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2일이라 쓰고
군사반란으로 읽는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10.26 만찬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망원의 보고는 김재규를 대신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받았다. 처음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과는 관련 없는 것이라던 것을 뒤집고 총장을 연행 조사해야 한다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결재 문건을 보여드렸다.
“각하!
시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육군참모총장이 관련 있는 혐의를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정 총장 연행조사를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는 비상계엄 중입니다. 계엄사령관의 연행은 중대사안인만큼 국방부 장관의 보고를 들어 신중히 처리할 것이니 장관을 오라고 하시오.”
“각하, 윤필용 사건 때에도 장관 배석 없이 재가하셨습니다.”
“계엄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는 총장의 연행은 신중해야 됩니다.”
접견실 밖에서 서성거리던 김상덕 중령이 보안사령관에게 귓속말로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과정에서 우 대령이 부상을 당했지만 연행은 성공했다고 보고했다.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정 총장은 이미 연행되어 조사실로 이동 중입니다. 재가하셔야 한다고 했다. 검은 안경테를 올리면서 어눌한 소리로 장관을 배석시키라고 재차 강조했다. 공관에서 마냥 시간을 끌 수 없던 그자는 경복궁으로 돌아갔다.
육군참모총장은 공관 2층 거실에서 식사를 마치고 외출준비를 했다. 군복 대신 간편복을 입고 나서려는데 전속부관이 보안사 정보처장이 들어온다고 보고했다. 낮에 육군참모 총장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는 말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지 생각하는 순간 허 대령과 우 대령이 충성! 총장님을 모시러 왔다고 했다.
“야, 계엄사령관을 수사하려면 대통령 재가가 필요한 거 알아?”
“예, 저희 사령관께서 삼청동 결재를 받았다고 연락을 받고 나왔습니다.”
“부관! 당장 전화 연결해 봐? 국방부 장관이나 대통령 각하 연결해!”
“알겠습니다.”
전화를 연결하려 했으나 국방부 장관은 행방을 알 수 없고 공관에는 전화가 불통이었다. 그 사이 두 대령이 정 총장을 양팔을 끼고 공관 밖으로 나왔다. 공관에서 총격전으로 우 대령이 쓰러졌다. 우 대령을 대신해서 김 소령이 허 대령과 참모총장을 차에 태웠다. 서빙고 분실로 향했다. 조사관은 백지에다 그날 일을 적으라고 했다.
“야, 이놈들아 너희가 고문을 하려거든 나를 육군참모총장에서 사표를 낸 다음에 고문을 해야지 난 참모총장으로 고문받을 수 없다!”
“넌 이미 끝났어! 범인은 사형이고 넌 최소한 무기야!”
수사관들은 대통령 시해에 무슨 밀약을 했나 쓰라고 했다. 일단 시해하고 계엄을 선포하고 당신이 계엄사령관이 되면 계엄사령부를 혁명위원회로 바꾸려 하지 않았느냐? 했다.
경복궁으로 돌아온 그는 유태성, 황일 시, 차기헌 중장과 노형우, 박명규 소장, 백운기, 박상천 준장 등에게 대통령이 참모총장 연행문건에 국방부 장관을 배석을 시키라고 하면서 결재를 미룬다고 털어놓았다. 황 중장이 입을 열었다.
“마냥 국방부 장관을 기다릴 수 없으니 집단으로 정 총장 연행 재가를 요구하고 만약에 안 될 경우에는 육군본부 지휘계통을 제압해서 사태를 해결합시다.”
“예, 맞습니다. 우리 모두 삼청동 공관으로 갑시다.”
“그럽시다!”
밤 9시 30분에 합동수사본부장과 장군 6 명이 공관으로 왔다. 대통령에 추대되었어도 과도정부이고, 국민투표로 대통령이 탄생되면 청와대에서 살게 하려고, 청와대는 집무실만 쓰고 출퇴근을 총리 공관으로 했다.
공관에서 6명 장군이 참모총장의 연행 재가를 요구했으나 국방 장관을 배석시키라고 되풀이했다. 황 중장은 재가 지연은 전쟁을 부를지도 모른다고 불경한 말까지 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을 억지로 참았다. 밤 11시가 넘어서 국방부 장관이 합동수사본부장과 전화 통화를 했다.
“장관님, 총장 연행조사 문건에 장관 결재를 받고 보고하라는데 오셔 결재하셔야겠습니다.”
“아니요, 국방부 장관실에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결재를 받아야지, 각하 앞에서 설명을 들을 수는 없는 일이오.”
“그러시면 보안사로 오십시오. 보안사로 가겠습니다.”
사태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처리할 수 없게 흘러가는 것을 감지한 전두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제1 공수여단장에게 부대를 출동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고 국방부 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해 오라고 지시를 했다.
국방부 보안 부대장 이 보수 대령에게는 1 공수여단이 국방부 진입 시에 국방부 경계 병력과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국방부 당직사령에게 협조를 잘하라고 지시했다.
국방장관을 찾아서 배석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날 육군참모총장이 궁정 안가에 간 것이 문제라면 바로 연행체포 조사를 했어야지 이제야 연행조사를 한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누구도 지적하지 못했다.
국무총리와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국방부로 보냈다. 국방부 장관을 만나서 같이 총리 공관으로 오라고 했다. 새벽 5시가 되어 국방부 장관이 공관에 왔다. 사후 결재지만 결재를 하셔야 한다고 했다. 결재란에 서명을 하고 벽시계를 힐금 보고는 05:10이라고 시간을 명시했다. 시간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었다. 어젯밤 보안사령관이 처음 문건을 가져왔을 때, 신속히 결재를 했으면 좋았을까? 역사가들의 평가가 두려운 순간이다.
후세 역사학도가 그를 비겁한 대통령이라 평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만약 결재를 끝가지 안 하고 어젯밤 일은 군사 반란이니 주동자를 체포한다면, 훌륭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까? 박 대통령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시기에 총탄에 가신 후에 대통령에 추대는 되었지만 빨리 무거운 짐을 벗고 싶었다.
국민 대다수가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투표로 하고 싶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헌법이 국회서 새로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선출되면 자리를 물려줄 것으로 예상했다. 국가의 일은 나의 계획처럼 되지 않았다.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으면서 조서를 쓰고 다시 쓰고 반복을 한 그는 수사관들이 집요하게 정보부장과 작당해서 대통령을 시해한 것으로 몰고 갔다. 궁정 안가에서 중앙정보부로 가는 차를 육군본부로 가도록 한 것이 계엄을 선포하고 그를 보호할 목적이 아니냐고 따졌다. 보호했으면 저렇게 남한산성에 수감되었겠냐고 반문했다.
그날 밤 결재 없이 돌려보내고 가죽 의자에 목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한 것은 아니다. 그냥 눈을 감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한 장면이 지나갔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었다. 수양대군이 심복을 대동하고 김종서 대감 집을 향했다.
“이리 오너라!”
소리에 하인이 나와 인사를 하고 수양대군이 찾아왔다고 기별을 고하자 김종서 대감과 아들이 나왔다. 수양대군 심복의 칼에 김종서 부자는 목숨을 잃었다.
이 밤 국방부 장관 심정이 김종서 심정일까? 인생을 살 만큼 살아한 목숨 버려도 아깝지 않은 이 나이에, 이 밤이 이렇게 먹먹한 밤이 될까? 유신을 종식시키는 것에 한목숨 버린다고 한 시해범이 오히려 부럽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심정일까?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이라면 거행할 수 있었을까? 범인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으면 감형시켜줘야 하나? 사형을 바로 집행해야 하나? 지금이야 그가 천하 역적 못된 놈이지만, 이 나라 유신 독재 종식을 위해서 이런 방식으로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유신은 100년 갈 것이다.
얼마 전의 부산 마산에서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갈 것이고, 그놈 말대로 탱크로 200만 명을 깔아버린다면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임금은 어떻게 그 밤을 보냈을까? 그날도 이 밤처럼 먹먹했을까? 13세 어린 나이에 등극한 임금, 국정을 수행하기에 너무 나약한 인간이 그날 밤을 지금 나처럼 눈을 감고 무겁게 보냈을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양대군과 보안사령관 환영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김종서 대감과 국방부 장관의 얼굴이 겹쳐 멀어진다. 눈을 떴다. 꿈도 아니고 잠시 지나간 망상이었다. 망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이 순간 이 먹먹함이 닮아도 너무 닮았다.
역사적으로 국난이 생겼을 때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헌법에는 국가의 위험이 있을 때 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한다고 되었다. 이 밤에 국방부 장관 행방이 오리무중인데 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한들 몇 명이 소집될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계엄이 선포된 상태에서 계엄사령관을 결재도 안 받고 체포하는 무법천지에 공자님이 부처님이 국군통수권자라고 해도 진정이 될 수 없는 상태였다.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을 불러 체포한 참모총장을 풀어서 원위치하라고 명령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완전히 나라가 내란의 소용돌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참모총장 연행조사 문건 결재를 하는 순간 모든 책임은 내게로 전이된다.
둘이 공모한 정황이 있다면 제대로 처리될 것이지만 공모관계가 아니라면 후세 역사가들이 비겁한 대통령으로 평가할 것이다. 긴박한 시국에 장관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자정이 되어도 오지 못하는 것일까? 김종서 대감처럼 이미 죽여 놓고 나에게 결재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별별 망상이 떠올랐다. 국방부 장관이 자정이 넘도록 총리 공관으로 오지 않아서 국무총리와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국방부에 보냈다. 국방부 장관을 만나거든 함께 공관으로 오라고 했다. 새벽 5시가 되어 공관에 나타난 국방부 장관이 참모총장 연행조사문건에 자신이 협조 서명을 하고 나에게 사후지만 결재를 하셔야 합니다. 서명을 하자 급히 서류를 들고나갔다.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헌법으로 국민이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면 물려주고, 횡성 태종대 옆 가경(佳耕) 선생에게 가고 싶었다.
가경 선생과 최규하는 어린 시절 원주역 철길 옆에서 기차놀이 하던 동무였다. 검정 고무신으로 기차를 만들어 모래를 운반했다. 좀 커서는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했고, 초등학교 입학은 규하가 먼저 입학했다. 최규하는 양띠 7월 생이고, 가경은 원숭이띠 4월생이었다. 매일 함께 놀던 규하가 학교에 가고 없으니 가경은 심심했다. 아버지 중산(中山) 함태봉(咸台鳳) 훈장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규하와 고무신으로 기차놀이 하던 친구인데 원주중학교에 가면 규하는 2학년이고 가경은 1학년이면, 충성! 경례를 해야 하는데, 절대로 경례하며 지낼 수 없다고 보내달라고 했다. 중산 선생은 학성초등학교를 찾아갔다.
연영흠 교장이 중산서당 출신이라 훈장님의 예고 없는 방문에 깜짝 놀랐다.
“훈장님, 학교에 웬일로 오셨습니까?”
“가경이가 규하 친구인데, 중학에 가면 선배라고 경례해야 되니, 그거 싫다고 학교 입학시켜 달라고 해서.”
연 교장선생은 가경에게 친구들은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다 배웠는데, 따라갈 수 있겠냐? 물으니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면 따라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교장 선생은 1학년 담임 이유나 선생을 불렀다. 오늘 수업이 끝나면 함가경(咸佳耕) 어린이를 특별 지도해서 1주 동안 배운 거 진도에 맞게 가르치라고 했다.
사실 가경과 규하는 초등학교 1학년 입학 전에 천자문을 익혔다. 천자문을 익히고 학생이 되니 중학교 한문 수업은 하나마나 100점이었다. 지금도 원주중학교 100년 역사에 깨지지 않는 기록이 최규하, 함가경 두 학생이 한문 과목을 입학에서 졸업까지 나란히 연속 100점 기록이다. 둘은 놀이를 해도 한자를 가지고 놀았다. 규하가 가경에게 문제를 냈다.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것이 무엇이냐?”
“소우(牛)에 외나무다리(一)는 날생(生)이다.”다음은 가경이 질문을 했다.
“여기 나무가 세 그루 있다가 뭐야?”
“음, 나무목(木) 두 개는 수풀림(林)인데 세 개라.木木木 이런 글자는 없어!”
“공부 좀 해라. 하나는 나무목(木) 둘은 수풀 림(林) 셋은 나무 빽빽하게 많을 삼(森)이다.”
“야, 그거 천자문에 나와?”
“당연히 안 나오지?”
“이거 반칙이야, 부친이 서당 훈장님이라고 혼자 더 공부한 거야?”
“아버지에게 배운 거 아니거든? 학성초등학교 연영흠 교장 선생님 전임이 오목교장(五木校長) 선생님이라고 해서 바둑판에 돌 다섯 개 놓으면 이기는 ‘오목’인 줄 알았더니, 이름이 임 삼(林 森)이래. 그래서 이름이 木자 다섯 개가 이름이라 오목(五木) 교장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알았지.”
“야~~ 신기한 이름이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중산서당(中山書堂) 출신이 경기고 마치고, 서울대학생이 되고, 외교관이 되었고, 국무총리에서 대통령까지 지낸 일련의 이야기를 써서 후세 사가들에게 연구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규하는 서울로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가경은 부친이 운영하는 중산서당 수입으로 고등학교 학비 감당도 안 되고, 중학교를 마쳤으니 그 이상의 신학문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부친의 중산서당을 물려받기 위해 사서삼경 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한문을 버리고 한글 전용 정책을 시행하자 중산서당 입학생이 90%가 줄었다. 나이, 수준별로 요일을 정해 가르치던 것을 모두 한 반으로 가르쳤고, 그나마 중산 선생이 돌아가시고 가경이 서당을 운영할 때는 도저히 서당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워 서당을 폐업하고 막국수집을 운영했다.
지금은 각림사(覺林寺)가 기와조각 하나 남은 것이 없지만, 조선 초기에는 학승도 많았던 절이다. 방원은 왕자시절 원천석의 가르침을 받았다. 불교가 득세하던 시기에 원천석은 유학의 대가였다. 방원에게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을 五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의(義) 하나에 귀결된다고 가르쳤다. 중용의 도라고 하면서 그것이 중간쯤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 엉터리 유생들이 수두룩하다고 개탄했다.
“방원은 들어라. 네가 의(義)에 살고 의(義)에 죽으려거든 제자가 되고 그럴 생각 없이 적당히 세상에 타협하고 좋은 것이 좋다고 눈치껏 살려거든 공부랑 생각을 말고 한양으로 돌아가라”
“아닙니다. 스승님 저를 잘 지도해 주십시오. 스승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겠습니다. 구차하게 목숨을 길게 사느니 목숨 걸고 싸울 때는 싸우고 저의 뜻을 펴 보겠습니다.”
그 답을 듣고서야 천석은 소학,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가르쳤다.
세월이 지나 절에서 공부를 마치고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되었다. 배움의 시기에 의(義)에 대해서 인의예지신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의(義) 속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다 들어 있음을 알려주신 스승을 조정으로 모시고 싶었다.
태종 일행의 수레가 원주 감영에서 강릉 가는 길을 따라 안흥을 경유하여 각림으로 들어왔다. 주천강 강변을 따라 송실을 지나 강 상류로 가다가 빨래하는 노파를 발견했다. 노파에게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앞에 가던 선비가 어디로 갔느냐 물으면 우측으로 돌아갔다고 말해 주시오. 부탁을 하고 바위로 올라갔다. 뒤에 수레를 타고 오는 사람들이 노파에게 앞에 지나간 선비가 어느 쪽으로 갔느냐? 물었다. 노파는 우측으로 갔다고 말했다.
제자가 임금이 되어 스승을 찾아왔으나 노파의 거짓말로 만나지 못하고 수레가 덜컹거리고 넘어갔다. 노파는 태종의 수레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일반 관리의 수레로 생각했는데 용이 그려진 임금의 수레였다. 앞서 간 선비는 좌로 갔는데 자신의 말로 수레가 우로 가는 것을 보고 임금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빨래를 하다 말고 물에 빠져 자진했다.
물 맑고 깨끗한 횡성 태종대 옆에서 회고록이나 쓰고 노년을 보낼 계획이 이 먹먹한 밤, 12.12 군사반란으로 소박한 꿈이 사라졌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끌려갔다. 수사관들이 몽둥이로 엉덩이와 목을 때렸다. 공모한 사실을 쓰라는 것이었다. 결재도 없이 체포하고 사후 결재를 한 이후 무력감에 빠졌다.
국방부 장관이 군 인사 서류를 가지고 와도 사실은 보안사 대령들이 만들어준 것을 그대로 표지에 결재란만 새로 만들어 온 것이 눈에 보였다. 사태가 진압된 이후는 공직자들이 노골적으로 그자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들이 천자문이나 똑바로 읽고 공직을 수행하나?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의 도(道)라는 것을 아는 공직자가 몇이나 되려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부처 장관이 있어도 장관은 허수아비가 되었다. 비상대책 위원회의 기안이 정부 정책이 되었다. 비서실장이 만들어 준 유시를 발표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난국을 극복하고 국가 보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선포된 전국 비상계엄 하에서, 내각과 계엄 당국 간의 협조 체제를 긴밀히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 보위 비상대책 위원회>를 설치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국난을 겪으면서도 민족사의 정통성을 연면히 수호 발전시켜 온 우리 조상들과 선배들의 애국 애족의 정신을 일깨워 애국심과 단합된 힘을 발휘할 때입니다.
대책위원 여러분은 당면한 비상시국에 임하여 헌신의 각오로 사를 버리고 공을 위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해 주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으로 유시를 했다.
서빙고 분실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참모총장은 고문실에 들어가 철제 의자에 결박당했다. 수사관이 몽둥이로 구타를 했다.
“이 자식, 공모했지? 다 알고 있으니 거짓말 말고 진술해!”
“공모했으면 김이 체포되게 했겠는가?”
“김 체포하는 데 미온적 태도 취한 이유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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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비권을 행사하자 얼굴에 물수건을 씌우고 주전자로 수건에 물을 부었다. 숨이 막혔다. 실신했다. 거사 공모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자 김에게서 돈을 얼마나 받았느냐? 금전 문제로 선회했다.
역사적으로 봐도 쿠데타를 일으키는 쪽과 막는 쪽의 무력의 힘은 정신적 태도에서부터 다르다. 쿠데타를 하는 쪽은 성공하면 다행이고, 실패는 죽음이고 역적이기에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고 진압하는 쪽은 목숨 걸고 하다가 쿠데타가 성공하는 날에는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교도소에 가게 된다.
5.16 군사 반란에서 이미 경험했다. 5.16을 혁명이라고 배운 장교들이니 기미정난도 성공하면 기미혁명(己未革命)으로 둔갑할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적극적인 진압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역사적으로 쿠데타를 목숨 바쳐 저지한 사례도 있다. 스페인 왕국에서 안토니오 중령이 중무장 병력 140 여 명을 이끌고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국회의사당을 점령했다. 국왕은 ‘나를 죽여라!’라고 쿠데타 병력 앞에 나갔다. 국방 장관이 ‘무엄하다. 지금 당장 철수하라!’ 명령과 호통을 쳐서 쿠데타를 굴복시켰다.
칠레의 아옌데 정부에 대하여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있었다. 자유선거를 통해서 수립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의 아옌데 대통령을 피노체트 쿠데타군이 대통령궁을 공격해 오자 대통령 스스로가 기관총을 들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한 죽임을 당했다. 기미년 이 땅에는 스페인 국방 장관도 아옌데도 없었다.
사전 모의를 했다면 시해 후 곧바로 계엄사령부 간판을 혁명위원회 간판으로 바꿀 것이지 순리대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나를 대통령으로 추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공모를 부인하자 이성수 중령이 찾아와 조사관들이 하라는 대로 협조하라고 회유했다.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다고 회유를 거부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12.12 군사 반란을 참모총장을 연행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단순사건’이라고 하겠지만 세월이 50년 흐른 뒤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평가될 것이다.
국방부 장관은 공관에 도착하여 국무총리와 참모총장 연행과정에서 공관의 병력들과 국방부 병력 체포 병력 간에 총격 사건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이미 참모총장이 재가 없이 연행되었으니 사후 조치로 재가하심이 타당하다고 해서 결재를 했다.
서명 옆에 시간을 기록했다. 후세 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두려웠다. 결재하는 만년필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5월 26일 사태가 진압된 후 이 두 명의 대령을 대동하고 청와대 집무실로 찾아왔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에 대한 보고였다.
“각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에 따라 대통령의 통수 및 감독권이 대폭 추가되어 계엄업무를 관장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자문 보좌 기관이 필요합니다.”
“그 보좌 기관이라는 것이 법적 절차에 타당한 것인가?”
“예, 계엄법 제9조와 정부조직법 제5조, 계엄법시행령 제7조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릴 수 있습니다.”
“그럼, 시행할 수 있도록 보고서를 준비하시오.”
“예,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여기 서명만 하시면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서명하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통령은 국보위의 의장이 되었고 16 명의 당연직 위원에는 국무총리, 부총리, 외무, 내무, 법무, 국방, 문교, 문공, 중앙정보부장, 대통령비서실장, 계엄사령관, 합참의장, 각 군 참모총장이 들어갔다. 대통령이 10인 이내로 임명해서 26 명이었다.
군사 반란에 경복궁에 있었던 인원을 ‘경복궁 전우회’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이 나라 최고 친목 단체는 1위가 ‘해병전우회’, 2위 ‘고대교우회’, 3위 ‘호남향우회’, 4위 ‘재경횡성향우회’ 5위 ‘재원강림향우회’ 순이라고들 하는데, 그 중간 어디에 ‘경복궁12.12전우회’를 넣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으로 권위와 행정력을 펼 수가 없었다. 비서실장에게 하야성명을 준비하도록 하고 휴가를 떠났다. 휴가를 마치고 하야성명을 낭독했다.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작년 10월 26일 국가원수의 돌연한 서거로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대통령권한 대행의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10대 대통령에 추대되어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대임을 완수해 왔습니다. 국군통수권자로 국가적 난국에 대처하여 철통 같은 방위태세로 북한공산집단의 무력도발을 억지해 준 우리 국군장병 여러분에게 노고를 높이 치하합니다. (이하생략)
하야 성명은 8월 16일에 낭독했지만 1년 전 12월 13일 05시 10분에 참모총장 체포연행 조사문건에 서명하는 순간 결심한 것이었다.
이미 물을 엎고 나서 나보고 물을 다시 담으라면 담을 수 없는 노릇이다. 시기만 고르고 있었다. 먹먹한 밤에 결재서류를 들고 온 전두환 보다 유, 황, 차 3명의 중장이 보안사령관보다 더 얌통머리 없어 보였다. 3성 장군이면 2성 장군에게 상급자답게 정도의 길을 가라고 하급자를 나무라자는 못할망정, 낮은 자에게 아첨이나 하고, 엄연히 국방 장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관까지 찾아온 것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12.12 군사 반란이 있던, 그날 새 울고 먹먹한 밤에 유배지에서 어린 임금이 지었다는 자규시(子規詩)가 떠올랐다.
― 한 마리의 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이하생략)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가경 선생 있는 곳으로 왔다. 태종대 바로 옆 ‘각림막국수’가 선생 댁이다. 젊은이들이 한학을 배우려 하지 않아서 원주 중산서당 문을 닫았다. 생계를 위해 각림막국수를 하였고 지금은 아들 며느리가 가업을 이어갔다.
선생은 반갑게 맞이했다.
“천자문도 모르는 놈들에게 얼마나 수모를 많이 당했소? 이제 누추하지만 누구 하나 전화도청도 할 수 없는 이곳에서 하고 싶어도 못했던 말을 마음껏 하시게?”
“일단 밀주나 한 사발 주시오?”
“한 사발이 뭐야? 한 말이라도 드시게?”
선생은 촌에 살고 있지만 서울에서의 그 일을 손금 보듯이 다 알고 있었다.
“기미년이 참으로 이 나라 국운을 바꾸는 해는 해야. 일본이 미국의 원자탄으로 망했지만 이미 기미년의 조선의 인민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서 기가 죽었어. 그 3.1 혁명의 기운이 다시 기미년에 발현된 것이야. 조선시대도 사육신 거사에 배신자가 생겨 실패했는데, 혼자서 잘한 것이야 그걸 장군들 몇몇 뜻을 모아 진행했으면 그중 한 놈 변절자 생겨서 일망타진되고 수포가 되었을지도 몰라. 혼자서 아니 그의 심복들 다섯 명이 함께 사형되었지만 성공은 성공이야? 이 나라에 민주화가 40년은 앞당겨질 걸세. 국민이 그걸 이해하려면 50년은 걸리겠지만.”
“난 왜 3선만 하고 그만두었으면 두고두고 칭송받을 것을 헌법을 개정하면서 영구집권을 하였는지가?”
“신이 아닌데 신으로 착각했거나 추종자들이 교주로 생각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해. 작은 조선 땅에 세 놈이 잘못 태어나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걸세. 북에는 김, 남에는 박 사이비 교주가 죽을 때까지 통치하고도 나라가 안 망한 특이한 나라지?”
“정희의 희(熙)가 파자를 하면 신하 신(臣) 몸기(己) 불화(火)의 결합이라고 신하에게 화를 입을 이름이라는 말이 돌았었지요?”
“그거 다 죽은 다음에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지. 해방 직후에 여운현 선생이 건국준비위원회 만들었을 때 남이나 북이나 지도급 인사들이 뜻을 모았으면 나라가 이 지경 안 되는데 세 놈 별종이 조선을 송두리째 망가뜨렸어.”
“그 세 놈이 두 놈은 김일성 김정일인데 한 놈은?”
“한 놈?”
“북이 두 놈이지만 세습이라 한 놈으로 치고 남이 이승만이 하고 박정희야.”
“이승만은 나라를 망하기 직전까지 왔지만 박정희는 도탄에 빠진 무능한 정부를 구출한 거 아닌가요?”
“18년 장기 집권하고도 나라를 이 정도밖에 못 만든 건 무능 중 상 무능이야. 다른 나라는 수시로 국민투표로 집권당이 좌로 우로 바뀌어도 발전하지? 그걸 변동 없이 18년을 하고도 이 정도라는 것은 완전 대기업 위주로 밀실 정치로 부패하고 또 부패해서 그런 것 일세.”
“그럼, 다음 정권은?”
“다음 정권도 천자문도 모르는 놈들이라 큰 기대 안 해. 제대로 민주가 뭔지 아는 인물이 50년 후에나 나오겠지?”
선생은 그놈들이 하야를 부추기더라도 꾹 참고 일단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새 헌법을 만들고 나서 하야를 하지, 그렇게 맥없이 물러나면, 고향 선비 운곡 선생에게 미안하지 않느냐고 했다. 밤새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고 옥수수 밀주 일명 앉은뱅이 술을 마시다 보니 동이 텄다. 선생은 망태기를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같이 가세, 이 초막에서 나 혼자 심심하게.
초막을 나오니 태종대 아래 시퍼런 물이 눈앞에 보였다.
“태종 일행에게 운곡 방향을 반대로 가르쳐 주고 얼마나 기겁을 했을까?”
“그렇다고 죽어?”
“안 죽으면 잡혀가 사형인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을 목숨 스스로 내가 살던 고향 물에 빠져 죽는 것이 감영에 잡혀가 죽음 당하는 일보다 좋았겠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변암에 도착했다. 내려오는데 날이 저물었다. 태종대 숲에서 새들이 울었다. 새 울음소리와 어둠이 밀려오자 그날 밤 먹먹했던 밤이 떠올랐다.