 찍어 뿌려야지 생각했다. 등사기와 경필을 어디서 구하지? 머릿속에 박종세가 떠올랐다. 종세는 우리 춤 연구회 회장이었기에 동아리 사무실에 보유한 등사기를 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바로 종세를 찾아갔다.
광민의 기대와는 달리 종세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홍석철이었다. 석철 아버지 홍영식은 초량초등학교 선생님이라서 시험문제 출제를 위한 등사기가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석철아?”
“왜?”
“너희 아버님 시험출제 다 하셨지?”
“응.”
“그럼, 아버님께 말씀드려 등사기 하루만 빌려줄래?”
“알았다.”
석철 아버님은 별말씀 없이 등사기를 빌려주셨다. 석철이와 광민은 광민의 집으로 와서 선언문을 부지런히 인쇄했다.
―선언문―
부산 청년 학우들이여~
지금 우리는 유신의 쇠사슬에 얽매여 하루하루 숨 쉬기가 너무 힘들고 야당 총재 김영삼을 일개 법원 판사가 제명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김영삼 총재가 외쳤듯이 우리는 닭의 모가지가 비틀린 이 시국에 새벽을 여는 청년이 됩시다!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유신헌법은 법도 아니다!
국민의 눈과 귀와 손을 묶어버리는 이 나라 국민을 위하는 법이 아니라 국민을 억누르는 법이다라고 할 수 있다!
청년 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번 뜨겁게 불태웁시다! 혼탁한 시대를 사는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사명감, 책임감으로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 나갑시다!
―우리의 주장―
하나, 유신헌법 철폐하라!
둘, 학도호국단 폐지하라!
셋, 학원 사찰 중지하라!
(이 하 생 략)
10월 16일 오전 9시 10분 정광민은 대학도서관 앞 벤치에 앉았다. 벤치로 김홍기와 채수석이 다가왔다.
“홍기, 수석 잘 왔다. 507 강의실에서 선언문을 배포하는데, 홍기는 교수님 오시기 전 중간에 인사드리고 양해의 말씀을 드리고, 수석은 학생들 앞에 선언문 낭독하기 전에 분위기 좀 잡아주라.”
“알았어.”
507 강의실로 걸어갔다. 거시경제 교실은 경제학과 학생들과 선택과목으로 수강 신청한 학생들까지 70여 명이 있었다. 광민은 가방에서 선언문을 나누어주었고, 수석이 말문을 열었다. 이 선언문을 받으시고 잠시 정광민을 주목 바랍니다.라고 하자 광민이 교단 앞으로 갔다.
“여러분! 때가 왔습니다. 우리 모두 나갑시다!”
“나가자!”
“나가자!”
507 강의실에 모였던 경제학과 무역학과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운동장으로 내려가자 경상대학뿐만 아니라 인문대학과 자연과학대, 공과대학 학생들까지 합류했다. 부산대학교 역대 데모대열 중에 이날의 대열이 수적으로나 학생들 각오 면에서나 최고였다. 지도교수님들도 학생들 앞에 나서는 분이 없었다. 오직 박기태 총장만이 학생 여러분은 학문에 정진하라고 원론적인 말만 했다.
운동장에서 스크럼을 하고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학생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통일을 자유로 바꾸어 불렀다.
―우리의 소원은 자유
꿈에도 소원은 자유―
(이하생략)
경상대에서 ‘미라보 다리’를 건너 도서관으로 향했다. 광민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선언문을 중간에 나누어 주었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학생들은 가방을 자기가 나중에 찾기 좋은 곳에 놓고는 운동장 데모대열로 따라붙었다. 도서관 학생들이 합류하자 우리의 소원은 자유만 부르던 선두에서 <선구자>, <애국가>, <부산대학교 교가>를 메들리로 불러 불렀다.
(부산대학교 교가)
금정산 기슭에 새벽 별 닦아 노니/ 하늘도 넓어지고 포부도 높아져라/진리와 이상으로 불타는 젊은 학도/ 외치노니 학문의 자유/이곳이 우리들의 부산대학교/부산대학교/
교가를 합창하니 학생 중에는 눈물을 글썽거리는 학생도 있었다. 데모대열은 점점 불어났다. 학교 요소요소에 잠복해 있던 형사들은 늘어나는 학생들 대열에 놀랐다. 이미 초동 단계에서 해산해야 하는데, 초동 조치 시간을 놓쳤기에 사실대로 상부로 보고했다. 부산경찰서에서는 부산대학교 데모 진압을 위해 추가 전투경찰을 보냈다. 전투경찰 선두는 페퍼포그를 쏘는 지프차는 연속으로 최루탄을 발사했다.
경찰의 그런 증강에도 학생들의 대열은 점점 그 수가 불어났다. 학생들만 대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일반인들도 합류했다. 최루탄을 쏘았기에 재채기를 하고 손수건을 물에 적셔서 눈물을 닦았다. 시계탑 아래 보도블록을 빼서 전투경찰 차량에 던졌다. 학생들의 대항이 거세지자 경찰도 최루탄 발사를 정상 발사에서 속사 발사로 쏘았다. 사과탄도 터뜨렸다. 학생들 대열 위로 최루탄이 범벅으로 터졌다. 부산대학교 정문에 경찰 1개 중대가 증강 배치되었다. 경찰 지휘관이 확성기 방송을 했다.
‘학생들에게 경고한다. 지금 즉시 본관과 도서관으로 들어가라. 이곳으로 들어가지 아니한 학생은 이유 불문 체포하여 연행한다.’
일부 학생은 도서관과 본관 건물로 들어갔으나 더 많은 학생은 데모 대열 어깨동무를 더 견고하게 했다.
‘본관과 도서관에 들어간 학생들은 창가에 서지 말라.’ 경고 방송이 나가자 바로 최루탄을 도서관 본관 건물 창을 향해 발사했다. 와장창 유리창이 깨졌다. 경찰의 증강 배치는 방관하던 학생들을 자극했다. 경찰이 증강된 수보다 학생들의 뒤늦은 참여자가 더 많았다. 부산대학교 개교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데모 대열을 형성했다.
경찰은 추가 증원을 했고, 정문까지 진출한 학생들을 본관과 도서관에 들어가게 했고, 학생들을 조각조각 흩어지게 했다. 학생들이 어느 정도 흩어지자 경찰들은 운동장에 집결했다. 몇몇 경찰은 팔과 다리에 돌을 맞고 피를 흘렸다. 경찰은 무릎 위로는 완전무장을 했기에 날아오는 돌을 맞고도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방패 하단으로 날아오는 돌조각에 대해서는 별수 없이 맞았다. 학생들은 경찰이 운동장으로 모이자 다시 집결했다. 문창회관 앞에 1,000여 명이 모였다.
학생들이 스크럼을 짰다. 체육관, 강의실, 도서관에 임시로 피신했던 학생들이 다시 대열에 합류했다. 데모에 소극적이던 공대생들까지 합류하자 인원은 1,000명을 넘어 1,300명이 되었다. 비탈길을 스크럼을 짜고 내리 달렸다.
부산대학교의 지형이 데모 진압에 불리했다. 산기슭을 깎아 만들었기에 학생들이 고지 위에 있고 경찰은 아래서 위를 보고 진압했다. 정광민은 최루가스에 눈물을 쏟으면서 도서관 쪽으로 물러났다. 도서관 앞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다시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선언문을 다시 낭독했다.
‘우리는 학원 내 일체의 외부 세력을 반대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을 즉각 폐기하기를 주장한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원사찰 중지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진출하기로 했다. 여덟 줄로 스크럼을 짰다. 비탈길을 따라 운동장 족으로 뛰었다. 여학생들은 음료수와 빵을 대열마다 나누어주었다. 경찰은 이번 부산대의 데모는 이전의 데모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큰 특징은 놀라운 자발성이다. 졸업반 학생과 여학생까지 100여 명이 스스로 참여했다. 어느 누구도 체면 치례로 참여한 것 같지 않았다. 이전의 데모는 전투경찰이 데모 대열을 해산하면 그것으로 종료되었는데 이번 데모는 경찰이 어렵게 학생들을 해산시켰어도 학생들은 장소를 변경하면서 다시 모였다. 흩어졌다 다시 모인 학생들은 더 신념이 강해진 모습으로 뭉쳤다. 예전에 데모와 담을 쌓고 지내어 학구파 모범생들도 많이 참가했다. 10월 16일 정오에 부산대학교 박명규 총장이 사열대 본부석에 나타났다. 마이크를 잡고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학생 여러분!
여러분들의 충정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실정은 북괴의 위협이 드세지고 국제정세는 매우 어려운 때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이 이런 데모를 일으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오늘의 일은 학생 전체의 뜻이 아닙니다.
일부 학생의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사태는 사회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자제해 주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인류 공영에 이바지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학교와 달리 우리 학교가 이렇게 한 것은 일시적으로나마 심히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지금 곧 교실로 돌아가 교수님들의 지도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총장의 연설에도 학생들 대열은 줄어들지 않았다. 학생 중에 몇 명이 ‘우리 모두 부산역!’하고 외치자 ‘와~’하는 함성이 터졌다.
‘부산역 오후 2시!’ 부산역 오후 2시’ 앞 대열에서 외치자 뒤로 전달되었다. 파도타기 하듯 구호가 앞에서 뒤로 전달되었다. 대열 앞에서 맨 뒤까지 부산역 오후 2시가 전파되었다. 대열은 누구의 지시도 없었다. 하지만 슬금슬금 줄어들더니 시나브로 사라졌다. 각자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가 되자 부산역으로 모여들었다. 학생들이 흩어지자 전투경찰들은 데모 대열이 해산된 줄 알고 좋아했다. 학생들이 점심 먹고 부산역에 재집결하는 것은 알지 못했다.
지난 9월부터 부산 경찰은 부산대학교를 몇 겹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9개 경찰서에서 차출해 온 특수요원 100여 명은 사복으로 항상 대학교 안팎에서 서성거렸다. 사복경찰들의 지휘 본부는 장전동 동사무소 2층에 자리 잡았다. 동래경찰서에서 정보과장이 지휘를 맡았다. 혼자 24시간 있을 수 없어서 1 계장과 2 계장은 교대로 만들었다. 경찰서에 근무하면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지만 이렇게 사복으로 파견 나와 있으면 식대도 더 들어갔지만 지원해 주는 것은 없었다.
더욱 난감한 것은 대학교 안에서 아는 얼굴을 만날 때는 정말 피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부산대학생도 아닌 것이 부산대에 있다는 것은 사복경찰로 부산대학교의 대모 동향을 수집하는 것을 알려주는 골이었다. 경찰이 부산대 데모를 빨리 제압하지 못한 이유는 첫째, 지휘체계가 엉망이었고, 무전 장비가 부실했다.
데모 대열을 보고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여러 군데 흩어져있는 형사들을 신속히 모을 수 있는 휴대용 무전기도 없었다. 사복형사들이 데모 발생 단계에서는 멍하니 구경만 할 뿐이었다. 둘째, 책임을 갖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찰관들이 없었다. 데모대를 도서관까지 오게 함으로써 첫 번째 진압 기회를 놓친 경찰은 도서관 앞에 학생들이 모였을 때 이들을 깰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지휘계통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사복형사들은 꼬리만 뺐다. 도서관 앞에 데모대가 당도하는 순간 100여 명이나 되는 힘센 사복형사들이 한꺼번에 덮쳤더라면 초동 진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서울에서는 유정회 국회의원들이 유신 7주년 기념강연회를 세종문화회관에서 거행했다. 제갈 봉근 의원은 강사로 나섰다. 그는 유신체제의 궁극적 과제는 안정 속의 번영에 있는 것이며, 이는 국민총화와 능률의 극대화 없이는 이룩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런 뜻에서 국민총화를 깨뜨리는 요인은 그 구실이 어디에 있든지 국가적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이하생략)
부산에서는 부산대학교 안으로 들어간 경찰은 사열대나 교실 안으로 학생들을 몰아넣었으나 부산경찰서 특수 기동 경찰대 150여 명은 방석모와 방석망, 방석복을 입고 곤봉을 휴대했다. 멀리서 보면 꼭 야구의 포수 같은 복장을 하고 뒤뚱뒤뚱 행진했다. 오전 10시 10분, 부산대학교 정문의 담을 무너뜨리고 밖으로 나간 500여 명의 학생들은 골목을 따라 금강 공원 쪽으로 향했다.
금강공원에서 온천장까지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거리의 행인들이 손뼉 쳤다. 박수 소리에 학생들은 신이 났다. 일부 시민들은 학생들 대열 뒤에 따라붙었다. 점점 따라붙는 시민의 숫자가 늘어갔다. ‘유신 철폐’를 외치며 온천장 쪽으로 당당하게 행진했다. 구호를 열전 정도 외치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에서 통일 가사를 자유로 바꾸어 불렀다. 온천장에 도착했을 때는 학생들 숫자나 일반 시민의 숫자나 비슷했다. 그러니 학생 데모가 아니라 학생과 일반인이 혼재한 민란 수준이었다. 다른 진압부대 제1 기동대 50여 명의 경찰은 트럭을 타고 데모대를 뒤쫓아 왔다. 데모대가 온천장 네거리 입구에 이르렀을 때 트럭이 데모대열 속으로 치달아 들었다. 정광민은 친구 김인환과 옷을 바꿔 입고 데모대에서 이탈했다.
“광민아, 너는 할 만큼 다했다. 경찰에 잡히면 안 되니 키가 비슷한 나랑 옷 바꾸어 입고 도망가라.”
“알았다.”
김인환은 옷을 갈아입고, 김홍기, 조필원, 주인현, 이건섭 등은 주머니에서 돈을 털어서 광민에게 도피여비로 주었다.
“하여튼 잡히지 마라.”
“알았다!”
인환이 정광민 옷을 입었기 때문에 경찰은 김인환을 정광민으로 오인해 체포를 했다. 압송해서 부산경찰청 정보과 주임이 심문을 했다. 학생증 주민등록증을 검사했다. 정광민 신분증이 아니라 김인환 신분증을 내밀었더니 위조신분증 검사를 했다. 위조 아님으로 위조식별기가 표시되었다.
“김인환이 왜 정광민 옷을 입었나?”
“뭔 소리입니까? 이건 처음부터 내 옷이라 예?” 인환은 당당하게 자기 옷이라고 주장했다.
“그럼, 광민에게 준 너 옷 색깔이 뭐야?”
“당신들이 주는 거 봤어요?”
워낙 당당한 인환의 목소리에 경찰은 더 이상 추궁을 못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혼재한 데모 대열을 경찰 기동대가 중간을 갈랐다. 대열이 쪼개져서 한 갈래는 온천천으로 뛰어내려 하천을 건너 명륜동 족으로 행진했다. 다른 한 갈래는 저지대 주택가로 뛰어내려 사직동 쪽으로 향했다. 거리의 시민들이 데모 대열에게 경찰 위치를 알려주었다.
“학생들, 저 사거리에 경찰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예, 감사합니다. 어르신!”
도로로 나오자 시내버스 안에서 시민들이 버스 유리창을 열고 손을 흔들어 학생들에게 응원을 보냈다. 온천장에서 사방으로 흩어졌던 학생들이 사직동 큰길에서 다시 만났다. 사대부고에서 산업도로를 거치지 않고 곧장 온천장 쪽으로 질러오다 온천 파출소 앞에서 경찰의 공격을 받고 흩어진 학생들도 사직동 큰길에서 다시 만났다. 학생과 시민들이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과 시민이 합세한 데모 대열은 겁날 것이 없었다.
광민 아버지는 경비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직 후에는 화물차 운전을 했다. 한 달에 20만 원을 벌기 위해 새벽 6시에 일터로 나가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데모할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으나 자기 생각을 나타낼 때는 폭발적이었다. 표정은 무표정해도 두 눈동자는 빛이 났다.
미남로터리로 향한 데모 대열은 경찰 150여 명과 대치했다. 학생들이 주먹 크기의 돌을 던졌다. 정통으로 맞은 경찰은 한두 명 달아나더니 학생들이 운전하는 경찰이 사라진 경찰차를 뒤집고 불을 붙였다. 경찰서장은 일찌감치 도망갔다. 서장이 도망가자 중간 간부들도 다 도망가고 데모 대열에 경찰이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어둠 속 대모 대열은 유리병과 짱돌과 각목 등을 휘둘렀다. 학생들과 일반 시민이 합세한 데모 대열은 점점 불어났다.
부산경찰서장은 다른 지역 경찰을 부산으로 지원 요청했다. 경찰은 데모 대열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진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자위책이 우선이었다. 부산 시내 곳곳에 건축공사장이 있었고 건축 자재 자강, 각목, 블록, 벽돌은 아주 유용한 데모대열의 무기가 되었다. 일부 시민들은 학생을 연행하는 경찰에게 연탄재를 던지고 연탄재 때문에 눈을 감은 경찰을 학생들은 발로 차고 각목으로 때리고 달아났다.
최루탄을 발사하면 시민들이 데모 대열로 휴지를 던져주었다. 미남 로터리에 데모 대열과 대치한 경찰은 참패하고 후퇴하여 반도 호텔 앞에 재집결했다. 부산경찰서 상황실에서 무전이 날아왔다. 부영 극장 앞으로 이동하라고 했다. 150여 명의 병력은 경찰서장 승용차를 선두로 남포동 지하도 쪽으로 이동했다.
공사장의 널려있는 자갈, 벽돌, 블록, 각목 등을 닥치는 대로 던지고 휘두른 데모 대열에 경찰이 도망쳤다. 포니 경찰차 운전자는 미처 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데모 대열에 포위가 되었다. 벽돌로 유리창을 깨고 깨진 유리 사이로 각목을 쑤셔 넣었다. 십오 명의 데모대원이 포니를 뒤집었다. 뒤집힌 포니에서 운전 경찰이 기어 나왔다. 나오자마자 데모대 한 명이 빨랫줄로 두 손을 묶었다. 부산경찰서장에게 연행한 학생과 맞바꿀 요량이었다. 뒤집힌 차량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펑! 소리와 함께 포니는 불길에 휩싸였다.
<부산 청년 학우들이여!
너희는 오늘 무엇을 하느냐?
온 나라가 유신 독재의 압박에 신음하는데.
(이하생략)
세월이 흐른 뒤에 차상만 교수는 민주화 운동 연구에 전문가라고 ‘부마항쟁과 민중’이라는 책에서 10.16일 부산의 데모가 4개 부류라는 주장을 했는데, 망원 37호, 위장 명칭 김길수, 본명 제갈 상길이 그 자리에서 본 것은 조직도 없었고, 노동자 농민, 하층민의 계급의식이 없는 학생들과 그냥 지나가던 시민들이 합세한 것이고, 노동자들은 한 달 일하고 빠듯한 월급으로 살아가기 급급했지 그렇게 대학교수가 생각하는 항쟁 의식은 없었다. 그때 1979년 10월 16일은 그런 계급의식도 민주화운동 계보도 찾을 수 없는 단순 데모였다. 세월이 갈수록 그 자연스러운 민주화 운동에 숟가락 하나 슬며시 얻는 현상에 정광민과 제갈 상길은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